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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판 사나이
로버트 하인라인, 안태민 옮김, 불새, 2013년 9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1.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우선은 출판사 불새에서 펴낸 과학소설 걸작선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출판사의 탄생과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대표 스스로가 카페, 트위터 등을 통해 밝혔으니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또한 책의 장정, 번역, 편집 등에 아쉬운 점이 많으나 이 역시 대표의 해명, 정오표 공개, 앙케이트를 통한 수정 계획 발표 등이 있었으니 굳이 따지진 않겠다.
 다만 그런 전제를 감안하더라도 이미지를 상상할 여지가 없는 최소한의 정보만 담은 표지, 뒷면과 날개에도 작품 및 작가 소개가 전혀 없다는 점, 구입 가능한 경로가 몇몇 인터넷 서점으로 한정되었다는 점(현재는 조금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오프라인 서점에선 보기 힘들며 도서관에 신청해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등을 감안하면 새로운 독자가 우연히 책을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즉 처음부터 ‘살 사람만 사고 읽을 사람만 읽는’ 매니아의 수집품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봐야 할까. 라인업을 봐도 1950에서 60년대 SF이며 휴고상 수상작이라는, SF 팬덤에서만 환영할 만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SF를 첨단 유행으로 포장할 여지도 없고, 하인라인을 제외하면 작가 이름값으로 어필할 구석도 없다. 그렇다고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시리즈나 씨뿌사의 보르코시건 시리즈처럼 세련된 표지와 적극적 마케팅으로 독자층을 늘릴 능력도 없다. 너무 매니악하여 오히려 거대 출판사에서 꺼리고 1인 출판사에서 선택했음이 납득 가는 라인업이다. 선전을 빌겠지만 고전을 겪으리란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전제 덕분에 원했든 본의가 아니든 결과적으로 불새 대표는 확실한 데이터를 한 가지 입수하게 되었다. 바로 ‘레이블에 SF만 붙이면 무조건 팔리는 최소 권수’에 대한 가장 최근 수치를 알게 된 것이다(앞서 유통과 홍보가 열악하다는 문제를 언급했으니 실제로는 조금 더 팔릴 수도 있지만). 짐작대로 그리 높은 수치가 아닌지라 출판사 회생 기획을 독자에게 물어보거나 선금을 받는 회원제 전환을 시도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런 노력을 볼 때 쉽게 출판업을 포기할 생각은 아닌 듯하니 지금은 그저 독자로서 꾸준한 구매와 응원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실험에 가까운 불새의 도전이 결국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국 SF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임은 분명하다.

2. 간단 소개

 전술했듯 책 자체에도 작품과 작가 소개가 없는 관계로 짧게나마 소개를 하겠다. 물론 작가인 하인라인에 대해서는 유명한 작가이고 검색만 하면 관련 정보가 쏟아지므로 생략한다.
 『달을 판 사나이』는 1950년에 나온 하인라인의 첫 단편집으로 미래사(Future History) 시리즈에 속한다. 연표가 책에 수록되어 있어서 알 수 있겠지만, 창작 당시에는 미래라고 생각했던 2000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미 미래가 아닌 대체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소설을 통해 미래에 대한 상상을 펼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은 아쉽지만 현실과 픽션을 비교해보는 것은 과거 독자가 누릴 수 없는 우리만의 즐거움이 아닐까.
 서지정보에 레트로 휴고상 수상작이라는 홍보문구가 있는데 이 레트로 휴고상이란 휴고상이 제정된 1953년 이전 작품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뽑자는 취지에서 1996년부터 시작된 상이다. 50, 75, 100년 단위로 뽑기로 했기 때문에 1996년에 1946년 수상작을 뽑았고 2001년에 1951년, 2004년에 1954년 수상작을 뽑았다. 2014년에는 1939년작을 대상으로 레트로 휴고상을 뽑을 예정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2001년에 「달을 판 사나이」가 1951년도 휴고상 중편부문을 수상했다. 정확히는 단편집이 수상한 건 아니다(휴고상과 네뷸러상은 단편집 부문 자체가 없는데 세계환상문학상처럼 있는 경우도 있다). 레트로 휴고상이므로 당시의 평가가 아니라 후대의 평가라는 점을 참고하길 바란다.
 수록작 중에서 「생명선」은 『세계 SF 걸작선(아이작 아시모프 외, 고려원, 1992)』에 수록된 적이 있고 「도로는 굴러가야 한다」는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레이 브래드버리 외, 오멜라스, 2010)』에 「길은 움직여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바 있다.

