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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학론
안토니오 그람시, 박상진 옮김, 책세상, 2003년 11월


앤윈 (annwn3@gmail.com)



 근대적 의미의 ‘문학’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 지구에 살아 온 사람들은 서사를 즐겼다. 세상에는 수많은 민담과 신화가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서사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안에는 인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본연의 인상이 늘 존재했다.

 지금, 대중서사의 종류는 더욱 확장되었다. 영화관에는 하루가 다르게 ‘블록버스터 급’의 대중서사가 걸리고, 출판이 사양길이라고는 해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나, 박범신의 『은교』는 여전히 대중들이 사랑하는 서사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무지막지한 선인세를 전제로 출판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대중적 서사를 나누며, “그거 봤어? 정말 재밌던데.” 라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우리에게 안토니오 그람시가 알려져 있는 방식은 헤게모니 이론과 『옥중수고』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훌륭한 이데올로그였다. 당연히 예술과 정치의 영역은 같지 않다. 정치 이데올로그가 이런 분석을 하게 된 데에는, 감옥이라는 환경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가장 뛰어난 두뇌”로서 감옥에 갇힌 그에게 간수는 정치에 관한 모든 책을 금했다. 그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문학책뿐이었고, 그는 교도소 안의 문학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주목한 것은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이 아닌 ‘대중문학’이었다. 혁명가로서 그가 대중문학에 집중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대중들이 사랑하는 ‘문학’이라는 상부구조를 통해 대중이라는 정의하기 어려운 실체에 대해서 규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은 대중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해야할 대상은 바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근대 이탈리아의 문학 세계와 그 당시 대중문학의 사조와 흐름에 대해서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대중들이 ‘자발적 순응’를 통해 지배계급에게 지적·도덕적 지도권을 넘겨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헤게모니 양상이란 “아직 코페르니쿠스가 되지 못한 프톨레마이오스 적 인간들”이 지동설에 순응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대중들의 ‘자발적’ 순응은 온전하게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여러 물리적 권력이 발을 걸치고 있으며, 그 물리적 권력들은 지배계급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계속해서 새롭게 재구성한다. 사람들은 계급 억압을 자연스럽고 고정불변한 것으로 내면화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람시는 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물리적 대결을 선동하는 것과 함께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 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중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 속에서 그람시는 대중에 대해 “미적 감정에 대해 서사를 파고들지 않는 무리”로 묘사한다. 그 당시의 가장 대중적이며 직관적인 장르였던 연극을 언급하며, 연극의 관객이 흥미를 느끼게 되는 요소 중 미적인 감정이 차지하는 비율은 가장 적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현대의 대중에게 가장 직관적인 장르인 영화를 연상해보면, 미적인 감정보다는 인상적인 것들이 훨씬 주요하게 작용한다. 이를테면 폭력이나 성적 유혹과 같은 것들. 대중 서사는 본질적으로 인간 누구라도 가장 근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어야만 한다.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이는 매우 보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한다. 복수, 가족애, 연인간의 사랑처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 복잡한 심리묘사가 불필요한 감정들이 그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 일반의 행동반경은 매우 좁고, 생활은 일정하게 규격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대중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꿈꾸고, 일상을 깨뜨리는 흥미로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상적 삶은 과도하게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람시의 시대 이후 그 불확정성은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점점 확대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언제 해고당할지, 삶이 몰락할지를 짐작할 수 없는 비정규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역시 우리는 내 통제와 아무 상관없이 집에서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상황에까지 사람들을 몰아넣는 자본주의의 일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전히 우리의 시간과 삶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다. 발터 벤야민은 <추리소설을 읽는 여행자의 초상>에서 이에 대해 “자신의 불안감을 일탈적 불안을 관망하는 것을 통해 망각하려는 시도”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스릴러·범죄소설·탐정소설의 인기는 바로 이러한 시도와 연결 지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서사까지 확장한다면 액션을 중심으로 한 느와르 영화·조폭 영화 등의 범죄 영화와 첩보원 서사까지 포함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불확실성을 이 불안한 서사 속에 함몰됨으로써 망각하고, 불안에 대해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따분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 자본주의의 대중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사법체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법체계의 조직망을 빠져나가는 놀라운 범죄자(괴도 루팡·장 발 장)에게 열광하고, 사법체계 밖에 있는 사립탐정(셜록 홈즈·에르큘 포와로)을 신뢰한다.

