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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도둑맞은 편지

2012.10.19 23:3810.19

도둑맞은 편지
바벨의 도서관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상훈 옮김, 바다출판사, 2010년 12월


한별


 편집장 주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112호부터 보르헤스가 기획, 선정한 세계문학 선집 ‘바벨의 도서관’을 독자분들께 소개합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처럼, 세계문학의 레퍼런스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바벨의 도서관’ 수록 작품들은 장르 독자들에게도 의미가 클 것입니다.
 보르헤스가 고른 작품들 중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허버트 조지 웰스의 [마술 가게], 찰스 하워드 힌턴의 [평면 세계] 등 세 작품을 다시 골라, 한별님의 마치 단편소설 같은 리뷰로 소개하려 합니다. 소설 A를 읽기 전에 다른 소설 B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소설 B는 소설 A에게서 파생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보르헤스와 이 선집에 대한 헌정과도 같습니다. 세 달에 걸친 ‘바벨의 도서관’ 리뷰, 즐겁게 읽어주세요!




 눈을 뜨니 바닷가였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파도와 짙은 물감을 찍 짜서 대충 뭉개놓은 것처럼 새파란 하늘, 그리고 부스스한 노란색 모래사장으로부터 바다로 길게 몸을 내뻗고 있는 목제 부두. 끼욱거리는 갈매기는 당연하다는 듯 하늘을 날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피곤한 탓에 잠시 눈을 감고 뜬다는 게 이렇게 되어버렸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내 옷차림은 그대로였다. 파란색 땡땡이 잠옷. 깜빡한 사이에 놓쳤는지 읽고 있던 책만 사라졌다. 황당하다 못해 황망해서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이군."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부둣가에 어떤 노인은 있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노인은 희끗한 머리가 정수리까지 벗겨져 있었다. 노인은 이상하게 비틀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보다 왜 이곳에 왔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목소리에 깊은 울림이 묻어나는 것을 보아 웃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비틀린 얼굴도 웃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손바닥을 위로해서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여기는 어딥니까?"
 "책이지. 책 안이야. 바벨의 도서관의 일부이자, 도서관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는 곳이기도 하지.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흥미로운 곳에 있군. 조금 더 일찍 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노인의 입에서 낯익은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바벨의 도서관, 정장 차림의 노인, 일그러진 얼굴, 무한과 영원을 추구하는 남자. 혼란스러운 머리가 빠른 속도로 정리되었다.
 "어?"
 노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노인의 품에서 나온 보라색 표지의 책이 낯익었다.
 "맞네. 내가 바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자네가 읽은 이 책을 기획하고 해제한 남자이자 이 책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찾고자 했던 이일세."

