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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세계의 환상 소설

2012.10.19 23:3910.19

세계의 환상 소설

E.T.A. 호프만 외, 이탈로 칼비노 엮음, 이현경 옮김, 민음사, 2010년 5월



pilza2 (pilza2@gmail.com)



 본작은 20세기 환상소설의 대표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탈로 칼비노가 19세기 환상소설의 대표작을 직접 골라 모은 선집이다. 서문에 밝혔듯 19세기 초반의 시각적인 환상이 두드러진 작품을 1부로 묶고 19세기 후반의 심리적, 일상적인 환상을 보이는 작품을 2부로 삼아서 구분하고 있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명확하게 나뉘어지는 건 아니고 편의상의 구분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
 다른 작품의 리뷰에서도 언급한 것 같은데 20세기 이전의 환상소설과 공포소설을 딱 잘라서 나누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종종 환상은 공포를 수반하고 공포는 환상에 의지한다. 환상소설을 표방한 이 단편집의 수록작 중에서도 유령, 악마, 마법, 지옥, 되살아난 시체, 흡혈귀, 저주 등 호러의 소재가 수없이 등장한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러한 근대의 환상과 공포를 뭉뚱그려 괴기소설이라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도 널리는 아니어도 일부 쓰이고 있다. 하지만 괴기라는 용어에서 상당부분 호러와 그로테스크의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에 무조건 괴기소설이라고 부르기도 곤란하다. 때문에 공포소설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쓸 수 있는 환상소설을 내세우는 건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수록작 중에서 {모래 남자}, {젊은 브라운 씨}, {코}, {유령과 접골사}, {일러바치는 심장}, {신호수}, {악마의 호리병}, {눈먼 자들의 나라} 등은(혹시 더 있을지도 모르나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른 단편집이나 선집에 수록되어 소개된 적이 있는 단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환상소설로 분류된 적이 없는 단편도 있기에 가치가 크게 떨어지진 않는다고 본다. 총 수록작 26편 중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이 초역이며 처음 소개되는 작가도 있고 유명 작가라고 해도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있는 등 고전 판타지 단편집으로의 가치는 [톨킨의 환상서가]에 맞먹는다. 다만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탈리어 원본을 번역했으므로 상당수 작품이 중역이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편이 좋다.
 사실 수록작의 면면이나 성격을 따지고 보면 이 단편집도 [톨킨의 환상서가]처럼 환상문학전집으로 나오는 게 더 걸맞을 것 같지만, 아마도 이탈로 칼비노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민음사에서 나왔다. 실제로 황금가지에서 출간 예정이었던 이탈로 칼비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책이 민음사에서 나왔던 전례를 생각해보면 역시 장르의 차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떠돌이 윌리 이야기 / 월터 스콧
 죽은 자의 나라(저승이든 지옥이든)로 여행을 떠나 난관을 지혜로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동서양의 신화와 민담에서 두루 나타나는 원형적인 플롯이다. 본작은 여기에 영주와 소작인의 갈등이라는 역사적인 요소를 섞어내었다. ‘있는 자’의 횡포에 맞서는 ‘없는 자’의 수난은 몇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영생의 묘약 / 오노레 드 발자크
 리얼리즘으로 유명한 발자크도 젊은 시절엔 다수의 환상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본작은 아마도 발자크식 환상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실제 인물 돈 후안을 소재로 죽은 자도 살리는 동양에서 구한 약과 같은 환상적인 소재를 결합했고, 결말 부분을 보면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기독교인에게 대한 풍자로도 읽혀서 흥미롭다.

 마법에 걸린 손 / 제라르 드 네르발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있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데, 어쩌면 작가는 이런 증상을 목격하고 착상을 해서 이 글을 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교수형 당한 죄수의 손으로 어떤 자물쇠도 푸는 마법 도구를 만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다른 문헌(소설인지 아닌지도 생각이 안 난다)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기억이 드는 걸로 봐서 작가의 창작은 아니고 원래 있는 소재인 것 같다. 마녀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죽은 자의 육신 일부분(보통 손이나 머리카락)이 중요한 마법의 재료로 종종 언급되는 걸 봐서 중세 마법에서 전래된 것 같다.

