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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7인의 집행관

2013.02.28 23:2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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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집행관
김보영, 폴라북스, 2013년 1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http://zambony.egloos.com)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꿈이 나를 꾸는 것인가.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전세의 업보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내세에 닥칠 일을 미리 대비하기 위함인가. 나라는 존재는 모든 면에서 항상 변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계속해서 유지되는 일관된 본질이 있는 것인가. 세계는 단 하나뿐이며 이를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만큼 무수히 존재하며 그 사이를 어떻게든 넘나드는 수가 존재하는 것인가. 얼핏 듣기엔 참 멋지게 들리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답이 안 나오는 난문(難問)의 행렬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9년 온라인에 일부 연재된 이후 무려 4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마침내 우리 곁에 한 권의 책이라는 형태로 찾아온 김보영의 첫 장편은 이 모든 묵직한 질문을 하나의 원심분리기 안에 집어넣고 빛의 속도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그 해답을 찾아 나서는 여행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여행길에는 ‘꿈을 넘어선 꿈’, ‘세계를 초월한 세계’, ‘자아를 뒤집은 자아’라는 얼핏 보면 부조리하게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맥이 통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이 마치 만화경처럼 어지럽게 뒤섞이며 우리의 눈을 현혹한다.

 모든 사건은 주인공 ‘나’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며 ‘나’의 처지나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각 장(章)마다 정신없이 변화한다. ‘나’는 한 세계에서 죽을 때마다 다른 세계로 이행하여 단계별로 이런 저런 시련을 겪는데, 그 모습도 조직폭력배 보스에게 미움을 받고 제거당할 위기에 처한 2인자, 고대의 경기장에서 끊임없이 괴물과 싸우는 검투사, 마을사람들에게 배척받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기형아, 배다른 형제인 태자에 대한 애증 때문에 고민하는 왕의 서자, 다른 신들과 격돌하여 파란에 휩쓸리는 혼돈과 거짓의 신, 존재의의를 잃고 폐기될 위기에 처한 단백질 인형 등 매우 다양하다.

 각 장의 배경도 그에 따라 현대의 조폭 사무실, 팔색조가 날아다니는 왕조시대의 도읍, 신들이 대결하는 무상(無想)의 공간, 종말 이후의 폐쇄된 미래도시 등으로 바뀌며, 장르 또한 액션 스릴러에서 판타지, 신화, SF를 넘나드는 현란함을 보여준다. 또한 포맷 자체도 장편소설을 표방하고 있으나 사실상 여러 개의 막으로 구성된 연작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한 번만 읽어서는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고 작가가 일부러 비워둔 설정을 스스로 추리해 가며 읽어가는 노력도 필요한 편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러 번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해 나가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자기 내면에서 바뀌지 않고 숨어 있는 ‘누군가’를 느끼는 한편, 그와 동시에 각 세계를 넘나들며 그를 쫓아와서 끊임없이 질문과 힐난, 그리고 때로는 공격을 가하는 여섯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다. - 미친 자, 소심한 자, 영리한 자, 고지식한 자, 노인, 그리고 미녀.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주인공과의 관계는, 그리고 목적은?

 알고 보니 모든 것은 주인공이 최초의 세계 - 즉 현실세계에서 범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장대한 연극의 일환이었다. 주인공은 초고대의 선조가 남긴 거대한 인공두뇌인 ‘시스템’에 접속한 채 꿈을 꾸는 중이며, 그를 추적하는 여섯 사람은 현실에서 주인공이 저지른 죄로 인해 손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로서 주인공을 심판하기 위해 ‘시스템’이 보여주는 꿈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명의 집행관이 각각 차례대로 한 명씩 입력한 데이터에 의해 설계된 여섯 개의 세계를 거치면서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피눈물이 나올 만큼 혹독한 고통을 겪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으로써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세계를 완주했을 때, 그에게는 진정한 죽음, 진정한 끝이 찾아오도록 각본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본대로 무난하게 진행되어야 할 심판 과정에 하나둘씩 작은 오류가 생겨나면서 집행관들은 혼란에 빠진다. 기억과 성격과 경력과 취향과 지식과 그 외에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백지상태로 심판을 받아야 할 주인공이 계속해서 어떤 계기로 인해 주변 상황을 깨닫거나 스스로를 통제하여 집행관들이 의도한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단순한 에러인가? 혹은 집행관 중 누군가가 죄인과 공모하여 의도적으로 방해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제3의 누군가가 간섭을 가하는 것인가? 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세계로 계속 넘어가면서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잊어버린 무언가를 기억해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집행관들은 일의 전말을 밝혀내는 동시에 주인공을 예정대로 심판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린다.

 여러 명의 공모자들이 작당하고 한 명의 목표물을 자기들이 설계한 ‘인공 꿈’ 속에 빠뜨린 뒤 자기들도 따라 들어가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공작을 벌인다는 기본 설정은 흔히들 말하는 ‘자각몽’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데,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중반부 이후를 한창 집필 중이던 2010년에 뜬금없이 바다 건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인셉션』을 들고 나와서 그 설정을 먼저 유행시키는 바람에 작가가 멘붕 상태에 빠졌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역시 독특한 아이디어는 나 혼자만 궁리하고 있는 게 아니니 어떻게든 더 먼저 만천하에 발표해버리는 쪽이 승리하는 거라는 인생의 교훈을 알려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라 하겠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공모자들보다 그들의 공작에 시달리는 목표물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후반에 가면 공작 그 자체보다 ‘시스템’의 이면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집행관’이나 주인공의 자아 탐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셉션』과 그렇게 비슷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낯선 환경에 내던져진 주인공이 순전히 야성의 감이나 초자아에 비견될 법한 그 무언가를 길잡이 삼아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선다는 점은 『앰버의 아홉 왕자』를 떠올리게 하고, 인간들이 신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세계마저도 파괴할 만한 위력으로 장엄한 혈투를 벌이는 제7막의 전개는 『신들의 사회』를 연상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향기가 더 짙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자가 제멋대로 받은 느낌일 따름이므로 별 상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뿌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바로 작가가 2008년에 발표한 단편 「몽중몽」(작품집 『진화신화』 수록)이다. 이 꿈에서 저 꿈으로 술술 넘어가며 동일한 주인공의 각각 다른 환생을 밀도 있게 보여주는 이야기 구조, 음침한 주인공을 항상 따라다니며 그와 대비되는 포지션에 서서 무언가를 일깨워주려 하는 ‘태양 같은 형제’의 존재, 그리고 결말에서 주인공의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하는 것 등등 여러 모로 이 작품과 대응되는 부분이 많다.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유사한 출발점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어떤 식으로 다르게 확장ㆍ변주될 수 있는지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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