 "아니, 보르헤스가 왜 내 앞에 있는 거야? 안 죽었나?"
 빠른 속도로 정리된 머리가 더 빠른 속도로 뒤흔들렸다. 속내가 바로 겉으로 나와 버릴 정도로.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은 아니지. 자네가 인식하고 있는 보르헤스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군.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보르헤스 본인의 극히 일부이자, 허구일 수도 있지. 이미지, 혹은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상이란 의미에서 아이돌이란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자네는 싫어하는 것 같군. 이것도 내가 자네의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이런 불편한 정장을 입고 바다에 올 정도로 멋없는 사람은 아닐세."
 노인은 고개를 들어 뾰족한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군. 장식품인 바다 아닌가. 자네, 상상력이 빈곤하군."
 "내 상상력이야 어쨌든, 여기가 어디인지 여전히 모르겠는데요. 바벨의 도서관은 뭐고 여긴 또 어디죠?"
 "이해하기가 힘들면 꿈속이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난 자네 꿈속에 등장한 환상이고. 그러는 편이 좋다면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것, 내가 자네의 의식을 이해하고 있는 것, 그리고 자네의 빈곤한 상상력까지 모두 설명되지 않겠나?"
 꿈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으면 자각몽이라고 하던데. 자각몽은 자각몽이라는 걸 깨달으면 꿈을 제어할 수 있지 않던가? 해봐야지. 저 괴팍한 노인이 사라진다, 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바다가 사라진다.
 눈을 뜨면 다시 한 번 시야가 확 변해있기를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안타깝게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노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아무리 그래도 나 대신 비키니 차림의 글래머 여자를 바란 건 너무하군."
 "아니, 전 그런 생각 한 전 없는데요?"
 노인은 대답하는 대신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 자기 머리 오른쪽을 톡톡 두드렸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내가 자네와 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젠장.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질 않아 손으로 얼굴을 쓸고 있으려니 노인이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된 이야기는 시작도 못 하고 끝나고 말겠군."
 노인은 놋쇠로 된 낡은 손잡이를 꺼냈다. 넝쿨 장식 문양이 음각된 묵직한 나무문에 달려 있으면 딱 맞을 것 같은 그런 손잡이다. 노인은 손잡이를 허공에 경쾌하게 휘둘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손아귀에서 놀던 손잡이가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당황하지도 않고, 노인은 손잡이를 밀었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더니 말 그대로 문처럼 열렸다. 노인의 키보다도 훌쩍 큰 허공의 문은 기름칠을 한 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여전히 손잡이를 잡은 채, 노인이 쇳소리가 섞인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언제까지 지면을 낭비하고 있을 셈인가? 어서 이리로 오게."
 여기 계속 버티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서 노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발밑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 위를 뛰듯이 걸어 노인이 잡고 있는 문을 지났다.
문을 지나 도달한 곳은 벽난로가 타고 있는 서재였다. 큼직한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 보릿빛 액체가 든 잔을 쥐고 있던 노인이 나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잘 어울리는군. 그 편이 보기에 낫네."
 무슨 소리를 하나 살펴보니 입고 있던 잠옷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매끈한 정장이 보였다. 슥슥 팔을 들어 살펴봐도 제대로 잘 갖춰 입고 있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 살펴보니 조끼에 든 회중시계에 연결된 시곗줄까지 보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자네가 이런 자리에는 그 옷차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서재 한 구석에 위치한 탁자에서 보릿빛 액체를 한 잔 가득 따라 내게 건넸다. 유리잔 속의 액체가 벽난로의 빛을 받아 번쩍였다.
 "방심할 수가 없네. 여긴 도대체 어디죠?"
 "서재지. 오늘 할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가 아닐까 싶네."
 노인이 보라색 표지의 책을 꺼내 의자 앞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에드거 앨런 포?"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포와 관련이 있으니까 말이야."
 "무슨 상관이에요 그게."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자네는 딴생각이 많으니 더 이상 다른 소리 못하게 내가 질문을 하겠네. 우선 자네가 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부터 확인해 볼까?"
노인의 말투에는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어쩔까 싶다가 다리가 S자 모양으로 굽은 의자가 보여 그 위에 앉았다. 노인의 그윽한 눈빛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촉촉이 적신 입술에서 향이 맴돌았다.
 보리차네, 젠장.
 "추리와 공포소설의 거장이고, 우울증이 있었다고 알고 있고. 고양이를 좋아했나? 유명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고. 그래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에드거 앨런 포가 없었으면 지금의 미국 문학은 없었을 거라고. 굉장히 고평가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이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정확하게는, 포가 없었다면 미국 문학은 최소한 지금과 굉장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거라고 했었네."
 "그래요, 그렇게 이야기했죠. 하지만 당신이 '바벨의 도서관'이란 이름까지 달아가면서 기획한 총서 시리즈의 첫 권으로 포를 고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 드디어 진심이 나왔군.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노인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트렸다. 보리차나 마시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지. 좋아, 꽤 돌아온 것 같지만 나쁘지는 않군. 그래, 결국 자네는 내가 작품을 선정한 기준이 납득이 안 된다는 거지?"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의미가 없겠단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한테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도 좀처럼 없다. 노인은 말없이 잔을 흔들었다.
 "그런 자네를 위해서 작품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그 전에, 잠깐. 당신은 분명 내 꿈 속의 인물인데 내가 모르는 걸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거죠?"
 노인은 내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좋은 질문이지만 통찰은 부족하군. 자네가 잠자는 사이에 뇌 속에서 소설을 소화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자문자답과 고찰은 굉장히 유용한 지적 유희지."


