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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
앤윈 외, 환상문학웹진 거울 , 2012년 7월



잠본이 (http://zambony.egloos.com zambony@hanmail.net)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5번째로 내놓은 소재별 단편선. 거울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흡혈귀, 외계인, 고양이, 타로카드를 소재로 한 단편선을 순서대로 줄기차게 발행해 왔다. 해외에서는 예전부터 자주 있어왔으나 국내에서는 아직 미개척에 가까운 출판 형식인데, 공통 소재를 가지고 여러 명의 작가가 저마다 다른 스타일과 메시지를 담아 이리저리 변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소재별 단편선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기획 작업 자체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사실상 국내 출판시장 내에서 장르소설 단편집을 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의 문제도 있다. 메이저 출판물 중에서는 2010년에 웅진출판사의 뿔 임프린트를 통해 출간된 단편집 『독재자』가 이와 비슷한 경우인데, 이 책의 기획에도 거울이 참가하였다.)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한 소재가 주어진 만큼 방향을 잡기 수월하고 연간 대표 작품집이나 작가 개인 작품집처럼 결산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재미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기획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전의 원고를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쓴 작품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마감 스케줄을 잘 관리해야 하며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균형을 생각하여 수록 작품의 선별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므로 제법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번씩이나 이러한 방식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독특한 재미를 추구하려는 편집진의 의지 덕분이라 여겨진다.

하고 많은 소재 중에 ‘탄생’을 택한 것은 2012년이 이런 저런 내우외환으로 몹시 힘든 시기일 뿐만 아니라 마야 역법의 해석 때문에 널리 퍼진 ‘2012년 종말론’이 사람들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광고문구도 ‘멸망의 해에 외치는 탄생의 울음’이다.) 제목은 거울 내부 게시판에서 회원 공모를 통해 결정한 것인데 동구권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아르까지 & 보리스 스뜨루가츠끼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За миллиард лет до конца света, 1977)』을 패러디한 것이다. ‘탄생’이라는 모티브와 어울리며 ‘종말’에 반대되는 ‘재시작’을 끼워 넣고 숫자 부분을 수록 작품 수에 맞춰 11로 바꾼 것뿐인데 제법 잘 어울리는 제목이 되었으니 참으로 신묘한 아이디어라 하겠다.

수록된 작품들은 다양한 각도와 시점을 통하여 ‘탄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아무래도 탄생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소 추상적이다 보니 해석의 폭이 넓은 편이고 그 때문에 각각의 작품이 보여주는 탄생이 어떤 탄생인가 하는 점에서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사전상의 의미는 ‘태어남’, 즉 ‘세상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남’이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탄생은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탄생, 즉 ‘원래 있던 것이 어떤 경위로 인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남’까지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탄생인 것이다. (그 때문인지 표지 그림도 생명의 상징인 녹색 식물과 부팅/재부팅을 의미하는 컴퓨터 전원 스위치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그 탄생의 주체가 꼭 인간이라는 법도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일 수도 있고, 인간을 둘러싼 환경일 수도 있으며, 인간이 사용하는 무생물일 수도 있고, 인간을 지배하는 사상이나 시스템이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탄생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탄생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나 탄생의 과정에 따르는 고난, 혹은 탄생을 막으려 하는 자의 입장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실로 다채로운 내용들이 한 책에 들어있는 점이 본서의 매력이라 하겠다.

각 단편의 주인공이 탄생이라는 소재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도 다양한데, 그 탄생을 곁에서 구경하는 방관자의 입장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탄생을 돕거나 방해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이 그 탄생의 주체가 되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로 바뀌기도 한다. 인간이 비(非)인간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고 반대로 비인간이 점점 인간으로 변해갈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누군가 또는 무언가의 탄생을 담보하기 위해 주인공이 먼저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기도 한다. 그 탄생이 반드시 긍정적인 사건이라는 보장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보다 더 참담한 상황이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에 독자는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수록된 단편들은 장르 면에서도 판타지, SF, 호러, 설화, 사극, 우화, 철학논문(?) 등등 매우 다양하며 분위기 면에서도 사막의 버석거리는 모래처럼 냉정하고 우울한 작품에서부터 시골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정겹고 흥겨운 작품까지 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사이의 갈등, 고속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변해야 하는 직장인의 고뇌, 공존을 잊어버린 인류의 횡포에 시달리는 자연, 전쟁에 이기기 위해 생명마저 조작하는 과학의 모순, 우연과 과장이 연속으로 쌓이면서 하나의 종교로 발전하는 촌극 등등 요모조모 곱씹어 볼 만한 주제도 가득하므로, 독자들에게 흔치 않은 독서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올해는 거울이 창간 9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또한 얼마 전에 통권 100호를 돌파하였으며 이 글이 실리는 시점에는 111호가 발행될 것이다. 만물의 부침(浮沈)이 심하고 변화 속도도 빠른 인터넷 시대의 장르문학 판도에서 거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각별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용케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작가와 독자, 편집자, 필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폭넓은 사고와 유연한 대응이 가능한 인적 네트워크로서의 본질을 잘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보자면 이 책은 단순히 좀 특이한 이야기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내년에 10주년을 맞이하는 거울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초심을 되새기며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전주곡의 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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