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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
앤윈 외, 환상문학웹진 거울 , 2012년 7월

편집장 주: 이 글은 텍스툰 1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거울 독자분들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어 텍스툰 편집장 한별님과 글쓰신 김병철님께 양해를 구하고 가져왔습니다.


리셋버튼이 필요한 당신에게
: 여정을 떠나기까지의 키워드로 본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


 세상은 우리가 눈치 채든 그렇지 못하든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을 스쳐지나가면서 부딪히기도 하고, 합쳐지거나 나눠지기도 하며 전혀 예기치도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기도 한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몸을 쥐고 흔들며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런 막연한 기분에 한 번이라도 자신을 던져본 사람은 내가 붙잡지 못했을 그 수많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무언가 새로운 게 내 안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맛본 적도 있을 것이다. 선집 내에서 여기에 관련된 작품을 찾아보자면 {되살아나는 섬}을 들 수 있겠다.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무당이거나 일반인인 것이 아니라 무당이면서 일반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 인물들은 자신이 조금씩은 변해가고 있고, 그리고 그 변화가 정말 우연한 계기를 통해 탄생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거대한 사건이 되는 걸 차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플롯은 큰 의미가 없다. 인물들이 무당이 되는 건 어떤 계기가 결정지어준 게 아니라 많은 사건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변화의 논리는 큰 한 줄기의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작은 메타포들의 축적인 셈이다.
 좋든 싫든 언제나 인간은 세상의 메타포들을 빨아들이고 조금씩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 변화의 양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계단인 것이 아니라 아주 꾸준히 위로 뻗어나가는 사면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선의 모양으로 놓여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직선적으로 놓인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순간이, 비록 자기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선 지점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 있다. 그 변화가 현저해지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바로 이전 순간의 나와는 다른 새로운 나이며,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새에 계속해서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 지속의 끝에(혹은 맨 앞에), 탄생이 있다. 우리는 어쩌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 별난 의미의 탄생을 이루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철학자(Henri Bergson,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선적이지 않은, 존재의 '지속'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진화론적으로 해석.)의 논리는 이렇지만, 그리고 세상이 담고 있는 풍부한 알레고리들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에 어느 정도 머리로는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살다보면 저런 논리가 아니라 리셋 버튼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종종 오기도 한다. 그 기대감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아주 기분 좋고 설레는 일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되어간다는 것이 잘 와 닿지 않는다. 알량한 기대감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만큼 지금의 자신에게 변화가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엄습해올 때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음악이나 듣고 카페인이나 섭취하면서 리프레시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내가 앞으로 지새워야 할 밤의 수와 내 현재 상황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꼽을 때마다 답답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알레고리가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나를 감싸던 기대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막막한 고리 안에 던져진 채 영영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몸을 감쌀 때도 종종 있다. 그럴 기분에 사로잡힐 때면 “우린 그래도 하루하루 더 변하고 나아가고 있다” 같은, 머리로 하는 말만으론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린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 위로받지 못하는 기분을 억지로 달래면서 좀 더 낙관적으로 마음을 먹어볼 것인지, 아니면 당장 내 몸을 격렬히 비트는 고통과 함께하더라도 어떻게든 변해볼 것인지.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살면서 발견하곤 하는 선택지이다. 그런 선택지를 마주하며 사는 한 사람으로써,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은 여러모로 유의미한 단편집이다. 태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다시 태어나는 일은 자기를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더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선집은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태어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나는 것들을 노래하려 하고 있다. 기대감만으로는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이 들 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거나, 등을 떠밀어줄 만한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 선집에 담겨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태어남’의 과정들은 달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쓰기만 한 것도 아니다.


