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owl.jpg
부엉이 소녀 욜란드
박애진, 폴라북스, 2013년 1월

앤윈 (annwn3@gmail.com)


16세 때 나는, 11 년 후의 자신이 여러 군데에 피어싱을 하고, 아프로 헤어를 한 채, 어제 밤에 했던 화장이 덜 지워진 얼굴에 술이 덜 깬 눈을 하고, 아침의 시원한 공기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나키스트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의 내 삶은 이와 많이 다르다.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에서 ‘지하철을 탔더라면/놓쳤더라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인생의 전환. 영화 <언니가 간다>의 경우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 희망을 드러낸다. 그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만약 그랬더라면, 그때……. 그때 내 운명은 이게 아니었는데.
만약 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우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뒤틀린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그 뒤틀린 운명을, 우리의 수많은 ‘그때’들을 바라보는 어떤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욜란드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어떤 힘이 욜란드의 삶에 개입했고 뒤바뀐 운명은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잘못된 상황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시간을 뒤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뒤로 되돌릴 수가 없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뒤바뀐 상황에 대해 되돌아 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부엉이는 그 겁이 많고 무지몽매한 사람들과 달랐기에 지혜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 모두가 잠이 든 밤에 홀로 깨어서 그는 세계를 지켜본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고 선언했다. 지혜의 순간은 바로 모든 때가 지나가고 더 이상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때에서야 시작한다. 모두가 두려워하여 차마 돌아보지 못하는 지나온 길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 그곳에서 지혜가 태어난다.
부엉이가 ‘그림자를 날아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은 이 점에서 흥미롭게 드러난다. 빛의 영역을 지나서야 드러나는 것이 그림자이고, 결국 삶을 제대로 통찰할 수 없다면 그림자로 지칭되는 미래를 예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나 온 길을 제대로 돌이켜서 용기 있게 직시할 수 있는 자만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게 마련이요, 아르미안 이후 지금껏 변하지 않고 “운명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였다.
그리마는 욜란드에게 “넌 인간의 아이지만 네 그림자는 부엉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욜란드는 부엉이와 함께 살았기에, ‘그림자를 보는 능력’,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난 후 밤이 찾아왔을 때도 눈을 뜨고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욜란드는 단순히 앞을 보고 살아가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지나온 삶을 반추할 줄 아는 인간으로 자라난 것이다. 운명이 뒤바뀐 것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욜란드는 자신의 뒤바뀐 운명을 되짚어나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직시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끝내 삶의 벽에 부딪혀서 그 해답을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욜란드는 그리마에게 배운 대로 지나친 ‘그때’들을 지켜보기 위한 수행을 떠난다.

욜란드의 여행은 완전하게 용서를 위한 여행이다. 작가는 욜란드와 그리마 뿐 아니라 제일라와 니스, 데오그란트, 르네에게도 삶의 영역을 부여한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 이면에는 용서해야만 할 이유 역시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을 통해 가장 이해 받을만한 위치에 서 있다. 실상 그것을 사고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운명은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뒤틀리기도 한다는 것을, 욜란드는 부엉이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되짚어나가면서 배워나간다.
과거를 되짚어나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뒤돌아보기 위해서 가는 길은 걸음걸음이 가시밭길이다. 에드워드의 진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욜란드는 수많은 진심들과 끊임없이 마주친다. 데오그란트를 생각하는 니스의 진심, 제일라를 생각하는 데오그란트의 진심, 클라우드를 생각하는 제일라의 진심, 르네를 생각하는 메이슨의 진심……. 그리고 그 모든 진심들을 일관된 잣대로 평가하는 게 온당한가에 대한 의심까지 그녀의 사고는 확장된다. 그 어떤 인생의 결도 결코 하나가 아니다.
이윽고 그녀의 진심들은 ‘너는 늑대’라고 아서를 내치는 단호함 대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느린 걸음들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단호한 행동과 단정적인 말들이 아니라 무릎을 끌어안고 약한 어깨로 그리마를 부르며 눈물 흘리는 소녀의 몸짓으로, 여러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행위가 확장시키는 것은 연민이다. 단순한 동정이나 안쓰러움이 아니라 세상이 복잡 다난한 삶의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한 진실에 대한 연민이다. 그 연민은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척하게 만든다. 다양한 삶의 양태를 직시할 때에서야 싹트는 보드라운 감정이다. 그 연민을 갖고 나서야 욜란드는 다양한 삶의 결을 지키기 위해서 제일라가 아닌 왕을 공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죽어야 할 것은 그리마도, 클라우스도, 제일라도 아니다. 대리된 수많은 죽음들을, 그 죽음에 대한 이해를 등에 업고 나서야 욜란드는 자신이 걸었어야 했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이해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돌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부엉이는 밤에 눈을 뜨고 낮의 세계를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는 지혜를 가진 새다. 자신의 지나온 ‘그때’들은 결코 욜란드에게서 지나온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욜란드는 여전히 부엉이의 그림자로 존재할 수 있다. 그리마의 영혼도 데오그란트의 영혼도 심지어 제일라의 영혼까지, 욜란드라는 작은 여자는 자기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고 이 서사의 주인공으로 담대하게 걸어나가 스스로를 터벅터벅 위치시켰다.

소설 내부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마리만 제시된 채 끝까지 풀려 나오지 못하고 독자의 영역으로 남겨진 부분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신화나 동화 속 상징들의 바다에 내던져진 것 같은 서정적인 묘사들은 그 이야기들을 상상으로 메우기에 충분하다.
그림자를 생각한다. 돌아보기 쉬운 자리에 놓여있는 흔적들을, 하지만 결코 돌아보기 쉽지 않은 그 자리를. 삶의 갈림길에 서는 순간에 바로 뒤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그 용감무쌍한 부엉이를. 당신은 무엇을 꿈꿨고, 당신은 어디를 걸어왔는가. 당신의 그림자를 돌아보는 방법을, 여기 용맹한 부엉이 아가씨에게 배우길.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소설 안 그러면 아비규환 2013.05.31
이달의 거울 픽 118호 토막소개 2013.05.01
비소설 몸에 갇힌 사람들 2013.05.01
소설 2004 세계 환상 문학 걸작 단편선 1·2 2013.04.30
소설 부엉이 소녀 욜란드1 2013.03.30
이달의 거울 픽 117호 토막소개 2013.03.29
소설 종말 문학 걸작선 1·2 2013.03.29
이달의 거울 픽 116호 토막소개1 2013.03.01
소설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2013.02.28
소설 7인의 집행관 2013.02.28
소설 7인의 집행관 2013.02.28
소설 오픈 2013.02.28
소설 부엉이 소녀 욜란드1 2013.02.28
이달의 거울 픽 115호 토막소개 2013.01.31
소설 그림자를 돌아보는 법 - <부엉이 소녀 욜란드> 2013.01.31
비소설 겁스 무한세계 : 악마가 고양이의 죽음을 알기 전에 2012.12.28
소설 죽음을 부탁하는 상냥한 방법 : 2012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2012.12.28
이달의 거울 픽 114호 토막소개1 2012.12.28
소설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1 2012.11.30
소설 무랑가시아 송1 2012.11.30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