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림자 용 : 2011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라키난 (lakinan@naver.com)



 2011년 대표 중단편선 [그림자 용]이 나왔다. 책을 만드는 과정의 산고는 알 수 없으나, 거울이 이번 책에 어지간히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 책은 거의 570쪽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에, 총 열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감상은 즐거웠으나 감상문은 고민스러웠다. 충실하게 만들어진 단편집이라 그렇다. 통일된 주제가 있는 앤솔러지거나, 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면 글 쓸 방향을 잡기가 쉽다. 제목이나 작가 이름으로 가면 될 터이다. [The Year’s Best] 같은 여러 작가의 단편집은 작품마다 개별적으로 평하는 게 보통일 텐데, 14편을 일일이 다루기는 조금 벅차서 고민스러웠다.

 약간 편법을 써서, 소주제를 뽑아 분류해보기로 했다. 특정 키워드로 몇몇 작품을 묶어 그 안의 작품끼리 비교하는 것이다. 혼자 괜찮은 방법이라고 감탄하며 이리저리 짝지어 봤다. 그렇게 뽑은 키워드는 다섯 개다. 좀비, 시간, 죽음, 말, 환상. 임의로 선정한 것이니 다른 이는 취향에 따라 다른 단어로 치환해보기를 권한다. 실제로 어느 쪽에도 들어갈 수 있어 어떻게 묶을지 고민한 작품이 많았다. 이 글을 통해 작품 읽기에 새로운 면을 제공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좀비

 좀비는 시체를 먹는 괴물이다. 좀비에게 물리면 살아있는 사람도 좀비가 된다. 좀비에게 둘러싸이면 영화에서는 극한상황이 되고 게임에서는 학살장면이 된다. 좀비는 전염병, 죽음, 광기를 의미하는 한편, 대단치도 않으면서 징그러운 ‘잡것’이기도 하다. 친애하는 이들이 좀비가 되었을 경우 죽일지 말지 선택하기 힘든 갈등상황도 종종 볼 수 있다.

 종의 기원
 여기서는 좀비의 상징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밤이 귀족이며 성주의 이미지인 뱀파이어와는 달리 좀비는 하층민/노동자이다. 여기서는 300명의 좀비가 갑자기 발생한다. 주인공 승연의 남자친구도 300 좀비 중 하나다. 좀비들은 추적장치를 단 채 풀려난다. 사람을 위협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한다고 한다. 그들의 먹이는 유기된 시체를 모아 간 것이다. 혹여 좀비로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잘게 다지고 간 시체 조각이 배급된다.
 사회의 통제 하에 놓인 좀비는 더 이상 공포를 자아내는 괴물이 아니다. 어차피 시체라는 이유로 좀비에 대한 잔인함은 정당화된다. 말썽을 일으키는 좀비는 항변을 듣는 대신 죽여버리는 게 편하다. 썩은 냄새를 풍기며 시체를 먹는 그들은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혐오스럽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지만, 회사나 공장에서는 월급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말단 노동자다. 기업은 하찮고 더럽고 힘든 일을 좀비에게 떠넘긴다. 돈도 보험도 필요 없는 좀비를 쓰니 GDP가 올라가고 수출이 잘 되며 흑자가 나온다. 군이 차라리 그들을 몰살해버리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하층민보다 한 단계 더 편하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최하층민이다.
 좀비에게서 인간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을 끌어안아 버린다. 남자친구의 따뜻함을 기억하는 승연은 비록 좀비라도 그를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른 좀비들에 대한 처사에 분노하고, 좀비에게 공감할 수 있다. 밥, 한 마디를 꺼내기 무섭게 구타하고 총을 쏘는 행위가 온당한가? 좀비도 사람이었고, 인격체인데?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와 의문은 관계의 역전을 이끌어낸다. 독자가 공감하는 대상이 인간에서 좀비로 옮겨가는 것이다. 승연은 생각한다. 인간이 좀비보다 나을 게 뭐야?
 좀비 노동자에 대한 대우는 한국의 현실과 맞물려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 저자는 좀비를 이용하여 사회의 부당함을 고소한다. 승연이 좀비와 인간의 접점이 되는 이유는 그녀가 편견과 거부감을 뛰어넘어 좀비를 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좀비는 괴물이 아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승연의 애정과 공감이 새로운 세상의 기원이 된다.

