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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픈

2013.02.28 23: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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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김이환, 폴라북스, 2013년 1월


날개 (revinchu@empal.com http://twinpix.egloos.com)



흰색 상자를 열며

 

 여기, 흰색 상자가 하나 있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상자다. 어디로 열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조그맣게 ‘OPEN’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자, 상자를 열어보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소원이 이루어질까? 비극이 벌어질까?

 아홉 개의 이야기가 주먹만한 상자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는 때로는 섬뜩하게도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입가에 내내 미소를 띄울 정도로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사람의 본성이다. 이야기가 곧 삶이기에. 삶은 이야기이기에.

  김이환 작가의 아홉 번째 작품 [오픈]은 연작소설이다. 환상소설이면서 연작소설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장르는 아니다. 초고층 건물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집인 배명훈의 [타워]나 소원을 이루어주는 남자가 등장하는 한 저택을 중심으로 한 하지은의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같은 몇몇 연작소설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단권으로 된 환상소설 연작은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이환 작가의 [오픈]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하얀 상자를 소재로 한 연작소설이다. 연작소설이 흔히 공간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한다고 할 때, 도구를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약간의 긴밀한 연관관계는 떨어지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상자’라는 소재만 겹칠 뿐, 독립적인 단편들이 실려 있는 느낌이었다.(상자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점만 빼고는 공통적으로 묶을 지점이 없기에 그만큼 각 작품의 자유도가 높았던 것이다. 즉, 이야기나 사건, 시점 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편이 잘 읽혔고 흥미로웠다. 물론 단편집들의 특성 상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 수는 없고,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가장 마음에 드는 한두 편이 생기고 나머지는 아쉬운 점이 크게 다가오긴 하나,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재미가 고른 편이라고 느꼈다. 문장이 깔끔했고, 구성도 단정했으며, 특히 마지막 단편을 통해 ‘상자’를 소재로 한 한권의 연작소설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모로 신경 쓴 점이 느껴져 좋았다.

 각각의 단편의 독립성 때문에 이 리뷰 역시 전체적인 평보다는 각각의 작품별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 작품씩 살펴보자.

 

그의 상자

 

 이 연작소설집의 첫 번째 실린 단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단순함 감이 있고, 이야기가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도입부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즉, 소설의 핵심은 인물이 아니라 상자라고 할까. 이렇게 처음에 상자를 선보여야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 없이 상자만 제시되어도 모든 게 이해 가능할 테니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또한, 이야기 역시 이런 도입부라는 점 때문에 희생된 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물체로 인해 벌어지는 단순한 서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환상적으로 처리되었고, 기괴하기는 하나, 새롭거나 매력적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적으로 미국의 환상특급이나,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 작품만이 개성이 가장 떨어지는 면이 있다. 한 남자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상자를 받게 되고 소원이 정말 이루어지나,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은 이야기를 읽는 초반에 이미 독자들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한 구조라서 아쉬운 점이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대중에게 쉽게 다가오는 이야기라는 점, 깔끔한 문장과 전개로 쉽게 상자를 독자에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도입부의 기능적으로는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호랑이의 상자

 

 술에 깨어나 보니, 갑자기 자취방에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밥을 차리고, 청소도 하고 옷도 정리한다. 기묘한 시작으로 이야기는 점점 환상적으로 치닫는다. 호랑이 인형 옷에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말없이 일을 하고 이곳저곳 끌고 다녀, 귀여운 정서를 느끼게 만들었다.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서 차분하게 수수께끼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즐기게 된다. 담백한 이야기였고, 끝에 가서는 좀 뻔한 반전이지 않나 싶긴 하지만 호랑이 탈 쓴 인형의 귀여운 이미지가 인상에 박힌 작품이었다. 한편의 우화처럼 읽힌다.

 

꼬마의 상자

 

 앞의 두 편에 비해 여기서부터는 좀더 신선하고 재미있는 느낌을 받았다. {꼬마의 상자}는 그 서막을 연 작품인데, 꼬마의 시점에서 사건을 관찰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었다고 할 수 있다. 꼬마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환상적으로 처리되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긴박하고 잔혹한 사건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상상으로 보완하게 된다.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작가가 쓰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고 보완해서 같이 작품을 완성하는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특히 매력을 더한다고 할 수 있다. 꼬마의 시선은 제한적이고 단순하며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까지 있기 때문에 그 단절을 독자는 계속 채우려고 하고 그로 인해 상상의 폭이 넓고 더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상당히 발휘된 작품으로 보였는데, 그 이후는 꼬마의 제한된 시선으로 쓰는 게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며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었고, 인상에 깊이 남아서 다 읽고 나서 뇌리에 남는 두 세 개의 작품 중 하나였다. 이 작품에서만 흐르는 미묘한 공기, 독특한 정서가 읽는 내내 머릿속을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읽어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아들의 상자

 