 죽은 여자의 사랑 / 테오필 고티에
 표면적으로는 늙은 성직자가 젊은 시절 흡혈귀에게 홀려 타락한 생활을 보낸 것에 대한 참회담으로 읽힌다. 하지만 실은 어떤 삶이 더 옳은지, 더 행복한지를 고민하고 망설이게 만드는 게 작가의 진짜 의도가 아닐까?
 주인공 로뮈알도는 낮에는 가난한 신부로 지내다 밤에는 아름다운 흡혈귀 클라리몽드의 남편으로 귀족처럼 부유하고 화려하게 살아간다. 표면적으로는 신부가 밤에 불경스러운 꿈을 꾸는 정도로 보이지만 주인공은 사실 후자가 진짜 삶이고 신부로 사는 삶은 그저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동료 신부에 의해 흡혈귀는 처단당하고 이중생활은 깨지지만 로뮈알도의 후회는 한때의 타락보다 클라리몽드를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수록작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으면서 도발적인(발표 당시에는 더욱 그랬으리라) 주제의식을 품은 문제작이다.

 일의 베누스 / 프로스페르 메리메
 출토된 청동 비너스 상을 모두들 우상이라고 꺼리는 가운데 한 청년이 장난으로 약혼 반지를 동상의 손가락에 끼운다. 그런데 그 반지가 아무리 애를 써도 빠지지를 않는다! 이후 청년은 결혼을 하지만 다음날 참혹한 시체로 발견이 된다.
 줄거리나 연출이 지금 기준으로 봐도 통용될 정도로 현대적인 호러물이다. 시각적 환상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하고 무서운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공포를 준다. 부인의 목격담이라면서 사건의 진상을 들려주긴 하지만 오히려 이 부분을 빼고 발자국 소리나 남편 몸의 상처 등을 더 상세히 묘사하면서 독자가 스스로 상상하도록 만들었다면 더 세련된 심리 공포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림자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서양의 민담에서 그림자는 본체인 육신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무의식, 심층심리, 감춰진 욕망이나 본능 등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데 본작에서는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서 주인공은 현명하고 착한 데 반해 그림자는 이기적이고 사악하다. 다만 그 결말이 그림자(악인)의 승리와 주인공(선인)의 패배라는, 동화 작가로 유명한 안데르센 치고는 의외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비극적인 점이 특이하다. 좀 더 현대 작가라면 주인공과 그림자가 도로 하나의 존재로 합쳐지거나,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죽는 표리일체의 관계임이 밝혀지는 결말을 맺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안데르센 같은 고전 작가에게 그런 뒤틀리고 심층적인 구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가 그렇듯 대부분 고전 작가들은 소재를 1차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그치는 게 사실이다.

 끝없는 사랑 / 버넌 리
 역사 속의 악녀 메데이아에 대해 조사하던 학자는 숱한 남자들을 사랑했고 또 이용하여 그들을 파멸시킨 메데이아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초상화를 잠깐 보았을 뿐 만난 적도 없는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 하던 학자는 메데이아를 발견하고(혹은 봤다고 착각하고) 쫓아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점점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영이 뒤섞이며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
 아라비안 나이트 중에도 약간 비슷한 내용(초상화를 보고 사랑에 빠진 남자가 실제 모델을 찾는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쪽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반면 이 작품은 섬뜩한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친구 중의 친구 / 헨리 제임스
 수록작 중에서는 비교적 현대적인 느낌이 든다. 크게 나누어 유령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이고 심리적인 감각에 의존한다.
 임종 직전 혹은 직후에 죽은 이를 보거나 꿈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및 동양권에서는 지금도 자주 이야기하며 공포담보다는 가족에 대한 유대를 상징하는 미담에 가깝게 다루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이야기는 같은 발상을 서양에서 어떻게 변용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된다.

 다리 건설자 /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두 문화의 충돌, 특히 기계와 산업화로 밀려나는 자연과 전통 문화에 대한 상징으로 핍박받는 토착신의 모습을 그러내고 있다. 원형적인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유머와 애정을 담아서 그려내었다.
 키플링은 영국계 인도인이라는데 극단적으로 다른 두 나라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품은 그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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