 Nessun sapra
 여기에는 좀비가 등장하지 않지만, 시체를 먹는 내용이 있어 함께 엮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끌어와 이야기를 사실처럼 만든다. 이에 더해 가상의 작가가 집필한 글이며 저자는 번역자일 뿐이라는 형식을 취해 현실성을 배가시킨다. 이야기의 시작은 위대한 소련의 조국수호전쟁이 끝난 지 6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회의다. 매 10년마다 특집을 제작했더니 쓸만한 소재가 남아 있질 않다. 포위전 때 정신병동에 있던 간호사가 환자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간호사가 뜯어먹은 시체가 모든 세대가 사랑하는 대문호 이바쵸프라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체제에 찬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선고 받은 이후 그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바쵸프의 일대기는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다. 글 중간중간의 역사적 배경과 역주(저자 주)는 그런 느낌을 강화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체제와 성격, 이어지는 전쟁과 전투, 정치범을 수감하는 감옥 같은 정신병동, 모두 사실일 것이다. 포위전으로 인한 극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광기가 탄생할 무대를 공들여 형성한다. 시체를 뜯어먹는 행위를 자연히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앞서 {종의 기원}은 좀비를 사회적인 의미로 활용한다. {Nessun sapra}에서는 간호사와 이바쵸프라는 개인에만 집중한다. 소련 체제의 불합리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둘의 광기 어린 관계를 강조하는 배경일 뿐이다. “치정극에 능한” 작가답게, 저자는 한눈 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남녀 두 명의 관계만을 파고들어간다. 그렇기에 “Nessun sapra”의 의미가 풀리는 결말에 모든 것이 결집될 수 있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거리에는 좀비 떼가 배회하고, 다른 사람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전기나 수도 같은 시설은 그대로 작동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가난이 정윤을 살렸다. 인구 적은 소도시라 좀비 발생률이 적었고, 옥탑방이라 좀비가 들어오지 않았다. 식량으로는 추석 선물세트로 산 참치캔 세트가 남아있다.
 사실, 거리의 좀비들은 전혀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다. 양궁선수인 주인공은 활로 하루에 하나씩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좀비를 쏘아 죽인다. 정식 화살은 아껴야 하니, 잡스러운 좀비들에겐 옷걸이로 급조한 철사 화살을 쓴다. 싫어했던 사람보다 좋아했던 사람일수록 죽이고 싶다. 변해 버린 모습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정해진 시간마다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남자친구 좀비다. 집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들보다 더 밀접한 위협이다. 가장 마음을 열었던 상대가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 아이러니다.
 여기에는 좀비의 공포보다는 위험에 처했을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좀비는 극한상황을 만들기 위한 배경이다. 가난해서 살아남기 유리했다. 사랑했던 남자친구가 가장 무섭다. 양궁도 꼭 좋아서 택한 게 아니었다. 정윤의 바람이 시체로 발견된다면 완벽한 컬을 한 상태이기를, 그래서 “헤어스타일이 완벽했던 양궁 선수라고 기억해주길”인 것도 그렇다. 그녀가 살아남아 이를 회고한다면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웃음도 나오다 만다. 웃기는 일이지만 웃기지 않다. 심지어, 그녀가 몸이 약해 일찍 죽었으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강하기 때문에 힘들다. 삶을 지탱하는 건 그녀의 의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연금, 그녀는 언제 열릴지 모를 양궁 경기를 생각하며 버틴다. 웃기게도, 세상이 이미 망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사람은 앞으로 먹고 살 길을 걱정한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외부 요인은 끝까지 정윤을 허탈하게 만든다. 아니면 정윤은 기뻐했는데 읽는 나만 허탈했는지도. 만약 하늘에서 떨어진 게 참치캔이기라도 했다면 더 그랬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직 모르는 일로 남았다.


시간

 시간은 상대적이다. 우주의 시간은 광속으로 흘러가지만 땅 위에서는 인생의 속도로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달려가기까지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시간은 한철이면 지고 마는 꽃처럼 짧고 귀하다. 시간을 거리로 환산한다면, 서로 다른 시간을 걷는 존재들의 거리가 0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