 도둑맞은 편지

 노인이 손을 들자 틈이라고는 없는 책장에서 한 남자가 솟아나듯 걸어 나왔다. 남자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방 중앙을 가로지르더니 안락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노인은 남자를 보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첫 번째 작품은 {도둑맞은 편지}지. 어땠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셜록 홈즈 같았어요."
 노인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끅끅거리기까지 한다.
 "너무 노골적이었나요."
 "아니, 자네에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군. 어떤 면에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해.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결론까지 다다르는 탐정, 생략된 중간 과정을 요구하는 주변 인물, 또 뭐가 있지? 그래, 세속적인 욕망이 부족하다는 점도 비슷하겠군."
 "맞아요, 그리고 제 취향에는 홈즈나 다른 탐정들이 더 잘 맞는 것 같은데요. {도둑맞은 편지}에 나오는 뒤팽은, 글쎄요. 쓸데없이 말이 너무 많죠. 계몽소설도 아니고. 재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홈즈는 누가 낳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홈즈 부인?"
 노인이 킬킬거리며 저 멀리서 손가락으로 나를 쿡 찔렀다.
 "위대한 탐정 셜록 홈즈는 1887년 [주홍색 연구]에서 처음 등장했네. 자네가 말이 많다고 평한 뒤팽 선생이 나오는 {도둑맞은 편지}는 1840년에서 45년 사이에 쓰인 글이지."
 "어, 홈즈가 뒤팽을 베낀, 아니, 오마주라는 건가요?"
 "자넨 생각이 너무 짧아서 걱정이네.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했다간 두들겨 맞기 딱 좋지 않겠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적 작용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포가 창안했고,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통해 추리소설이란 장르를 만들었단 걸세."
 "그러면 왜 {도둑맞은 편지}를 골랐어요?"
 "그가 원류니까. 그의 작품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면모에 가깝네. 하지만 포를 선택한 건 단순히 그가 추리소설의 원류이기 때문만은 아니지."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노인이 손뼉을 치자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짠내가 나는 유리병이 있었다. 노인은 병목을 잡고는 의자에 병을 슥슥 닦았다. 유리병 안에는 둘둘 말린 종이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자네가 말한 것처럼 포는 추리소설의 거장인 동시에 공포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네. 그런 점에서 {병 속에서 나온 수기}는 상당히 흥미롭지. 자네 이 글을 제대로 읽긴 읽었나?"
 "분명히 다 읽었습니다."
 "좋아, 의심하지는 않지. 대신 감상을 들어볼까?"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느끼는 당혹감이나 당황감 같은 것들이 잘 드러나지 않나요? 꽤 비현실적인데, 그런 사건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알 것도 같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잘 지적했네. 하지만 제대로 알고 말한 것 같지는 않군."
 "네?"
 "{도둑맞은 편지}와 비교해보게. 아까 자네도 동의하지 않았나, {도둑맞은 편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병 속에서 나온 수기}를 보고는 뭐라 그랬나, 비현실적이라 그러지 않았나?"
 "아, 맞아요, 그랬죠. 하지만 작가가 여러 작품을 쓰다 보면 다른 스타일의 글을 쓸 수도 있죠."
 노인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비틀면서 병마개를 땄다. 바짝 마른 종이가 병 밖으로 굴러 나왔다.
 "포가 뒤팽을 내세워 이성적인 추리소설을 쓴 건 그가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와 지성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일세. 단순히 쓰고 싶어서 썼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포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관이 잘 반영되어 있지. 반면 {병 속에서 나온 수기}는 어떤가? 현실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환상적이지. 나는 환각적이라고 표현했지만,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통하네."
 노인이 병에서 나온 종이에 손을 대자, 종이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순간 어질한 기분이 들어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다.


