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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고마츠 사쿄, 이동진 옮김, 폴라북스, 2012년 11월


날개 (revinchu@empal.com http://twinpix.egloos.com)



  [일본 침몰]의 작가로 유명한 코마츠 사쿄의 장편소설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가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코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와 츠즈이 야쓰타카와 함께 일본 3대 SF작가로 불린다. 이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상당한데, 1997년 SF매거진 500호 기념 특집 일본 올타임 베스트에 꼽혔고, 2001년 일본 SF작가 클럽 선정 일본 SF작품 1위로도 뽑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장편 SF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치면 필연적으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일본에서 여러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이 1966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13년인 지금의 눈으로는 아무래도 낡거나 유치한 면들이나 흔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없지 않다. 지금의 독자들까지 완벽하게 사로잡는 고전이라기에는 아쉬운 점 역시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놀라운 시간대와 초월을 거침없이 전개해나가는 그 이야기의 박력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공룡을 등장시키는 압도적인 장면에서 바위 틈새에 울리는 전화기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독자는 호기심을 자극받는다. 공룡과 휴대폰이라니? 이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장면은 장르소설의 매력이며, 이런 관습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수많은 시간 이동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또한, 이 장면이 나중에 다시 복기될 것임을 알고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시간이동 소설의 매력이라면 바로 이 시간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곳곳에 깔아둔 복선이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장에서는 중생대 지층에서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가 발견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0세기, 바로 책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시간대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처럼, '현실적 결말'은 짧게 끝이 난다.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를 발견한 사람들이 전부 실종되고,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 여자의 아련한 에필로그까지 읽다보면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숨겨진 내막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다.(또한, 이 에필로그가 두 번째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의 끝에는 이 에필로그에 앞선 첫 번째 에필로그가 마련되어 있다. 작가가 의도한 절묘한 배치는 소설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를 높이고 있다.)


  이제 3장부터는 '현실적 결말'이 아닌 모든 사건의 진상이 차례차례 드러난다. 이 간극은 독자에게 경이감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20세기 현대에서 한정되었던 2장과 달리 중생대, 25세기, 45세기 등 10억 년에 걸친 시공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확장 또는 초월이 이 소설의 근원이자 매력인데, 이를 위해서 불필요한 설명이나 감정적인 교류는 최대한 절제하고 오직 설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만 주력했다. 따라서 짧은 분량 안에서 놀라운 시간대를 다루는데, 이 서술시간과 서술되는 시간의 대비가 소설의 속도감과 스케일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스케일이며, 2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모든 내막이 밝혀지는 구조에서 오는 쾌감과 우주에 대한 장대한 물음이 독자의 뇌를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사유를 증진시킨다.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재미와 인류의 존재와 진화의 의미를 묻는 사유의 재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고, 앞에서 암시된 사건들이 설명되면서 구조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구조를 짜맞출 수록 한 번에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독자의 머리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기분좋은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구성을 완성시켰을 때 느낄 희열은 그 혼란을 느낀 것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장 '현실적 결말'로 보았을 때는 기다리는 한 여성의 시각에서 감동적인 한편의 미스터리한 단편소설이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장대한 시간을 넘나들며 초의식과 진화의 상관관계를 우주적 구조를 꿰뚫으면서 읽어나가는 과학소설이다. 과학소설은 인간의 호기심을 기초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재미를 줄만한 가설들을 자유롭게 제시한다. 이 소설은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곳곳에 도구를 숨겨놓았는데, 이를 따라가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작가가 유추해낸 우주의 본원을 응시하면서 압도된다. 독자의 우주관을 깨트리면서 작가의 우주관이 제시되고 자아와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우주에 대한 질문에서 그것을 초월한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나 이야기의 응집력이 떨어지며 급하게 결말까지 치닫는 느낌이 들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대한 시간과 설정을 짧은 분량 안에 속도감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보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경이와 일상과 비일상의 교차에서 오는 감동을 매력적으로 묶어냈고 구조적으로 장면 배치를 흐트러놓아서 전체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하는 재미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도 발생한 여러 미스터리를 이 소설 안에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재기있는 부분이었고, 자칫 이야기가 스케일에 묻혀서 무너질 수 있는 것을 구조적으로 잘 보완해서 결말에 계속 여운을 느낄 수 있게 장치한 점도 좋았던 작품이었다.(이런 장치가 없었다면 이 책은 소설이 되지 못하고 기성 작품의 설정을 빌려와 자기 발상을 표현해내는 패러디에 그쳤을 것이다. 결국 2차 계단, 20세기 일본의 무대 속 한 인물이, 이 책을 소설로 만드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 전개에만 집중하고 세부적인 묘사나 설정을 자세히 파고들지 않아 간결한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이야기 전개, 발상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느낌으로 몇 시간 만에 읽어내릴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흡인력이 있는 대신, 단번에 소설 전체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약간 버거운 느낌을 받았다. 막판에 갈수록 의식의 대화 밀도를 높이고 장면으로 처리했다면 더 근사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목에 맞게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뻗어나가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소재와 발상으로 적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시간이동이 나오고, 시간의 흐름, 우주의 끝을 소재로한 작품군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구입해서 만족스럽게 읽었다.(여러 SF 작가의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들도 재미있었다. [타임 패트롤]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나 설정 등) 정확하게 설명되거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 넣을 구석이 되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전체적으로 1960년대에 한 일본 작가가 SF를 읽고 쓰면서 당시 기발했던 발상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완성한 결과물을 이제서라도 2013년의 한국에서 체험할 수 있어서 즐거운 독서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작품이었을지, 그 당시 반응을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지금도 충분히 울림을 주는 감동적이고 아련한 정서의 에피소드나, 일상과의 간극이 클수록 경이롭고 뇌의 신선한 충격을 주는 듯한 시간선을 초월한 우주관, 초의식 너머의 초월, 초월의 초월을 거듭하는 끝없는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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