 가을바람
 우주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에 돌아간 후 느낄 시간차는 성큼성큼 커진다. 우주 근무에 베테랑이 될수록, 땅과 사람들과 인연들과는 훌쩍 멀어지는 셈이다. 주인공은 감사팀에서도 우주 근무를 여러 차례 마친 뛰어난 조사관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이는 없다. 물 없이도 반 년은 버틴다는 선인장을 길러봤지만, 근무를 끝내고 돌아와보니 이미 말라 죽어 있었다. 그녀는 자연과는 다른 시간을 걷는 이다.
그녀와 후배 윤별의 임무는 나달의 생산량 감소를 조사하는 것이다. 나달은 식용작물을 생산하는 식량행성이다. 기후조건을 충족하면서 신선한 식자재를 바로 내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식량행성은 거의 없기에, 나달은 귀한 존재다. 그런 나달의 생산량이 갑자기 감소하기 시작했다. 조사해 본 나달의 기록은 정상이었다. 기록상 모든 것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우주에 나가는 이들은 늙지 않는다. 인공위성이 기후를 완벽히 통제하는 한 나달은 식량을 최대로 생산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는 불필요하다. 자연의 흐름, 시간의 순환은 책 속에나 있는 것이다. 완벽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들보다 오래 산다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은 누군가가 기다려 주길, 그리고 기억해 주길, 혹은 함께 살아가기를 바랄까. 그 부분은 완벽한 시스템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이다.
우주에 나간 인간은 혼자다. 영원 같은 오랜 시간을 살아도 다른 사람들 속에는 살지 않는다. 반면 나달에 남아 있던 그는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또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아이를 낳았다. 나달의 시스템은 노화하고 있었다. 시간을 몸으로 맞은 결과 시스템은 생산량 감소와 불확실하게 변동하는 계절을 낳았다. 그것이 나달의 가을이었다. 윤별은 시스템 고장이라고 말하고, 나달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노화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옳다고 결정하기는 어렵다. 나달의 하늘과 기후는 인공물이지만, 나달에서 자라는 피망, 고구마, 옥수수 등은 사람이 일궈낸 것과 마찬가지다.
목덜미에 와 닿는 가을바람은 새삼스럽다. 우주에 나온 사람들은 바람이 없는 곳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별을 그리워하듯, 하늘의 사람도 땅을 그리워하게 되는 모양이다. 공기가 흘러야 바람이 생기듯 시간이 흘러야 기억이 쌓인다. 만남이 내재하는 이별, 시간이 불러오는 노화, 두렵지만 기쁜 일이다.

 동백
 동백꽃이 질 때는 꽃송이째로 툭 떨어진다 하여 동백은 애절한 마음을 상징했다. 겨울이 끝날 무렵 피어 송이째 떨어지는 빨간 꽃은 피처럼 붉다. 철이 아닌 한겨울에 핀 동백이 툭 떨어지는 것은 더욱 이르다. 기나긴 세월을 사는 용에게 백 년도 못 채우는 인간의 삶은 꽃과도 같다. 계절을 잊고 피었다 금세 떨어져 버리는 동백처럼 짧은 것이다.
주인공 혜령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 오래 못 살 거란 말을 들어왔다. 쭉 약을 지어 준 약사 조씨 아저씨가 그나마 목숨을 붙들어 준 사람이다. 그리고 용이다. 오래전부터 약방을 해왔다는 사람이 청포를 벗으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련님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심하면서 용케도 혜령은 몇 번이고 구해 준다. 그렇게 약방 조씨 아저씨가 약사님, 도련님이 된다.
아름다운 문체를 만들어 내려고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하얀 눈과 피, 그리고 피에 이어지는 붉은 동백의 이미지가 뚜렷하다.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병약한 혜령은 죽음의 징조 앞에 오히려 죽은 다음을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용과 혜령의 대화는 매우 낭만적이다. 용이 심어 주는 삶은 달고도 단 여지의 맛이다.
아름다운 꽃도 열흘이면 허무하게 진다 하여 만들어진 말이 화무십일홍이다. 다만 피어난 열흘 동안은 찬연히 아름다운 게 꽃이다. 허무하게 지고 나서도 다음 해면 다시금 잔뜩 피는 것이 또 꽃이다. 용의 시간에 대면 짧고 짧지만, 대를 이어 다시 태어나리라 생각하면 인간의 시간도 아쉽지 않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시간 동안은 열심히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시간, 그놈의 시간이 문제다. 백두산이 폭발했다. 주인공은 학회 출장으로 미국에 있고, 결혼식은 다음 토요일이다. 도저히 맞출 수 없다. 온 하늘에 퍼진 화산재 때문에 비행기가 안 간단다. 결혼 한번 한다는 게 뭐가 그리 힘든지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길이 없다. 그래서 뒤집는다. 지구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태평양을 경유한다. 이 길이 막혔다면, 반대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터키, 몽골, 중국, 그리고 북한을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 몇 번 갈아타 본 사람이면 안다, 그게 얼마나 성가시고 피곤하고 시간 잡아먹는 일인지. 하물며 세계의 반을 돌아돌아 갈아타고 가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환승 시간은 들쑥날쑥이고 갈아타는 곳은 엉뚱한 곳이다. 비행기도 열차도 이쪽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보는 이마저 발을 동동 구르며 아, 쫌! 하고 외치게 될 정도다. 주인공은 장애물에 맞닥뜨릴 때마다 카드를 한도까지 그어대며 절박하게 기원한다. 결혼 좀 하자고. 그녀가 보고 싶다고. 개인적으로도 만원 지하철에서 두 번 환승하며 읽으니까 같이 지쳐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영화로 만든다면 로드무비가 될 것이다. 그녀를 향해 절실하게 달려가는 과정 내내 지나온 역경을 다시 떠올린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그를 사랑해서 결혼하겠다는 건데 어째 쉽지가 않다. 그녀의 부모는 방글라데시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으름장을 놓는다. 동료들, 친구들은 걱정한다고 한마디씩 한다. 힘든데 억지로 결혼하는 건 순리가 아니라 고생한다는데. 처음엔 안 보이던 것들이 차차 쌓여 나중에 후회한다는데. 자꾸 그런 말만 들으니,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안 힘들 수 있을까 불안해지는 것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 식상하고 오래된 농담들도 사람 심란하게 만든다. 결혼해봤자 별거 없다는 소리,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말들이다. 그녀에게 가는 길은 그 모든 불안을 밟고 달리는 길이다. 전심전력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결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몸소 보여준다. 그가 특별해 보인다면, 그만큼 초점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가깝고, 절실하다. 저자는 인물의 생활로 파고들어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살려 낸다. {가을바람}과 {동백}은 멀고 먼 시간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일분 일초가 애가 탄다. 길이도 가장 길다. 남의 결혼은 누구나 한번쯤 하는 거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결혼 준비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 장래를 기약한다는 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란 대기권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 점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 점과 점이 만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행운이고, 그 정도 행운이 있다면 고난과 역경도 도전해 볼 만하다. 행운을 빈다.


