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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크로메가스

2014.05.31 23:0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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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메가스

볼테르, 이효숙 옮김, 바다출판사, 2011년 5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여기서는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볼테르에 대해 다루지는 않겠다. 그럴 능력도 부족할 뿐더러 환상문학 웹진이라는 매체의 성격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수록작들을 저자의 사상이나 철학을 설파하는 도구로 해석하려 애쓰는 대신 순수하게 콩트 형식의 환상소설 단편집으로만 다루도록 하겠다.
 저자에 대해서는 그저 계몽주의의 상징적 인물이며 종교와 낙관주의, 비이성과 불관용을 비판한 지성인이었다는 정도만 염두에 두고 읽으면 충분하다. 보르헤스가 서두에 언급했듯 수록작들은 [천일야화]와 [걸리버 여행기]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런 형식의 이야기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섞어서 쓴 일종의 ‘천일야화 패러디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멤논 혹은 인간의 지혜
 매우 짧지만 많은 내용이 담긴 단편. 전반부는 마치 [캉디드]의 단편 버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전개를 보여주다가 후반부에서 초월적 존재를 만나며 좀 더 직접적으로 작가의 주장을 드러낸다. [캉디드]보다 더 노골적으로 작가의 생각을 주입했다고 할까.

미크로메가스
 프로토SF로 보기에는 헐거운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나, 작가가 우주와 외계인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 아니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깐깐하게 따져가며 읽을 필요는 없다. 주된 내용은 시리우스 별의 거대 외계인 미크로메가스가 토성으로 가서 토성인과 만난 후 둘이 함께 지구로 와서 지구인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인데 [걸리버 여행기]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자기 식으로 패러디를 하고 있다.
 우선 거인의 관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며, 완벽하게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리기 위해 지구 밖에서 왔다는 설정도 그러하며, 이 거인이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지성과 능력도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득히 우월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인간이 오감밖에 없는 것에 비해 72감각을 지닌 토성인과 1000개가 넘는 감각을 지녔다는 미크로메가스가 지구에 와서 작다는 이유로 지구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고래를 겨우 찾고선 얘네가 지구의 주인이려니 여기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요즘 말로 ‘설정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인에 비하면 원자처럼 작지만 인간에게도 지혜와 이성이 있을 수 있음을 역설하며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무지와 야만에 가득한 문명을 풍자하기도 하고 우주의 중심이라 여기는 오만에 대한 비판도 적절히 들어갔다.
 그토록 크고 현명한 거인조차도 우주에서는 작은 존재이며 더 큰 존재와 신비에 대한 두려움과 의문을 품고 있다는 모습에서는 세련된 상대적 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우주적인 시야를 보면 SF의 역사에 이 작품을 끼워 넣는다 해도 좋을 것 같다.

백과 흑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로 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다. 여기서는 각각 선과 악을 관장하는 한쌍의 수호천사가 젊은이를 모험의 세계로 이끈다. 하지만 젊은이는 애석하게도 자신에게 펼쳐지는 우연과 기적이 이들이 제공해준 것이었음을 모든 일이 끝난 후에나 알게 된다. 즉 자신에게 닥쳐온 선택의 순간 어느 쪽이 결과적으로 득이 되고 해가 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골라야만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인생이 늘 그렇긴 하지만.
 애석하게도 천일야화의 많은 이야기들과 달리 주인공 루스탄은 득이 된다고 생각한 선택의 결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고, 희고 검은 존재(본문에선 귀신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외모나 역할이 서구의 만화나 영화에서 주인공의 상상 속에 등장해 각자 자기 말을 들으라고 설득하는 두 수호천사와 판박이다)에게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기적의 이유를 알게 된 후 이야기는 뜻밖의 반전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독자라면 피식 웃거나 화를 낼 클리셰의 향연이지만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겠다. 다만 당대 상황이라면 그렇게까지 진부하거나 열 받을 전개는 아닐지도 모른다. 가령 [구운몽]이나 [홍길동전]도 창작 당시에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흥미로우며 기발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을 것 아닌가.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세상 모든 소설을 쓰인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면 늘 새롭고 신선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감수해야 하는 현대 독자의 손해라고나 할까.

바빌론의 공주
 표제작은 아니지만 단편집의 절반을 조금 넘는 분량에 재미도 있어서 대표작으로 내세울 만하다. 외형적으로는 역시 [천일야화]의 일부처럼 여겨질 정도다.
 공주를 차지하기 위한 왕들의 경쟁 → 진정한 배필의 등장 → 운명과 오해의 방해로 헤어진 연인 → 연인 찾아 삼만리 → 결국 재회하여 해피엔딩
 이러한 도식적 플롯은 스포일러고 뭐고 따질 것도 없이 정형화되고 예상 가능한 수순으로 진행된다. 다만 여기서는 도망(?)치는 쪽이 왕자(신분은 양치기이나 여성이 바라는 완벽한 남성상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왕자님’이라 할 수 있다)이고 쫓아가는 쪽이 공주라는 점이 [천일야화]와 비교하면 이례적이며 만날 듯한 순간 서로도 모르게 안타깝게 스쳐 지나며 재회의 기회를 놓치는 장면은 오늘날 트렌디 드라마 뺨치는 전개라서 지금 읽어도 재미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이채로우며 주목할 부분은 포르모산테 공주와 아마잔이 쫓고 쫓기듯(실제로 추격은 아니지만 내용상 그리 된다) 세계를 유랑하면서 보고 겪는 세상의 풍물이 매우 상징적이며 풍자적이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중동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며 등장하는 명칭, 풍물, 관습 등을 봐도 고대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그런데 아마잔과 공주가 인도에서 아시아를 거쳐 유럽을 돌아 다시 바빌론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에서 만나는 무대는 점차 문명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마치 공간과 시간 여행을 동시에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환상적인 장치는 보르헤스가 서문에서 지적했듯 ‘(천일야화에서 따온) 과거의 세상과 (볼테르 자신이 사는) 현재 시대를 병치’하려는 시도의 결과다. 따라서 독자들은 볼테르가 원하는 문명 비판과 사회 풍자를 어색함 없이 자연스레 흡수할 수가 있다.
 볼테르가 그린 갠지스 강 동쪽 나라는 자연과 공존하는 아름다운 현자들의 세상으로 그려지고, 중국은 화려하고 웅장하며 공정한 군주 덕에 태평성대를 이루는 선진국으로 그려진다. 대조적으로 이집트와 인도는 나라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도 탐욕스럽고 사악한 왕을 통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편 이들이 유럽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예외적으로 알비온(영국)은 지적인 이들이 많다고 호의적으로 그리지만 그 외의 유럽 각국은 기괴하고 사악하며 야만적이고 불친절하며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더구나 그 나라들의 사람과 풍습은 바빌론이나 중국과 달리 볼테르가 사는 현대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우회적이고 은유적 풍자를 위해 쓴 작품 속에 직접적인 비판을 삽입한 셈이다.
 마치 유럽인이 잘 모르는 동양의 나라를 편견과 오리엔탈리즘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유럽인인 볼테르가 유럽 자신을 그렇게 그려내었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물론 이러한 과도한 동양 칭송도 오리엔탈리즘(이 용어 자체는 비난이나 경멸의 뜻은 없다)에 포함된다는 비난은 유효하다.
 천신만고 끝에 재회하고 오해를 푼 연인은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너무 간단하게 구하고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후 말미에 붙은 저자 후기는 진심인지 비꼼인지 모르겠지만(아마도 후자겠지만) 볼테르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사료적 가치는 있어도 소설의 완성도를 위해선 없는 편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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