 {아들의 상자}는 거의 대부분이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다. 단편소설에서 대화로만 처리하는 방식이 낯선 실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런 환상소설이면서 또한 연작소설집에서 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앞에서 꼬마의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흥미를 끌다가 이번에는 대화 위주로 단편을 씀으로써 독자가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기법으로 여러 서사를 연주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연작소설집 전체가 흥미롭게 느껴지며 작가가 재미있게 쓴 느낌을 받게 되고 독자 역시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화를 통해서 두 인물이 어떤 관계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렬한 대립 과정과 반전을 대화만으로 표현해 내면서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대화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문이 없다고는 하나 희곡적인 작품이었다. 대화는 독자에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즉, 소설 내의 시간인 ‘서술되는 시간’과 독자가 읽는 시간인 ‘서술시간’이 동일한 소설로 독자가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을 읽게 된다. 대화를 통해 단적으로 제시된 정보들은 수용하는 독자가 보완하면서 이 작품 역시 함께 완성해 나가는 글이다. 실험적인 성격 외에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앞의 세 작품에 비해 갑자기 커졌고 작위성이 높은 상황 설정으로 인해 이 작품의 이질감은 전체 연작소설 중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다른 소설들이 같은 한국에서 동시간대에 벌어지는 느낌을 준다면, 이 소설만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준다.

 

엄마의 상자

 

 아기자기하면서 당황스럽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단편으로, 역시 인상에 남은 단편 중 하나였다. 다른 작가들은 쉽게 묘사해내지 못할 현실 속에서 능청스런 장난을 펼치는 작품인데, 장난의 도를 높여서 환상적인 느낌까지 자아낸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묘한 정서를 내는데, 김이환 작가만이 가진 개성이 이끌어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어느 날 부턴가 갑자기 온 동네에 장난을 하는데, 이 장난의 강도가 높고 워낙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이면서 일본 드라마이자 영화인 [기묘한 이야기] 같은 느낌을 준다. 일상적 인물들 사이에서 약간 비틀어진 비일상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다른 작품들과 다른 이질감을 내는데, 그건 ‘상자’가 동떨어진 듯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상자를 암시하는 듯한 장면 처리가 없었다면, 일상의 급작스런 변화를 다룬 일반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현실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못할 것 같은 한 엄마의 장난의 연쇄 속에서 단편적인 구성을 취하며 이야기를 능숙하게 봉합하고 있다. 읽으면서 괜히 내가 민망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유쾌한 느낌이 드는 재기발랄한 단편이었다.

 

노인의 상자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 앞의 {엄마의 상자}까지 읽고 나서는 이제 독자는 ‘상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가가 이번에는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를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펼칠까, 기대하게 된다. {노인의 상자} 역시 어딘가 들어봤을 법한 저승사자 이야기를 비틀어서 전개하는데, 그러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개성적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단편에서 독자가 예측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를 하는 것은 힘들지만, 중간까지는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흥미로우며, 특히 독자가 단순하게 읽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추리할수록 더욱 재미있는 단편이었다.

 노인이 죽기 직전 상자를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하루 빌리는데 천 만원이라고 하는 순간, 높은 가격대에서 오는 묘한 현실감이 든다. 은행에서 돈을 빼서 하루의 시간을 갖고 그 돈 쓴 것을 자식들이 추궁하면서 기이한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고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여기서 액수는 점점 커지고 노인은 계속 삶을 늘려나간다. 그 과정이 시트콤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김이환식 저승사자 이야기랄까.

 

두 사람의 상자

 

 앞의 이야기가 김이환식 저승사자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김이환식 도플갱어 이야기나 복제인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상자를 본 순간, 상자를 주운 사람과 안 주운 사람으로 분리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시나 또 다른 자신이 생겼는데도, 무섭거나 기괴하게 처리하는 게 아니라 쉽게 받아들인다. 이런 점이 이 연작들이 몇몇 작품을 빼고는 비슷한 정서를 띄게 하는 요인으로 보인다. 내가 둘이 되면 어떨까. 이런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몇몇 작품에서 기괴하게, 무섭게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천연덕스럽게 다루면서 재미를 주고 있다. 물론 앞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생각할 여지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상자

 

 이 단편 역시 {아들의 상자}처럼 대화 위주로 쓰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들의 상자}가 나라간의 전쟁이라는 상당히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대화로 풀어냈다면, {다른 사람의 상자}는 한 남자가 윗집에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면서 벌어진 일을 풀어내고 있다. {아들의 상자}가 대화를 통해 동시간대의 일을 독자가 눈앞의 연극처럼 보는 느낌이라면, {다른 사람의 상자}는 취조 과정을 통해 사건을 되짚어보는 형식이다. 즉, 사건이 현재 실시간으로 대화를 통해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복기하는 것이다. 이때, {아들의 상자}가 바로 갈등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장감이 뚜렷한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사건은 이미 종결된 이후이기 때문에, 추리소설처럼 범행이 끝난 후, 독자가 탐정이 되어 범행 과정을 되짚어보는 식의 구조를 취한다. 퍼즐을 맞추는 구조이기도 하다.