죽음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삶이다. 타로카드의 ‘죽음’은 끝과 재시작을 암시한다.

 다르마의 잔상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다분히 불교적/힌두교적 세계관을 암시한다. 야차, 미륵, 다르마 등이다. 다르마 디자이너는 감정을 수집하여 이를 재현하는 다르마를 만들어 낸다. 채집기를 통해 뇌의 변화과정을 기록하고 수치로 변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르마를 입음으로써 타인의 인생을 산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거듭하다 열반에 이르면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다르마 입기를 거듭한다는 것은 곧 윤회를 여러 번 거듭하는 것과 유사하다.
 다르마는 아바타와 다르다. 원래 의미의 아바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신이며, 신들은 아바타를 벗으면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 아바타 플레이어는 자신이 조종하는 것이 아바타라는 것을 안다. 다르마 플레이어는 자신과 다르마를 구분할 수 없다. 다르마에 깊이 몰입했던 사람은 이를 벗고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해 고생한다. 다르마를 체험하고 난 후의 플레이어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르마 플레이어들은 이런 체험에 환희하지만, 처음으로 다르마를 만들어 낸 아바디는 가짜 체험일 뿐이라고, 살아있다면 진짜 체험을 하라고 말한다.
 아바디는 죽을 때까지 다르마 디자인을 금지당했다. 야차 길드는 길드전을 대비해 아바디의 다르마를 주문한다. 그는 살인의 감정을 담은 다르마를 갖고 있다. 바로 그가 살인하는 중에 채집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연인을 죽인 자를 죽였다. 야차 길드는 최강의 전사를 만들기 위해, 더 솔직히는 실제 살인하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아바디에게 디자인을 부탁한 것이다. 비록 그는 “살인하고 싶다”는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다르마를 만들어 주지만 말이다.
 다르마의 원래 의미는 살면서 따라야 할 법도, 정의를 구현하는 길에 가깝다. 다만 이 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카르마(업)에 의해 살인할 처지에 놓여도, 다르마에 충실하게 행동한다면 악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다르마를 따르며 살고 다르마에 융합될 때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아바디가 복수를 완성한 후 열반에 이르는 것은 다르마에 완전히 융합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이 가능하다. 그가 단순히 복수를 끝내 한을 풀었기 때문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가짜 인생에게 주어지는 가짜 열반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다르마 플레이어라면 진정한 영혼의 열반이라고 할 것이다. 디자이너로서의 아바디는 다르마는 가짜라고 했지만, 이미 그는 다르마와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티레시아스
 맨 처음 수록작이었다. 중단편선 [그림자 용]의 첫인상이었다. 끈적하고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왕궁의 그늘에는 암중모략이 있다. 힘을 가진 이는 판에 올라갈 수 있다. 그들은 카드를 한 장씩 뒤집듯 원하는 바를 밝히며 거래를 한다. 거래에는 항상 권력과 욕망이 따른다.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더욱 질척하게 얽혀 든다. 이기고 싶다면 뒤로도 손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얕보이지 않도록 강한 척 나가고, 상대는 파악하되 자신은 숨겨야 한다. 치밀하게 짜일수록 몸이 달아오르는 종류의 이야기다. 그런 암투가 매끄럽게 전개된다.
 흑진주라는 별명이 붙은 왕의 창녀, 귀족들은 그녀를 업신여기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녀는 왕을 자신의 말로 움직일 수 있다. 그녀가 판에 끼어든다면 큰 변수가 되겠지만, 그녀는 현명하기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회를 노린다. 대귀족 디에고는 그녀를 이용하고자 한다. 왕정을 뒤집으려는 폭도 무리의 세력이 커지면서 성가시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 혁명으로 이웃 나라들의 왕정이 몰락한 후 왕국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면 덤으로 흑진주의 몸을 얻을 것이다. 흑진주가 원하는 것은 복수다. 복수할 대상은 디에고에 맞먹는 새로운 귀족이다. 그렇게 둘의 이해관계는 맞았지만, 누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음모는 그 주인까지 집어삼킨다. 패배의 대가는 죽음이다. 끝까지 패를 숨기는 자가 살아남는다.
 저자가 끝까지 숨겨왔던 패는 결말에서 드러난다. 이는 작품 전체에 깔린 비틀림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다만 판을 끝낸 상태에서 밝혀진 패는 의미가 없다. 이미 승부가 끝났기 때문이다. 다음의 판이 있다 해도 그건 다음의 일이다. 단편은 단편으로 끝이다. 패를 두고 앞의 궤적과는 대조할 수 있지만 뒤를 상상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충격적이었던 데 비해 여운은 없었다. 장편이 될 수 있다면 흥미진진하게 기대하겠다.