1. 흐르는 존재,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의미

 존재는 생명과 닿은 순간 경이가 존재를 개체화해, 다른 말로 한 생명이 한 존재를 개체로 존재하게 했다면 3,495,719,284개의 생명이 각기 존재가 닿은 순간 벌어질 일을 생각해볼 것을 촉구했다. 개체화된 존재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거부했다. (중략) 개체화된 존재는 마침내 사유를 마치고 수와 수 사이에는 무한한 수가 존재하기에 수로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답했다. -  101~102쪽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 고민이라도 해보려면 우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살아간다는 말, 흔히 ‘존재하다’로 치환되기도 하는 그 말은 대체 어떤 뜻일까? 인간은 누구나 중학교 때 즈음이면 존재론적인 고뇌를 겪곤 하지만, 그건 그냥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일 뿐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금 더 깊은 함의가 숨어 있다. 그 함의에 대해 풀어내려 시도한 것이 위에 인용한 {무한과 무한 사이}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우선 무한이다.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의 무한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쉽게 감이 오지 않는 말이지만,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이 어떤지를 고민해보면 답은 금세 나온다. 우리는 아주 편하게 존재 하나하나를 1부터 시작하는 숫자로 고정시킨다. 이를테면 참새 세 마리라든가, 학생 여섯 명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참새나 학생들의 본질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파악하기 쉬운 어떤 특징 같은 것으로 존재들을 한번 치환해버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존재들의 본질은 그렇게 알기 쉽게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존재이든 그 존재방식은 다른 존재의 그것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예컨대, 만 원짜리 지폐와 그것과 크기가 정확하게 똑같은 종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 둘은 물질적으로는 완전히 똑같지만 전자는 화폐로서, 어떤 다른 가치가 부여된 것이고 후자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이런 차이는 존재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 지폐와 종이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쳐도, 한국인 A와 백인 B를 비교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둘을 우선적으로 황인종과 백인종으로 구분하려고 들지, A와 B가 본질적으로 어디가 닮았고 어디가 다른지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들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분류하든 상관없이 다른 존재와는 너무나도 상이한, 그래서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을 내포한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존재들을 하나, 둘, 셋의 순서로 세어나가지만 사실 그렇게 세기보다는 하나의 무한과 다른 무한, 그리고 또 다른 무한으로 세어야 한다. 학생 여섯은 학생이라는 특징적인 대상 여섯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은 그 학생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결코 대상화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여섯 개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고, 우리가 어떤 수와 그다음 수 사이에서 우리가 0.1에서 0.000000…1로 향하는 무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이다.
 존재가 그런 모습이라는 걸 받아들일 때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했던 베르그송의 지속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미립자들이 대체 어디에 가서 어떻게 부딪치고, 어디로 나가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들끼리는 어떤 모양을 이루는지 우리는 대략적으로도 잘 알 수 없다. 큰 줄기만이 보일 뿐이고,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런 큰 줄기가 어떤 상태인지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줄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이런 존재론에서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건 상태에서 상태에로의 이행이 아니라 사실 흘러가는 그 모든 미립자들을 무의식 속에서나마 몸으로 맞아보는 일이다. 탄생은, 머리로만 재단되는 게 아니라 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하나의 계기가 있어서 일어나는 사건인 게 아니라 그 직전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그 순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는 구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탄생’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는 제법 거창한 것이다. 그건 새롭고도 고유한 존재방식을 가진 존재가 이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우린 우리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조금씩은 더 경외심을 품을 필요가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의 숫자로는 치환되지 않는 무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 무한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 의해서, 심지어 자기 자신에 의해서조차 하나로만 취급받는 데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고, 그래서 답답할 수밖에 없다. {무한과 무한 사이}는 그런 상태에 빠진 우리를 우의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말쑥하고 직선적인 3인칭 시점으로 우리 하나하나가 ‘개체화된 존재’임을 이야기해준다. 이것은 이미 산술이 아니다. 탄생의 시작은 여기다. 수와 수 사이에 무수한 소수들이 있듯이 여느 존재에는 우리가 결코 잡을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 친절하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지만 이 작품은 존재한다는 게 뭔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던져준다.  


2. 재탄생, 그러니까 길 다시 찾기

 센의 다리에 탈출의 흔적들이 새겨졌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벌써 도망쳐 나온 곳은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모래바람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센은 뜯어진 아랫단을 손으로 찢어냈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팔이 쓰리기 시작했다. 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센의 고향은 산이 많은 곳이었다. 산길의 덤불들은 예전에도 센의 다리에 유년의 흔적을 새겨놓곤 했었다. 그 흔적도, 햇빛도 진짜였다. (중략) 센은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36~37쪽