 대중 서사의 주인공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 문학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독자의 열망을 이루어주는 ‘초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셜록 홈즈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다. 스파이더 맨은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가고, 슈퍼맨은 크립톤 행성에서 온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인물이고, 배트맨은 고담시 최고의 갑부다. 첩보물의 경우에도 대체로 주인공은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여성들을 주 독자로 가지고 있는 로맨스 서사의 경우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맨스 서사의 주인공인 여성은 언제나 성애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그는 아름다운 외모를 통해 많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는 위치를 점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주인공들에 이입하는 대중들의 선호에 대해 “백 년을 양으로 사느니 하루를 사자로 사는 것이 낫다”는 격언을 통해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양으로 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단 하루라도 그 힘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많은 동화들에는 알고 보면 혈통이 좋은 주인공이 등장하거나, 알고 보면 왕자님인 히어로가 등장한다. 대중 서사의 본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서사의 초반에는 평범한 양과 같았던 주인공이 결국 사자와 같은 힘을 얻으며 이야기가 진행되곤 한다. 평범한 양과 같은 사람들은 그 사자와 같은 힘에 자신을 대입하며 현실의 양인 자신을 망각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자신의 삶이 사자와 같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유아적 야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대중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소비하는 방식이 유아적이라는 것을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대중들은 범죄 서사를 소비할 때 그랬듯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주인공들은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의해 끊임없는 갈등을 겪고, 그 와중에 세계와 계급의 불일치는 어떤 방향으로든 반드시 드러난다. 주말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간 주인공 여성은 계급 상승의 철벽 앞에서 고통을 당하고, 첩보 영화의 주인공 첩보원은 부패한 정부의 다른 요원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이는 결코 세계의 본질을 끝까지 파악할 수 없는 대중의 불신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극명한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대항 헤게모니의 역할에 대해 그람시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가는 반드시 정치가보다 세밀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전망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덜 ‘분파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순적’인 방식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 정치가에게 ‘고정된’ 모든 이미지는 선험적으로 반동적이다. 정치가는 움직임 전체를 그 발전 속에서 고려한다. 반대로 예술가는 이미지들을 일정한 형식 속에 나타나는 모습대로 고정시킨다. … 그러므로 정치적 관점에서 정치가는 예술가에게 전혀 만족할 줄 모르고 예술가처럼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가는 언제나 시대적으로 뒤처진 시대착오적인 예술가, 당대의 현실적 흐름에 휩쓸리는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람시가 묘사한 이 정치가들은 헤게모니 이론의 핵심, 지적이고 도덕적인 개혁의 발전은 모든 사회계층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치가, 즉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이란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진보만으로는 결코 사회는 진보하지 못한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일한’ 진보적 노선의 관점에 선다는 것은 커다란 오류”다. 진보적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나며, 노선 뿐만 아니라 가장 진보적인 노선에서도 가장 뒤처진 걸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근대의 이탈리아에서 대중 문학의 일천함에 대한 반감으로 출발한 새로운 문학 집단은 당연하게도 대중 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양태들로, 대중 문학은 수많은 심미적이지 못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대중과 거리를 두어 온 기존의 문학집단에 대해서 “하층민에게 보이는 듯한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대중을 바라본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문학 집단에 대해서 “대중에 대한 경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다시 비판한다.

 어느 세계나 대중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서사를 만드는 지식인의 집단은 존재하며, 그 집단은 공통적인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현실 세계의 구조를 분석하면 결국 그 구조에 대해 아무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우민으로서의 대중을 발견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대중적인 서사와 대중적인 호소들을 경멸하고, 기껏해야 안쓰러워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발전을 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과연 한국 사회는 이와 크게 다른가.

 분명 대중적 서사들은 세계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많은 서사들은 대부분 대중들이 가장 광범하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기반으로 가장 유아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데에서 멈추고 만다. 체제의 변혁과 끝을 말했을 때, 대중들은 그 서사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수준에서 대중들은 두려워한다. 불확실한 세계를 망각하기 위해 이들은 어느 정도의 모험에 이입하기를 바라며, 어느 정도의 불행에 감정을 싣길 바라지만, 자신들이 지금껏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는 조금도 대중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람시는 이 구조의 모순을 이미 이들이 체득하고 있다는 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대중 문학의 영역은 지배 계급이 현재 행사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통속 소설들이 대중에게 폭 넓은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이 서사들이 대중적인 정서를 대중적인 감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모두에게 이 모순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기를 요청한다. 즉, 그람시는 유미주의의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다. 의식적으로 대중들의 방식과 언어를 차용하여 대중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호출하는 것이다.

 단, 그를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다가설 수 없도록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권력과 물리적으로 맞서 싸워야 하며, 직접적으로 대중을 만날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람시는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정확한 예측이었다. 200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작가들은 ‘출판 권력’을 넘어서서 대중을 만날 수 있는 활로에 언제나 목이 말라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람시는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물리적 힘으로 통로를 확보하는 것, 투쟁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람시가 생각하는 진지전, 헤게모니 전의 개념은 유기적 지식인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지난하고 기나긴 투쟁의 과정이다. 지적 헤게모니의 변혁은 알아서 끌려오는 대중이 아니라, 대중을 경멸하지 않는 지식인의 혁명적 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대중을 무시하고 대중들의 세계에서 발을 떼며 그 세계 밖을 바라보는 대신에, 대중이라는 존재를 분석하고 파트너로서 응시하려는 진지한 노력. 그 노력은 결론적으로는 자신 역시 대중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연결될 것이다. 타인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자율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동질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끌어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신의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한다. 그리고 그 문화는 분명 이 사회의 성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람시는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혁명적 문화, 대중적 대항 헤게모니의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가 대중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면서도 ‘대중적’ 이데올로기에 굴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전제 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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