 마지막 겨울
 우주선은 죽어가고 있다. 우주도 죽어가고 있다. 우주의 탄생이 팽창하는 빅뱅이었다면, 우주의 죽음은 수축이다. 우주의 밀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온도는 올라간다. 태양은 백색왜성이 되었다. 별들은 하얀 무리로 보인다.
 우주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주선은 구명정을 하나 구조한다. 그렇게, 아마도 오래전에 만들어진 로봇일 그녀, 모모가 들어온다. 우주선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죽음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우주선은 별일지도 모른다. 생명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아무도 없는 이유는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별이 사람을 찾으러 가면 된다. 기껏 발견한 사람의 흔적은 1만 2000광년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모모가 만들어졌을 때는 우주가 한없이 팽창할 때라, 간격이 점점 넓어지기만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멀어지기만 해서 붙잡을 손도 없이 외롭게 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정작 죽음은 모두가 모여드는 과정이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거대한 질량의 우주선은 별들을 끌어들였다. 끝까지 불타고 새하얀 잿덩어리가 된 별들이 눈처럼 엉켜 들었다. 반짝반짝 신호를 보내며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던 별도 함께 날아들었다. 마침내 “빛이 있으라”고 말했던 컴퓨터처럼, 우주선은 우주를 낳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관조하는 감정이 장점이다. 새하얀 우유, 커피에 우유가 섞여 드는 카페오레, 새하얀 별의 깜박임, 그리고 눈처럼 쏟아지는 잿더미 별들이라는 장면 연출이 시각적으로 연결고리를 만든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우주의 죽음이 어떻게 재창조로 이어지는지, 모모가 말하는 차가움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아니면 최소한 차가움이 어디에 남아 있었는지라도. 하얗게 타는 별은 눈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 차갑지는 않다. 우주의 죽음에 대한 천문학적 설명이 붙어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주선과 온도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랬다면 죽음 안에 더욱 편안하게 잠길 수 있었을 것이다.