 밸더머 사례의 진상

 "저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이리로 와서 눕게."
 노인이 가리킨 곳에는 소파가 하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지만, 이제 와서 일일히 물어보는 것도 바보 같이 느껴져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소파는 차갑고, 건조하고, 버석버석했다.
 "그렇다면 포가 그런 글을 쓴 이유는 뭔데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면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자네 말대로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까지의 자신을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지. 자네가 그 점을 지적해줘서 내심 기쁘군. 하지만 실제로 {도둑맞은 편지}와 {병 속에서 나온 수기}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네. 이유가 뭘까? 나는 {밸더머 사례의 진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네."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아 눈을 감으니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자네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밸더머 사례의 진상}에 나오는 최면술은 상당히 체계적이네. 최소한 최면술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는 논리적이지. 그런 점에서 이 최면술은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지. 체계와 원리를 알 수 없는 마법은 아니니까. 하지만 밸더머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 불가능하다는 데 칩을 걸고 싶군. 밸더머에게 일어난 일은 마법적이고, 또 환상적이야. 재미있지 않나? 동거가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람이 한 집에 같이 산다니 말이야."
 "동거의 이야기라면 누군가 중재자가 있었겠죠. 두 사람을 묶을 수 있는 사람이."
 여기까지 노인의 흐음, 하는 콧소리가 들린다.
 "딱히 자네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자네가 조금 아픈 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몸이 아프면 정신이 건강해지는 타입인가?"
 소파 다리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름 위로라고 두드려준 모양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네의 지적은 옳아. 그럼 생각해 보지. 애당초 {밸더머 사례의 진상}의 화자는 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최면술을 걸고자 했던 것일까? 화자의 호기심은 크게 세 가지네. 임종의 순간에 처한 환자가 최면에 감응할 것인가, 만약 감응한다면 임사 상태는 환자의 감응력을 증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 그리고 최면 과정은 얼마나 오래 작용하며 얼마나 오래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최면술의 목적이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라고요?"
 "그보다는 죽음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네. 밸더머는 최면을 통해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은 상태가 되어버리지."
 "그리고 그 결과 자기가 죽었다고, 깨우든가 죽이든가 하라고 하죠."
지금의 나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우든가 깨우든가, 빨리 어서 한 쪽을 선택하라고요.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네. 화자는 죽음을 피하거나 미루고 싶어 하는 건 인류의 오랜 숙원일세. 하지만 화자가 찾은 건 죽음을 초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공포스러운 그 무엇일세.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이성적인 사고와 환상성을 동거시킨 중재자가 공포라는 말인가요?"
 "놀랍군! 나는 그걸 육체적 공포가 초자연적인 공포로 이어진다고 봤네. 공포와 마주친 이성적인 사고는 때때로 마비되고는 하지. 그 틈이 환상성이 비집고 들어오기 좋은 지점이라는 내 의견이 허황되게 들리지는 않길 바라네."