 문답을 통해 사건을 설명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서사나 인물이 인상적이거나 아주 특이한 환상이나 설정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사건을 복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글이다. 즉, 독자가 대화를 통해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 분량을 짧고 실험적인 형식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소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의 상자

 

 주인공인 김성진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이다. 회사가 부도 나기 직전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내내 돈 생각을 한다. 갑자기 돈벼락이 쏟아질 일이 있을까? 그런데 옆 좌석에 앉은 남자가 술에 취해서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한다. 내용이 심상치 않다. 로또 번호를 맞춰보더니 2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 남자를 뒤따라가게 된 김성진은 뺏을까, 라는 고민이 든다. 종이조각 하나만 빼내면 무려 7,000만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누구나 소원 한두 가지씩은 있죠, 그렇죠?”라며 로또 영수증을 하라는 대로만 하면 주겠다고 말한다. 기이한 일이다. 상자에 다른 사람이 신고 있는 양말 한 짝을 받아서 넣어오기만 하면 7,000만원을 준다니?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이제 김성진은 양말 한 짝을 구하려고 움직인다. 흥미로운 설정,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처럼, 소품으로 느껴지는 글이었다. 발상이 앞에서 {엄마의 상자}처럼 일상 배경에서 약간 비튼 방식인데, 기묘한 우연이 이어지면서 사건은 단순하게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일종의 징검다리다. 바로 마지막 에피소드인 {아내의 상자}에 도달하기 위한.

 

아내의 상자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일종의 메타픽션처럼, 앞의 나온 이야기들이 텍스트화 되어 등장한다. 소설 속의 소설인 셈인데,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들이 이 단편 안에서 소설로 등장하니 그 느낌이 묘하고 재미있었다. 마지막 단편인 만큼 연작소설집 전체를 하나로 봉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남자의 사무실로 흰색 상자가 배달된다. 발신인이 없는 빈 선물 상자가 배달되었지만,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무가지의 퀴즈를 풀다가 문득 포장지가 배달된 물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포장지를 살펴보니 그 정체는 소설이다. 바로 소설의 제목은 이 책의 제목인 [오픈]이고 {그의 상자}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이 책의 첫 번째 실린 단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지금 이 소설 속 화자가 읽는 그 소설이 자신이 맨 처음 읽었던 바로 그 단편이라는 것을 안다. 같은 텍스트를 공유하지만, 다른 것은 화자는 소설 속에 있기 때문에 바로 옆에 그 상자가 실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자에게는 우리가 재미로 읽는 이 책이 일종의 매뉴얼이자 예언서인 셈이다. 독자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차례차례 앞에 읽었던 단편을 화자와 함께 공유하며 되짚어볼 수 있게 된다. 계속 소포가 도착하는 것이다. 작가가 직접 마지막 단편에 자기가 쓴 단편들의 내용을 간추려서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이 재미있게 다가온다. 독자는 소설 속 화자와 함께 앞의 이야기들의 감상을 나누는 기분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앞의 소설들에서 상자가 어디에 등장했고, 왜 소설마다 결말이 다른지에 대해서 화자가 추리하는 부분을 읽으며 일종의 작가의 해설을 읽는 느낌도 들고, 또 다른 독자의 리뷰를 읽는 기분도 들면서 신기한 기분에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예전 MBC 드라마 [테마게임]처럼 바로 앞 {친구의 상자} 속에 화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짜맞춰지며 결말로 향한다. 이런 장치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하고 있고, 소설 자체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깔끔한 결말을 맺으면서 깊은 인상을 준다. 연작소설이 하나의 잘 짜인 구성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독자가 한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처럼 충족감을 들게 하는 마지막 단편이었다.

 

흰색 상자를 닫으며

 

 특이하고 또한 특별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몇몇 단편은 이런 종류의 영상매체나 소설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식상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또 몇몇 단편은 분명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정서를 띄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작가는 능청스럽게 종이로 만든 하얀 상자 가지고 아홉 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괴이하고, 기이하면서 환상적이고 참혹하거나 때론 처연한 이야기들. 생각할 수 없는 반전이나 강렬한 인물, 첨예한 갈등, 엄청난 스케일의 작품은 아니다. 애초에 하나의 공통된 소재로 모인 단편들일 뿐이기 때문에, 단편집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책이다. 그런 관점에서 단편소설의 다채로운 매력을 품고 있는 책이다.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김이환 작가만의 독특한 색채로 그려지고 있다. 완숙한 문장과 깔끔한 전개가 연작소설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물론 단순한 단편집은 아니다. 아홉 개의 이야기의 배치 순서부터 치밀하게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도입부의 단순함부터 마지막의 모든 이야기를 내포하는 이야기까지 독자가 상자에 대해서 하나씩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고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맞춰 놓았다. 첫 번째 단편에서는 기존의 여러 공포소설처럼 소원을 들어주며 파국을 맞게 하는 단순한 ‘상자’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상자가 꼭 파국을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며, 기존에 있던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인물과 구조의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예상을 깨트리는 재미를 주는 것이다.

 가볍게 읽어나가게 만들고, 현대를 배경으로 기이한 환상을 경험케 한다. 즐거운 이야기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흰색 상자를 열기 주저하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도 한 번 [오픈]을 열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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