 꼭 음성으로 발하는 말이 아니어도 된다,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소통수단은 음성으로 전하는 말이다.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말을 한다고 닿는다는 법은 없다. 말을 나눌수록 삐걱거리는 관계도 있다. 말의 의도는 종종 어긋난다. 우리는 불완전한 수단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우리는 말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렇기에 말은 때로 발화자도 몰랐던 놀라운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일상
 그는 매일 다른 방법으로 죽는다. 약 한 통을 먹기도 하고, 목을 매기도 한다. 익사, 추락사, 소사, 다 해본 일이다. 그는 매일 의식처럼 죽음을 고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그는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현재는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며 생활한다. 아사하지 않도록 안정된 생활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 대하는 일은 영 못하지만, 싹싹하고 눈치 빨라 곧잘 사람을 챙기곤 하는 여자 매니저를 고용한 후 걱정은 없어졌다.
 죽지도 못한 채 매일 다시 죽는 주인공의 삶은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을 연상시킨다. 이 네덜란드인 선장은 죽지 못한 채 영원히 바다를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저주를 받았다. 육지에 상륙할 수 있는 때는 7년에 한번뿐이다. 저주가 풀리려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이 저주의 잔인한 점은, 그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붙잡아야만 한다. 그는 육지로 올라갈 때마다 불확실한 희망에 시달려야 한다.
 자살은 가장 강렬한 호소다. 자살의 서술은 방백이다. 그는 버릇처럼 자살을 고르며 미칠 것 같은 삶의 답을 찾고자 한다. 그는 타인에게는 말 한번 못 꺼내는 사람이지만 자기자신은 매일 죽일 수 있다. 죽을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죽는다. 말을 하는 대신 속으로 삼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뭔가 호소하고 싶은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본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은 말을 하고 싶은 건지조차 모른다.
 매 죽음은 죽을 만큼 아프지만, 매일 죽다 보니 그것도 일상이다. 무기력하다.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는 있었다. 그를 이해해줄지도 모르는 사람, 매일 밤 자살 대신 다른 걸 택할 수 있도록 해줄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보드게임 카페의 여자 매니저다. 이는 가능성이었을 뿐, 자기를 죽이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익숙한 무력감에 물든다.
 다만, 여자 매니저라는 타인과 교류했던 경험이 아무 소용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하지 못한 말은 도돌이표처럼 남아 끈질기게 몇 번이고 기억을 상기시킨다. 할 수 있었던 말, 잡을 수 있었던 손, 나눌 수 있었던 시간, 그런 것들은 더욱 오래 남는다. 과거도 출신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도 그 미망은 강렬하게 남은 것이 틀림없다. 술은 망각의 도구이지 죽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각하고 싶은 것은 후회와 자기혐오다. 후회는 더 나은 과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기혐오는 실패한 소원의 잔재다. 그는 술을 마신 그 날만은, 매일 습관처럼 자살을 고르는 대신 그녀가 있었던 삶의 흔적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타인과 나누는 생활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웃음의 농도
 콜센터에서는 고객의 질문을 종류별로 나누고, 각 경우에 해야 할 말을 정해놓는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억지로라도 웃으며 말해야 한다. 억울해도 따지면 안 된다. 콜센터 직원들은 모든 짜증과 욕과 희롱을 웃는 목소리로 참고 넘겨야 한다. 자기 책임이 아닌 일에 죄송하다고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 그 감정 노동이 월급과 일자리의 대가다.
 진심과 말이 어긋나는 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지는 콜센터에서 고생하는 걸 알아주지 않는 엄마에게, 쉰이 넘은 엄마에게 무심하게 심부름을 시키는 오빠에게 소리를 지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러면서도 집에서 고생하는 엄마를 모른 척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화를 누르지도 못해 괜히 더 짜증을 부린다. 엄마는 상처를 싸움으로 말한다. 웃는 목소리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에나 짜낼 수 있다. 오빠나 동생처럼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릴 수 있으면 훨씬 편해질지도 모른다.
 회사의 인간관계도 사람을 감정적으로 몰아 댄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친구 수경은 비밀로 사내 연애를 하다 헤어졌는데, 아직도 멍하니 눈물이 흐를 만큼 힘들다. 팀장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가면을 쓴다. 수리 기사는 자기 잘못을 콜센터 직원에게 떠넘긴다. 타인의 스트레스 따위는 모른 체 이득을 챙기는 게 살아남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회사든 집이든 대부분의 말은 거짓이거나 공격이다. 아무 말 못하는 상황에서는 웃음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망망대해에서 간신히 잡은 나뭇조각처럼.
 회사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획기적인 심리 경영 세미나에서는 메쿠펜이라는 약물을 내놓는다. 이 약을 먹으면 약효가 지속되는 8시간 동안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을 두들기는 언어 폭력에도 모범적인 콜센터 직원으로 웃을 수 있다. 지칠 만큼 지친 사람들은 차라리 약을 먹는다. 그들은 서로가 만들어내는 말의 수렁에서 헤어나올 방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일수록 쏟아지는 말들이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연지는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고 마비되기를 택한다. 도망갈 수 없음은 예정되어 있다. 약은 마취제이지 치료제가 아니다. 뒷일은 모른 채, 더 굴러 떨어질 뿐이다.

