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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 그러면 아비규환

2013.05.31 23:28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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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
마이클 셰이본 외, 엄일녀 옮김, 톨, 2012년 8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상상을 해보자. 주류문학/순문학 계간 문예지가 하나 있다. 그렇게 큰 권위와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인지도가 있고 고정 독자를 거느리며 꾸준히 발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온 신간의 내용물이 거울 단편선이라면?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의 문학 계간지 맥스위니스가 마이클 셰이본을 객원 편집자로 맞아 한 권을 통째로 맡긴 결과로 나온 게 바로 본서이다. 원제는 〈McSweeney's Mammoth Treasury Of Thrilling Tales〉, 억지로 옮기자면 〈맥스위니스의 스릴 있는 이야기 거대 보물상자 단편집〉. 책의 두께와 수록작의 수를 보면 ‘매머드’라는 낱말이 붙은 이유가 짐작이 된다.
 물론 맥스니위스를 우리가 생각하는 문예지처럼 고정되고 딱딱한 포맷으로 여기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가령 아마존에서 맥스위니스를 검색하면 장정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얼마나 다양하고 개성적이며 실험적인 모습으로 선보여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맥스위니스가 주류소설/순문학 계열로 분류되는 것만은 분명하고 이번의 시도가 내외부적으로 화제가 될 정도로 기존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단편집 한 권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멋진 권리를 얻은 셰이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취향으로 가득한 책을 만들어내었다. B급 장르소설, 펄프픽션을 컨셉으로 하고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섭외하여 무려 스무 편의 단편을 담아서 낸 것이다. 상세한 경위는 후기에 담겨 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정부터 시작해서 과거 펄프잡지를 의식하고 재현하고자 한 셰이본의 열정과 이에 찬동한 작가들까지 모두 이 작업을 기꺼이 즐겼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작품들이 셰이본의 의도만큼 막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다. 주류문단 계열의 작가들이 들어간 것도 이유에 포함될지 몰라도 상당수의 수록작은 기대보다는 점잖다. 작정하고 B급 감성으로 막 나간 글은 {안 그러면 아비규환}, {고스트 댄스},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 {모두 안녕이다} 정도고 대다수 수록작은 얌전하고 사색적이며 진지하고 무겁다(심지어 셰이본의 글도 그렇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작가들이 문예지에 실린다는 생각에 마음껏 막 나가지 못하고 자기검열이 들어간 모양이다. 좀 더 장르적이거나 ‘통통 튀는’ 작품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대신 영미 문학의 대가들이 쓴 최신 장르 단편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으니, 우리나라 번역본은 한술 더 떠서 표지에 시커먼 칠을 해놓았다. B급 펄프잡지 컨셉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촌스럽고 웃긴 표지가 내용물의 진지함을 왜곡한다고 판단한 건지 굵은 쇠창살을 친 것처럼 그림을 가려놓아서 [파울볼(*)]의 미녀들처럼 되고 말았다. 차라리 표지를 새로 만들 일이지 이런 식의 원본 훼손은 불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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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 표지 (2003)


 어찌 되었든 출간 자체가 기념비적인 일이고 화제가 될 만한 자격은 충분히 갖고 있는 단편 선집이다. 셰이본은 이후 약 1년 후에 다시 맥스위니스와 손잡고 〈McSweeney's Enchanted Chamber of Astonishing Stories〉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후속편을 냈다. 이번엔 놀라운 이야기라는 컨셉 아래 스티븐 킹, 마거릿 앳우드, 조너선 래섬, 차이나 미에빌, 조이스 캐롤 오츠, 피터 스트라우브 등 쟁쟁한 작가들을 섭외하여 공포·환상소설을 대거 실었다. 이것 역시 번역 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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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Sweeney's Enchanted Chamber of Astonishing Stories (2004)


안 그러면 아비규환 / 닉 혼비
 미래의 방송을 보여주는 VCR을 우연히 입수한 소년의 이야기. 초반에는 시시한 청소년 소설처럼 전개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주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끝까지 막나가는 전개를 보여준다. 미래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종말을 앞둔 주인공의 고뇌 이런 건 거의 없고 희한한 게 생겼네? 여자애 꼬시는 데 써먹었다, 신난다! ……라는 이야기.
대신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주인공의 메타픽션적인 발언은 작가의 의도만큼의 재미를 주지 못한 것 같다.

