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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모털 엔진

2012.04.27 23:2904.27

모털 엔진

필립 리브, 김희정 옮김, 부키, 2010년 2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수천 년 후의 미래. 대량살상병기가 동원된 최종전쟁 이후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캐터필러로 이동하는 초대형 구조물 ‘견인 도시(Traction City)’를 만들고 그 속에 틀어박혀 일생을 보낸다. 에너지와 물자를 얻기 위해 큰 도시는 작은 도시를 잡아먹고 작은 도시는 더 작은 마을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 세월이 흐르고 환경도 안정을 되찾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도시의 망령에 사로잡혀 유랑생활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땅으로의 귀환을 주장하는 ‘반 견인 도시 연맹’도 등장하여, 긴장감 넘치는 일상이 이어진다. 유서 깊은 견인 도시 ‘런던’에 거주하는 역사학자 견습생 톰 내츠워디는 어느 날 흡수된 마을의 물품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영국 작가 필립 리브가 2001년에 발표한 장편 SF소설. 굳이 서브장르를 나누자면 뭔가의 이유로 거대한 파멸을 맞이한 인류가 황폐해진 세계를 무대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 해당하지만, 증기기관이나 비행선, 단파 무선통신 등 현재보다는 약간 퇴보한 기술을 사용하여 아날로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스팀펑크’의 요소도 동시에 갖고 있다. 본래 청소년용 소설로 집필되었고 실제로 그 분야와 관련된 ‘네슬레 스마티즈 어워드’의 2002년도 금상을 수상했지만,  제법 묵직한 테마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어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본래 삽화가 겸 동화 작가로 활동하던 저자는 본서의 성공 이후 전업 작가로 변신, 본서를 포함한 전 4권의 견인 도시 연대기를 집필하였으며 이후에도 장편이나 중편 형태로 같은 세계를 무대로 한 프리퀄[前史]을 계속 발표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 ‘견인 도시 연대기’ 4부작 원서 표지.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움직이는 도시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탄탄한 세계관의 묘사이다. 특히 주요 무대 중 한 곳인 런던의 내부구조가 상당히 정성스럽게 설명되는데, 구조물을 이루는 여러 개의 층이 그대로 거주민들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고 있어서, 최상층에서는 선택받은 엘리트들이 풍족하게 살고 반대로 가장 아래층에서는 하층 노동자와 죄수들이 거대한 엔진의 열기와 유독가스에 시달리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또한 주요 직업군도 4개의 길드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계장치의 유지보수와 옛 과학기술의 연구를 맡은 엔지니어와 고대 유물을 발굴하여 쓸 만한 것을 가려내는 역사학자의 두 길드가 스토리에 깊게 관여한다. 도시가 이동한다는 발상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 도시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시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 그 자체를 액션의 주체로 활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속도감을 높이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중반 이후에는 금단의 고대 병기를 재현하여 팽창주의적인 야망을 드러내는 권력자의 모습까지 그려냄으로써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역사학자 길드의 회장이자 런던 시장과도 친밀한 관계인 모험가 테데우스 밸런타인인데, 이 남자가 수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미지의 고대유물 ‘메두사’를 둘러싸고 모든 사건이 진행된다. 주인공 톰은 평소에 존경하던 테데우스가 헤스터 쇼라는 정체불명의 소녀에게 암살 위협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저지하지만 헤스터의 이름을 알게 된 탓에 런던에서 쫓겨나 무인지대를 방황하는 곤경에 처한다. 한편 밸런타인의 딸 캐서린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걱정이 된 나머지 은밀하게 뒷조사를 시작한다. 톰은 헤스터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면서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우정을 키워간다. 한편 캐서린 역시 사건을 목격한 엔지니어 견습생 포드와 아버지의 비밀을 추적하면서 그에게 보통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다.

 이야기는 런던 ‘밖’의 톰과 런던 ‘안’의 캐서린을 번갈아 보여주며 두 사람의 시점을 통해 메두사의 비밀과 그에 얽힌 권력자들의 음모를 밝혀 나가는 미스터리 구조를 띠고 있다. 동시에 런던 밖의 톰은 지상, 공중, 수중을 넘나드는 대모험을 벌이면서 시시각각 장소를 옮겨 그 시대 지구의 다양한 모습을 알게 되고, 런던 안의 캐서린은 런던이라는 도시 내에 잠재한 사회적 모순을 직접 목격하면서 ‘하층민과 다른 도시의 희생 위에 성립하는 번영’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톰에게는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캐서린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테데우스의 감춰진 악행과 위선이 폭로되면서 두 사람 모두 상당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고향이라 생각하는 도시의 체제가 정말로 옳은 것인가’라는 고민까지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명목상의 주인공은 톰이지만 캐서린 또한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숨은 주인공으로서 훌륭하게 활약하고 있다. (게다가 클라이맥스에서는 사실상 캐서린이 훨씬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결단을 내리기 때문에, 시리즈 전체의 주역은 톰이지만 본서만 놓고 보면 캐서린이 진(眞) 주인공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천기누설이라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2중 구조는 두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면서 독자의 지루함을 줄이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극중 세계를 묘사하는 역동적인 전개를 가능케 한다. 또한 시점은 둘로 나누어져 있지만 저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연결된 인물은 겹치기 때문에 이야기의 통일성도 유지된다. 얼핏 보면 간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꽤 영리하고 치밀한 구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내용 면에서 보자면 본서는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난장판을 보면서 갈등하고 고생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앞길을 개척하는 청소년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진정한 악당도 엄연히 존재하고 성격파탄자나 재수 없는 인간도 연달아 등장하지만 저자는 섣부른 흑백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지닌 어른들이 입장과 견해의 차이로 충돌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의 성장을 유도하고 있다. 호기심 많고 선량하지만 싸움은 젬병에다 눈치도 제로인 톰과 어린 시절의 비극으로 인해 얼굴도 마음도 일그러져버린 헤스터가 겉으로는 계속 충돌하면서도 차츰차츰 정을 쌓아가는 과정에도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따스함이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도 스토리 진행에 따라서는 가차 없이 퇴장시키는 저자의 단호함도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점점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청소년 소설의 특성상 어려운 개념에 대한 설명은 피하고 인물들이 어떤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도 약간 술렁술렁 넘어가는지라 미흡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동적인 세계관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스토리 전개의 묘미가 그러한 약점을 능숙하게 커버하고 있다. 단순한 SF 모험물로서도 뛰어나지만 그 설정 뒤에 감춰진 사회적 함의(含意)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두 배의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실제 지명이나 인물의 성격 등에 대한 저자의 숨겨진 장난이 많아서 100% 그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친절한 역주가 그러한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준다. 톰과 헤스터의 모험은 2년 뒤에 발표된 속편 [사냥꾼의 현상금]에서 이어지는데, 그 책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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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2.04.29 16:09 댓글 수정 삭제
    정말 단호하더라구요, 작가.... 그래도 청소년용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와장창... 전개에 있어서는 배려하지만 결단은 단호하고 신속하달까... 여러모로 신선했던 소설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잠본이 12.04.30 23:15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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