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빌리에 드 릴아당, 박혜숙 옮김, 바다출판사, 2011년 9월



pilza2 (pilza2@gmail.com)



 음악이나 연극도 그랬지만, 문학 역시 근대 이전까지는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독자가 늘어나고,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서 작가의 수요가 늘어나 작가 역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귀족 가문의 후예로 낭만주의자를 자처한 릴아당은 이런 세태를 달갑지 않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이 파산 후 가난을 겪다가 작가로 활동하게 된 모습을 보면 레이먼드 챈들러가 떠오르기도 한다(그 역시 사업가로 부유하게 지내다가 해고당한 후 작가가 되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는 자체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작가들(소수의 베스트 셀러 작가를 제외하고)이 보기에 아연실색해지는 부분이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외국’ 이야기니까 대범하게 넘기기로 하자.
 한편 본의 아니게 SF의 선조가 된 그가 보르헤스의 선집에 선정된 이유는 본작을 읽어보면 자명해진다. 낭만주의자를 자처하며 과학과 진보를 싫어했다는 그가 쓴 [미래의 이브]는 과학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었지만, 알려져 있듯 SF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찬양보다 경고와 비판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르이니만큼 SF에 포함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와 웰즈를 좋아하고(두 작가 역시 바벨의 도서관 선집에 포함되었다) SF를 번역하기도 했던 보르헤스가 릴아당을 고른 건 예상이 가능하지만, 특히 그가 직접 고른 본작의 면면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보르헤스적’인 작품이 많다. 문학적 선배에게 후배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건 무례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 인지도나 국내에 소개된 비중 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 마치 챈들러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스럽다’거나 로드 던세이니에게 ‘러브크래프트스럽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명백히 후자가 전자에게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었지만, 후자가 워낙 유명해진 바람에 전자를 소개하기 위해 후자를 갖다 붙이는 격이다. 따라서 본작을 읽어보면 보르헤스가 릴아당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베라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백작의 이야기. 정신병적인 집착과 광기가 환상과 만나 기괴하고 서글픈 초상을 그려내었다. E.A. 포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어느 슬픈 작가의 슬픈 이야기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중 액자 구조이며, 메타 픽션의 요소도 담고 있다.

체일라의 모험
 중국을 무대로 하고 있으나 동양적인 향취는 전혀 없고, 그저 서양에서 신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국적인 무대만 빌려왔다는 느낌.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무척이나 ‘보르헤스적인’ 이야기다(보르헤스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중국 작가를 내세운 바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보르헤스가 좋아할 만한, 보르헤스의 느낌이 드는 이야기다. 그가 이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죄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방법은 석방일을 알려주지 않는 거라는 말이 있다. 석방일이 다가올수록 커질 희망을 갖지 못하게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가장 큰 절망을 주는 방법은 석방한다고 했다가 돌연 취소하는 게 아닐까. 이 이야기에서는 탈옥에 성공하는가 싶다가 어이없게도 실패하는 죄수가 나온다. 예전 외신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친 죄수들이 간수의 집으로 나오는 바람에 다시 잡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이달의 거울 픽 108호 토막소개 2012.05.25
이달의 거울 픽 107호 토막소개 2012.04.27
소설 모털 엔진2 2012.04.27
비소설 텍스툰 9호3 2012.03.31
비소설 녹스앤룩스 Vol.1 : 빛과 어둠, 준비 땅!2 2012.03.30
비소설 녹스앤룩스 Vol.1 : 녹스앤룩스 1호를 읽고 나서1 2012.03.30
이달의 거울 픽 106호 토막소개 2012.03.30
소설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 보르헤스의 선배님 2012.03.30
소설 워치 시리즈: 내 책장에서 살아남은 환상문학 시리즈2 2012.02.24
비소설 B평 -2011 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1 2012.02.24
이달의 거울 픽 105호 토막소개4 2012.02.24
소설 페가나의 신들 2012.01.27
이달의 거울 픽 104호 토막소개 2012.01.27
소설 그림자 용: 2011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1 2012.01.27
소설 매치드: 이야기 리뷰 - 매칭(matching)1 2012.01.27
소설 지우전1 2011.12.31
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2011.12.31
소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2011.12.31
소설 표제어 사이로 펼쳐지는 환상, 카자르 사전1 2011.12.31
이달의 거울 픽 103호 토막소개 2011.12.31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