 사는 건 종종 길로 비유되곤 한다. 가야만 하는 여정, 거쳐야만 하는 관문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냄새, 색깔, 공기, 사람들 모두가 나를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을 보다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여정에서 무언가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걸 얻었다면 그건 길 위에서 받는 어떤 느낌들이 그 자체로 어떤 알레고리처럼 기능해서, 자신을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자신으로 변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가진 존재방식을 길 그 자체에다 비유할 수 있다면 탄생은 새로운 길이 열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한 존재방식이 하나 생겨난다는 건 미답의 길이 하나 새로이 제시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은 각자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다. 여정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고 종종 어딘가에 부딪히곤 한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혹은 돌파구가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정말 이대로도 좋은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된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면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기도 한다. 재탄생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 일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는데, 자기변화로 가는 길에는 자기부정이 선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온전히 부정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로 갈 수는 없다. 이건 실존에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고, 자기 본질에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정말 온전히 자신이 원해서 걷고 있는 길인가? 여기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더라도 지금까지 걸어왔던 게 아까워서, 혹은 다른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별다른 수 없이 계속 자신이 선 자리에서 고민만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인간상을 우리는 이야기나 현실에서도 많이 봐왔다.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에는 자신이 선택한, 심지어 자기에게 주어지기까지 한 길을 파괴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위에 인용한 {히스테리아 선언}에 나오는 센이 그러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편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그 허위를 들춰내며, 나아가 그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인물이다.
 우리가 쉽사리 실존을 찾지 못하는 건 그게 실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닌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상기했듯이, 자기변화, 재탄생의 과정에는 자기부정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부정되는 건 사실 가혹한 일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틀린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때는 나를 이루었던 그러니까 스스로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부분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발견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여정을 시작하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백련}의 주인공과 {호접만장}의 주인공이 이런 말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자는 순순히 이를 긍정하고 자기 안에서부터 이를 극복해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이고, 후자는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오히려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준다. 단순히 ‘도사님’과 ‘아버지’에서 기인한 차이일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극단적인 반응의 차이는 그 명령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의지를 통해, 혹은 우연에 의존하더라도 어떻게든 이걸 해내고야 만다.
 이런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혹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길을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이 선집은 그런 고민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이 결코 헛되거나 무가치한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어쨌거나, ‘다시 태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느라 일차적으로 아프고, 그러고 나면 실존을 새로이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지독히도 힘든 일이겠지만 결국 그 여정 끝에 자신이 새로이 발붙일 길을 찾아낸다는 건 너무나 낭만적이고 멋진 이야기이다. 좀 뜬금없지만, 현대 독일철학의 한 조류인 현상학에서 ‘운명’이라는 표현을 대체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역운(Geschick)이라는 말인데, 이는 원래 ‘보내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schicken에 ‘모두’라는 의미를 갖는 Ge를 붙여서 명사화시킨 것이다. 말을 좀 풀자면, 역운이란 결국 어느 존재자를 어느 특정한 길로 보내는 보냄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 개념이 운명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좋은 점은, 지금 선 게 하나의 길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다른 길로 향하는 가능성 또한 그 존재자에게 인식된다는 데에 있다. 자신이 어느 길로 보내졌음을, 즉 자신이 어느 길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다른 길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다른 가능성 또한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이건 반대의 측면도 갖는다. 어느 특정한 길로 보내진다는 것은 역으로 그 길을 부정하지 않으면 다른 길로는 향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상상만으로는 그건 아주 적은 가능성에 머물 뿐이다. 리셋버튼은 어디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헤매면서, 스스로 잡아나가는 것임을 이 선집은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조곤조곤 일러주고 있다. 결국 우리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여기는 인물들은 자신이 어딘가로 보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길로 스스로를 내모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스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에 현실적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하등 문제될 것이 있는가?


3. 알레고리, 재편되는 세계와 풍경

 씨앗은 살아남을 것이다. 수많은 씨앗 중 하나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하나만 있으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위해서, 우리는 기다린다. (중략) 그런 날이 정말로 온다면, 바로 그날 세상은, 인간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땅과 바다는 더 이상 상처입지 않고, 사람과 자연은 햇살 속에 하늘을 향해 함께 자라나게 될 것이다. - 303쪽


