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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지우전

2011.12.31 01:0612.31


지우전

박애진, 페이퍼하우스, 2011년 6월



한별 (newshbx2@gmail.com)



'도(道)를 닦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도를 닦는 목적은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함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 건강한 자기 인식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굳건한 기준점이 된다. 꾸준히 갱신한다면 믿을 수 있는 지지대가 되기도 하고. 도를 닦는다는 건 자기수양을 하는 거고, 이는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삽질을 하다가도 문득 깨달을 수 있는 거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는 오히려 깨달을 수 없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한테 묻고 묻고 묻고 물어서 아련히 돌아오는 답을 듣는 것, 그것이 도를 닦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도를 닦는 사람들의 대표주자, 도사(道士)는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고 신중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농담 삼아 '도사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우전]에 나오는 주요 인물, 지우와 연아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본이 없고 뚜렷한 의식 없는 상태를 일컬어 '천박하다'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만홍과 청운 등의 도사는 충분히 천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도술을 부리고 도사로서 행세하기에 충분한 업적은 있지만, 자기수양은 부족하다. ‘도술’이라는 어떤 기술을 전문으로 익힌 기술자라고 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근원 같은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도 좋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솔한 태도로 그 고민을 대하는 연아는 도사로서 수련을 받지 않고도 도사 이상의 능력을 보인다. 과감히 말하겠는데,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런 면에서는 연아 또한 한 명의 훌륭한 도사다.

칼이자 바람이고 또한 사람인 지우 역시 훌륭한 도사다. 도사답지 못한 도사들이 '저 자는 도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지우가 꽤 훌륭한 도사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도사의 상을 떠올려 보면 지우를 보고 도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인물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요한 건 태도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말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비극적인 지우의 과거는 지우를 끝까지 몰아세웠다. 물을 억지로 한 곳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 다른 곳으로 터져 나오기 십상, 지우의 비극적인 과거는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계속되는 자기인식의 끝에서, 지우는 도사가 된다. 그런 지우에게 백치미가 빛나는 스승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짝이 아닐까.

모두 입을 모아 그를 보고 칼이라 했지만 그는 칼이 아니라 마른 땅을 적시는 비가 되었다. 비를 갈망하고 기다리고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울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단비가. 싹을 틔운 다음에는 단비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또 자기 나름대로 도를 닦을 수 있게 해주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이지 싶다.
나의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구원 자체가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no라고 답하겠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상은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관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음, 마지막에 와서 이야기가 이상해진 것 같다. 나도 아직 수련을 덜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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