 군중 속의 사람

 "이번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두터운 커튼을 걷자 회색으로 물든 하늘과 그 밑에 펼쳐진 거리가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좌우로 두 갈래,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 마치 거리 전체가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뉜 것 같았다. 밖을 보니 어지럼증이 덜해져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군중 속의 사람}은 다소 독특한 작품일세. 사람들을 관찰하고, 한 노인을 추적할 뿐인 이야기니까. 자네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봤나?"
 "글쎄요. 화자가 추적하는 노인이 인물보다는 상징에 가깝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이쪽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자가 추적하는 노인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니지. 야심한 시간 주정뱅이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반색하며 달려가기도 할 정도니까 말이야."
 "그럼 그 노인은 일종의 고독과 관련된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독해지기 싫어하는, 말 그대로 군중 속의 인간 말이에요. 혼자 있기를 거부한다는 말도 어울리고."
 "화자는 그 노인을 보고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본질'이라고 평하지. 그와 더불어 그 노인은 군중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목격된다는 것도 흥미롭고 말이네."
 "그게 '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까부터 계속 놀라게 하는군. 다시 드러눕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네."
 무시하기로 하자.
 "당신은 이 글을 고독과 악에 대한 이야기라고 평했는데요, 그거 너무 대략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까 약 오르네."
 "생각해 보게. 그 노인은 분명 죄악의 한 모습일세. 그 스스로에게서는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는, 그저 군중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니라 군중의 일부, 주체가 될 수 없는 부분인 노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과장되지 않았네. 그 노인은 분명 군중의 일부지만, 일부분으로서 만족하지 못하지. 끊임없이 군중을 찾아다니고, 이것은 분명 의존적이지. 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모르는 게 나았다는 말일세. 군중에 속함으로서 오히려 더 고독해진다면, 그 노인은 군중을 모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군중 속의 사람}은 분명 고독과 악에 대한 이야기지."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닌데,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성적인 사고와 환상성, 그리고 공포 이야기 중 어디에 속하나요?"
 "그 노인의 태도를 보게. 군중에 집착하고 일희일비하는 태도는 광적인 공포의 또 다른 한 모습일세. 이성적인 태도가 결여되었을 때 나타나는 편집증적인 모습이지. {군중 속의 사람}은 또 다른 형태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글일세."
 노인은 커튼을 닫았다.


 함정과 진자

 노인은 유리잔을 들고 보리차를 들이켰다.
 "말이 길었군. 슬슬 힘이 달리네. 그래도 중간부터는 자네가 잘 따라와서 다행이었네."
 "딱히 뭐 한 건 없는데요."
 "후학양성은 중요해. 실제보다 과장된 칭찬은 사람을 혼란시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
 "못 들은 셈 치죠. 슬슬 마지막이죠? {함정과 진자}로 기억하는데."
 "좋아, 그럼 자네가 원하는 대로 마지막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노인이 손뼉을 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열리더니 천장에서 줄 끝에 매달린 언월도가 내려왔다. 언월도는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며 진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저거 밑으로 내려오는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말게. 이야기를 계속 하지."
 노인은 다시 한 번 보리차를 마셨다.
 "{함정과 진자}는 함정에 빠진 주인공이 위기를 해결하지만, 그 뒤에 더 큰 위기가 닥쳐오는 이야기지. 자네라면 스티븐 킹을 언급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앞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하게 만들진 말아주게. 혼란스러운 위기에 빠져도 화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하지 않네. 더 큰 위기가 닥쳐오고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져도 포기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내지."
 "산 넘어 산이 어떤 건지 잘 보여주죠."
 "포가 이 전까지의 글에서 공포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면, {함정과 진자}에서는 그 공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네. 화자가 보이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는 포가 말하고 싶은 이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네."
노인은 말을 마치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이 글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건 큰 의미가 없겠다 싶군. 마지막까지 지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어릴적 계단참에서 몇 번이나 다시 읽던 그 희열을 말로 설명할 자신은 없네."


 "포를 선택한 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과 같이 이성적인 사고가 공포와 잘 조합되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가지 요소는 이후 미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네. 미국 문학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많이 이야기했네만, 안타깝게도 자네의 머릿속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 같군. 교양을 쌓게 젊은이."
 "아, 잠깐만."
 마지막에 뭔가 억울한데.
 "포는 알겠어요. 그럼, 나머지 이십여 권의 작품은 어떻게 골랐는데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걸세. 우선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 같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 수단이 과격해도 참게."
 노인이 손뼉을 치자, 천장에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던 언월도에 묶인 끈이 뚝, 끊겼다. 그리고 운동하던 방향 그대로 날아가는데, 공교롭게도 그 방향이 내가 서 있는 방향이다.
 "참기에는 너무 과격한데요."
 두고 봅시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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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거울 픽 109호 토막소개 2012.06.29
소설 개의 힘 201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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