 만약 새로운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면, 그러니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리셋 버튼도 자기 명상도 아니라면 남은 건 알레고리의 문제가 된다. 자신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에 따라 존재는 주어진 길 위에서 안전하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거나 반대로 길을 똑바로 찾았다고 해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선집의 제목이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인 만큼 자기의 문제, 자기 주변의 문제를 벗어나서 이제 세상의 영역으로 탄생의 범위를 넓혀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어진 여러 상황들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이 세계의 재탄생에 관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해치고 나아간다, 는 식의 의지로만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머리로는 당연히 그렇지 않음을 알면서도 세계가 의지를 갖고 자신을 방해하는 듯한 상황, 혹은 자신의 가치가 세계와는 조금도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서 멀쩡히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거나 세상에 한 번도 어려움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 선집에 몇몇 작품 구조 내에서는 탄생이라는 테마와 얽혀서, 그런 세상과의 마찰이 걷잡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변신}에서 주인공이 세상과 느꼈던 가치의 차이나, {탄생}에서 주인공이 점점 이상한 수렁으로 빠져드는데, 그게 세상이 가지고 있는 논리와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점 등등.
 보통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를 막연한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 주변의 범위 정도만을 손에 쥐고 있지 범세계적인 무언가를 체감하거나 알지는 못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는 결코 체감되지 않고 알 수도 없지만 자기 자신이 세계 안의 존재인 한 계속 무언가 영향을 받고 그것에 따라 자신이 변화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아까 이야기했던 알레고리의 문제는 이런 맥락이다.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작용. 길의 비유에 이 상황을 놓자면 세계는 길 위에서 보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풍경은 평화로운 꽃밭이나, 마을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끝끝내 자신을 밀어내는 가시덤불이나 불바다일 수도 있다. 풍경이 자신에게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서 나는 거기에 용기를 얻기도 하고 거기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심지어는 대항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건 왠지 주변에서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 같다는 인상 정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생활고나 가난같이 클리셰적일 수도, 혹은 {씨앗}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운명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구도를 그리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씨앗}은 인물과 세계의 대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도만으로 보면 단순히 자기와 자기 주변의 세계, 즉 한정적 범위에서의 세계를 넘어서 세계 그 자체와의 대립을 그리는데, 그 안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단순히 길을 걸어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에 풍경을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여정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이 막혔을 때 그 원인이 자신이 고른 길이 잘못되었음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을 둘러싼 풍경을, 달리 말하자면 세계를 재편해야한다. 그게 실제적인 의미이든 아니면 자기에게만 의미를 갖는 상황이든 말이다.
 그럴 때 어떻게 세계 내의 자신을, 혹은 세계 자체를 재탄생시킬 것인가? 어디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어디를 세울 것인가? 세계가 나에게 주는 파괴적인 알레고리들을 어떻게 긍정적인 것이 되도록 할 것인가? 사실 이 문제는 전혀 알 수 없는 차원으로 빠지고 만다. 인물들의 부단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 알레고리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풍경을 뒤집었다고 해서 그 길이 나에게 온전히 다가올 것인가? 이는 미래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늘 상상과 현실이 분열된 채로만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이걸 기대라고 부르자.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것이 {씨앗}에서 보여주는 희망의 형태이든 아니면 {목소리}에서처럼 절망을 암시하는 것이든 세계는 어떤 형태로든 재편될 것이고, 그의 여정은 미완의 시간을 계속해서 써 나갈 것이다. 미완이라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했는데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길을 어그러뜨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탄생’이라는 키워드를 테마로 한 선집 [세상의 재시작까지 11억년]을 여정의 과정을 대입해서 읽어보았다. 어찌됐든 탄생이라는 말은 살아가는 이상 우리가 언제나 마주하는 일이다.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탄생도 그렇고, 그 대상이 자신이나 세계로 변용된다 하더라도 그 양상이 삶과 밀접하게 붙어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언제나 하나의 서사, 하나의 여정인 한은. 이 선집은 길이 막혔다면 한 번쯤은 들춰보고 싶어지는 선집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안에 있는 건 얼핏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뿐인 것 같지만 열한 개의 작품, 그 설정된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어쩌면 길을 나아가라는 테제에 가장 충실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길에 지금 용기가 없다면, 혹은 막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대와 노력을 안고 살아가는지 엿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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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12.06 15:04 댓글 수정 삭제
    파괴와 창조에 대한 통찰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논지가 점진적으로 개인에서 세계로 현실적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는 게 매우 즐겁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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