 성문 너머 코끼리
 코끼리를 돌봐주고 있는 여자아이의 혼잣말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언자의 예언과 똑같이 회색의 기사를 탄 구세주, 당신이 하늘에 나타났죠. 그는 다른 시대에서 온 이상한 사람이다. 낡은 옷을 입고 꽃을 파는 여자아이를 보고는 왜 아무도 옷을 주지 않는 거냐고, 땅을 빼앗기고 항의하는 사람을 보고는 땅도 빼앗길 수 있는 거냐고 질문한다. 여왕과 여왕의 아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소녀는 대답할 수 있다. 성벽 안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풍요롭게 살지만 밖의 사람들은 다르다고, 자신이 사는 성 밖은 살기 힘들어서 죽어나가는 곳이라고.
 구세주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몰려 화형당했다. 죽지는 않았다. 화형대에 처해져 타오르기 직전에 간신히 하늘로 돌아갔다. 소녀에겐 그가 떨어뜨리고 간 송신기와 회색의 기사가 남았다. 그녀보다 많은 몸무게의 풀을 먹어 치우는 코끼리다. 매일 풀을 베고 코끼리를 돌보며 여자아이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가끔 책망도 한다. 왜 송신기만 두고 갔느냐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그보다는 더 자주, 마치 항의하듯 다짐을 한다. 녀석에게 설탕을 먹이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는 코끼리가 몸집은 크지만 설탕을 먹이면 얌전해질 거라고, 달지만 영양이 안 돼 힘을 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원래는 맹수도 건드리지 못하는 녀석이지만, 우리에 가둬 두려면 설탕을 먹이는 게 편하다.
 성 밖에서는 차츰, 한 단계씩, 반란이 준비된다. 마을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고 항의하다 죽은 사람의 집으로, 그의 딸이 연설을 하며 힘을 심어주는 집으로 모여든다. 소녀는 여전히 성에서 일한다. 마을에서 그녀는 방관자다. 여왕의 아들은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고, 그녀를 끌어안고, 달콤한 먹을거리를 가져다 준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 걸지 않는다. 여왕의 아들은 말만 앞설 뿐 믿을 만한 이가 아니다. 사람들이 거칠어질수록 소녀는 더 고집스럽게 다짐한다, 녀석에게 설탕을 먹이지 않겠다고.
 소녀는 말이 가 닿지 않을 것에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리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강하다. 송신기에 전해 보내는 말은 그녀의 풀이었고 강함이었다. 다른 세계, 다른 가치관이 남기고 간 물적 증거에 반복하여 되뇌인다. 설탕을 먹지 않겠다고. 대답이 돌아왔다면 오히려 약해졌을 것이다. 의지할 구석이 있으면 약해지기 마련이므로. 그녀의 말은 혼잣말이었기에 온전히 그녀에게로 돌아온다. {웃음의 농도}의 말은 서로를 상처 입히지만, 소녀의 말은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벽을 무너뜨린 다음엔 송신기를 털어버릴 수 있다. 진짜 초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소녀는 구세주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
 풀과 설탕, 성 안과 밖, 혁명과 안주의 대비는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 안에 있는 기계장치들과 시스템의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다. 성 안 사람들이 쓰는 무자비한 술책들도, 안/밖 대비를 심화시키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회성으로 끝난다. 소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성 안의 모습들은 모호하게만 드러난다. 1인칭 화자가 구어체로 이어가는 이야기라 더 두드러진다. 다만 코끼리를 타고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매우 힘차고 아름다웠다.


환상

 환상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환상이 야기하는 두근거림을 온전히 즐기려면 말이다. 낯선 단어의 울림, 세상에 없는 세계의 모습, 법칙을 무시하는 마법, 환상은 그런 곳에 있다. 물론 더 가까이에도 얼마든지 숨어 있지만, 그렇다고 먼 곳에서 오는 환상을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Recipe: 사랑의 묘약
 신화와 민담을 적절히 섞은 재치 있는 단편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는 악당일 수도, 귀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둘 다도 가능하다. 마녀에게 사랑의 묘약을 부탁하는 젊은이도 어디서 많이 보던 클리셰다. 다만 마녀가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따라 잔인함 등급이 달라진다. 이 마녀가 요구하는 담보는 무엇인가요? “여름 바람과 상쾌한 아침의 햇살, 그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마녀에게 전해주세요. 뭐, 많이는 필요 없고 손톱이 조금 길 시간, 머리카락이 자랄 만큼의 시간이면 충분해요.” 그렇다면 안심이다. 전 연령 관람가다.
 여기에 등장하는 마녀는 어지간히 수다스러운 마녀다. 마녀가 혼자서 재잘재잘 늘어놓는 이야기가 짧은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녀의 족보가 어떻고, 고지식한 성직자 얼간이들이 하는 말들은 헛소리고,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마녀인지 등등. 이야기 진행에서는 쓸데없는 곁가지다. 사랑의 묘약을 청한 손님 역시 모르는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꽤나 성가셨을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라 즐거운 것이다. 티란트라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위대한 마녀 투알란의 마력을 전수받았다는 것, 북풍의 노마법사 우리브엘과 은둔자 세알라하 두 아들을 두었다는 것, 마녀가 내온 허브차는 그믐날 달빛을 받은 이슬만으로 키운 허브로 끓였다는 것.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녀가 약을 만들어주길 기다리면 된다.
 사랑의 묘약을 마신 아가씨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는지 어쩐지는 상관이 없다.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림자 용
 낯선 은유와 고유명사가 너무 많아 소설을 읽어나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 은유와 고유명사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아름다움과 깊이를 부여한다. 고유명사에는 설명이 붙지 않고 이야기는 자세히 서술되지 않는다. 짧은 분량 안에 세계의 창조나 왕국의 멸망 등을 다룰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분명 전쟁이나 계급제도가 중심에 등장하지만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전면에 나오는 것은 가면을 쓴 광대들의 연극이다. 그들은 그림자이며, 가면(마야)이다. 이들이 펼치는 연극은 샤먼의 의식이나 무당의 신들림과 비슷하다. 연극이 설명을 대신한다. 저자는 말하는 대신 보여주기를 택한다. “광대의 양손에서 검은 비단꽃 뭉치가 별안간 만개하였으며, 그것을 신호로 여긴 라요라가 영원한 광영에 휩싸인 채 시간의 바다로 내려왔다. 여신이 스친 하늘의 일부에는 별들이 무수히 꽃피었으며, 바다의 yaus에는 도화가 꽃망울을 맺었다. 라요라는 구름을 걷고 천둥을 잠재운 후 해와 달의 궤도를 올바로 고정했다. 광대의 소맷자락 밖으로 온갖 빛깔의 꽃이 쏟아져 내렸다.” 이런 식이다.
 신화나 설화가 품은 환상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선택이다. 그 안에는 순순히 믿기 힘든 묘사와 애매모호함이 가득하다. 이야기에는 주석이 없고, 읽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에둘러 표현하는 이야기 안에서 숨은 역사를 추려내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읽으면 {그림자 용}은 라비요르라는 왕국이 멸망하고, 시안(겨울)이라는 이름의 군대가 쳐들어와 나라가 조각난 시대의 역사다. 혹은 선조들이 어떻게 어리석었으며, 이 세상에 어떻게 전쟁과 죽음이 찾아왔는지 전하는 노래다.
 신화를 읽는 데 얼마나 익숙하느냐에 따라 호오가 뚜렷이 갈릴 듯하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면서 상상할 즐거움을 던져준다. 여기서도 역시 이름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푹 빠질 수 있다면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환상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작품이다. 그러나 표현이 너무 어렴풋한 것도 사실이라, 단편으로만 가능할 형태이기도 하다.