고스트 댄스 / 셔먼 알렉시
 본서의 B급 컨셉에 충실하게 좀비 등의 B급 소재를 잘 활용한 단편. 딱히 개연성 있는 설정을 구상하지 않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쭉 쓴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서 느껴지는 재미가 있다.

나치 카나리아 사건 : 명탐정 시턴 베그 경 시리즈 / 마이클 무어콕
 대체 역사 추리소설인데 주석에도 있듯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면서도 무척이나 자유로운 발상을 발휘했다. 정말로 시리즈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시턴 베그 경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초시간 탐정이라고 소개는 하면서 막상 글 속에서는 그런 면모를 보이지 못한 점이 아쉬운데 다른 이야기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앨버틴 노트 / 릭 무디
 종말물(포스트 아포칼립스)이며 사이버펑크의 요소를 섞었지만 결국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한 마디로 필립 K. 딕스러운 소설이라고나 할까.
 소재의 능수능란한 활용, 화려한 문체, 촘촘한 묘사와 곳곳에 곁들인 유머, 꼬인 듯하다가도 확 풀어지며 뒤통수를 치는 플롯 등 시종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프로필을 보면 장르 쪽 작가는 아닌 것 같은데도 장르의 클리셰를 어쩌면 이렇게 자기 식으로 잘 조립하고 요리했는지 감탄스러울 뿐이다.

척의 버킷 / 크리스 오퍼트
 B급 SF소재에 자전적인 메타픽션 요소를 버무렸다는 점에서 찰스 유의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연상시키는 단편. 나름 유머와 재치로 웃기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닳고 닳은 SF 독자에게는 너무 식상한 소재와 줄거리라서 마음 편하게 웃어나 줄지 모르겠다.

다들 안녕이다 / 할란 엘리슨
 수록작 중에서 막 나가기로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등 드실 단편. 문학성, 개연성, 심지어 플롯이니 장르니 뭐니 전부 쌈 싸먹고─아니, 미국식으로 빵 사이에 끼워 먹었다고 해야 할까─요즘 표현으로 ‘뙇!’하고 내놓았다. 장르는 할란 엘리슨이다.

고양이가죽 / 켈리 링크
 단편집 [초보자를 위한 마법]에도 실려 있어 이미 읽은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단편. 마녀와 고양이라는 흔한 소재로 이 정도의 글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았을 터. 이 단편으로 처음 작가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단편집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웹진 거울의 독자라면 분명 만족할 것이다.

화성에서 온 요원 : 행성 로맨스 / 마이클 셰이본
 쥘 베른풍의 대체역사-스팀펑크-모험물.
 본서의 기획자이자 편집자로 활약한 셰이본의 글이지만 아쉽게도 제목이 장대한 낚시라는 점, 더 큰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불과해 보여 그만큼 완성도도 낮게 느껴진다는 점 등 단점이 많은 편이다. 전술했듯 B급 펄프픽션을 컨셉으로 하면서 너무 점잖고 진지한 내용도 단점으로 봐야 하나? 예고대로 후속작에서 정말 화성으로 날아간다면 모를까 이번 편만 봐서는 ‘행성 로망(로맨스라고 하면 연애물을 연상할 수 있어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다)’이라는 부제는 그저 낚시일 따름이다. 일본 개그로 표현하자면 ‘셰이본 선생님의 차기작을 기대하세요(*)’.



* 파울볼 - 호조 츠카사의 만화 [시티 헌터]의 해적판 번역본 제목. 작품내 등장하는 여성들의 속옷 또는 비키니 수영복 모습을 시커멓게 먹칠을 해서 가려놓았다. 당시 해적판들은 착하게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을 먹 혹은 화이트로 열심히 수정을 했는데, 물론 당연히 청소년 보호를 위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음란물 유포로 처벌당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 베른협약 가입 이전에 나온 책이라(한국은 1996년 가입) 저작권 침해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기에 수정만 잘 하면 일본 만화 번역본은 얼마든지 무단으로 낼 수 있었다.
* ‘~ 선생님의 차기작을 기대하세요’ - 일본 만화 잡지의 마지막 회에 반드시 실리는 문구이며 여기서 비롯된 일본의 인터넷 유행어. 결말이 허망하거나 실망스러운 작품, 혹은 너무 빨리 갑작스레 종료된 작품을 놀리거나 비웃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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