 단편답게 마지막 반전을 노린 것들이 많았다. {티레시아스}, {Nessun sapra}, {마지막 겨울}, {웃음의 농도} 등이 그랬다. 오 헨리가 즐겨 쓴 것처럼, 작품 내내 이끌어온 이야기를 마지막 장면으로 뒤집으며 충격을 주는 방식이다. 그것이 공포스럽든 유쾌하든 말이다. 다만 결말이 마음에 오래 남으려면 이야기가 마지막 한 점에 모여야 할 텐데, 그 점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다. {사랑의 묘약}과 {그림자 용}은 이야기가 늘어놓는 곁가지들이 되려 흥미로운 경우였다. 유일하게 중편 분량인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이야기가 달려가는 과정에 빨려들기 때문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어떤 기준으로 수록 순서를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의 기원}과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떨어뜨려 배치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둘 다 좀비가 잔뜩 등장하는 소설이다 보니, 떨어뜨려 놓는 쪽이 순서대로 읽을 때 개성을 더 잘 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갑고 두툼하고 예쁜 책이다.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내 독해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그리고 매 페이지에 음성 출력용 바코드가 있어서 찍으면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QR코드와 착각했었는데, 이를 읽으려면 전용 리더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댓글 1
  • No Profile
    진아 12.02.22 22:51 댓글 수정 삭제
    거울 공동 단편선 리뷰에 댓글 달기는 어쩐지 조금... 많이 ^^; 쑥스러워요. ^^;;
    공동 단편선 리뷰를 쓰는 새로운 방식인 것 같아요. 제 글에 대한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 ^^
분류 제목 날짜
이달의 거울 픽 107호 토막소개 2012.04.27
소설 모털 엔진2 2012.04.27
비소설 텍스툰 9호3 2012.03.31
비소설 녹스앤룩스 Vol.1 : 빛과 어둠, 준비 땅!2 2012.03.30
비소설 녹스앤룩스 Vol.1 : 녹스앤룩스 1호를 읽고 나서1 2012.03.30
이달의 거울 픽 106호 토막소개 2012.03.30
소설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 보르헤스의 선배님 2012.03.30
소설 워치 시리즈: 내 책장에서 살아남은 환상문학 시리즈2 2012.02.24
비소설 B평 -2011 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1 2012.02.24
이달의 거울 픽 105호 토막소개4 2012.02.24
소설 페가나의 신들 2012.01.27
이달의 거울 픽 104호 토막소개 2012.01.27
소설 그림자 용: 2011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1 2012.01.27
소설 매치드: 이야기 리뷰 - 매칭(matching)1 2012.01.27
소설 지우전1 2011.12.31
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2011.12.31
소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2011.12.31
소설 표제어 사이로 펼쳐지는 환상, 카자르 사전1 2011.12.31
이달의 거울 픽 103호 토막소개 2011.12.31
소설 환상 도서관 2011.12.30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