3. 개별 작품

빛이여 있으라
 미래사 전체에 중요한 설정으로 등장하는 태양열 발전의 탄생을 그린 이야기. 우연인지 필연인지 과학자 및 사업가의 역경 극복이 본 단편집의 주요한 플롯을 이루고 있는데, 이 단편에서는 과학자가 거대 기업의 싸움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승리를 이루는 낙천적인 결말을 맞는다.

도로는 굴러가야만 한다
 H.G. 웰스의 중편 『훗날 일어날 이야기(H.G. 웰스, 페가나, 2013)』에서 처음 선보인 ‘이동도로’라는 아이템을 미국 전역에 적용한 전형적인 레트로퓨처(1950~70년대 상상한 2000년대의 미래상을 다룬 장르) 단편이다.
 작품의 이해에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이 단편에 대해서는 거의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하인라인은 보수 우파임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 보장을 중시한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하인라인의 우파 속성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노조는 열등하며 이기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고, 위기를 극복하는 건 수석 기술자인 주인공의 과감한 결단과 뛰어난 능력 덕분이다. 즉 소수의 도덕적이고 유능한 엘리트가 사회를 지도해야 한다든지 교통망과 같은 기간산업의 파업은 안 된다는 등 극우파의 신념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인물은 얄팍한 스테레오타입이 되었고 흥미로운 줄거리도 빛을 잃고 말았다.

달을 판 사나이
 있을 수 있는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쓴 글이겠지만 이제는 대체역사가 되어버린 최초의 달 탐사 이야기. 국가가 아닌 개인 사업가의 주도로 인류가 달에 진출한다면 있어날 법한 일을 당대의 상황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그려내었다.
 특히 달로 가고 싶은 주인공 델로스 해리먼은 개인적인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평생 번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건 물론이고 때로는 사기도 치고 협잡도 하면서 일을 추진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유리탑(로버트 실버버그, 움직이는책, 1992)』의 주인공 시몬 크럭도 사업가에 갑부이며 사재를 털어 외계인과의 교신을 희망한다는 점에서 해리먼과 흡사하긴 하지만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을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과 꿈의 실현을 위해 매진한다는 점에서 크럭은 해리먼보다 더욱 순수하고 숭고하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해리먼은 달에 가고 싶다는 꿈 외에도 달 개척 사업으로 얻을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야망과 탐욕 또한 갖고 있는 세속적 인물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해리먼이 꼭 추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오히려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해리먼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과 매력을 더해주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한편 해리먼이 하려 했던 봉이 김선달 같은 달 부동산 사업은 지금 실제로 있다. 미국의 사업가 데니스 호프가 1980년부터 달 대사관(http://www.lunarembassy.com)을 차려놓고 달 토지를 분양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세계 각국의 130만 명 이상이 구입했다고 한다. 당연히 아무런 효력도 법적인 근거도 없다. 사람들도 그걸 모를 리가 없건만 꿈과 로망을 파는 사업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2004년에는 한국 지사가 생겨서 언론에서도 다룰 정도로 잠깐 화제가 되었으나 생각보다 구매자가 없었는지 1년만에 철수했다고 한다. 호프가 이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읽었다면 여기서 영감을 얻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작가 하인라인에 있어서도 그가 얼마나 달을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는 시초가 되기도 한다. 하인라인은 이후에도 SF 역사에 남을 명대사인 “아빠, 전 달에 가고 싶어요.” “가려무나.”로 시작하는 『은하를 넘어서』, SF를 넘어서 경제·경영학에서까지 유명해진 경구인 ‘공짜 점심은 없다’를 퍼뜨린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등 달을 무대로 다룬 작품을 다수 남겼다.

위령곡
 「달을 판 사나이」의 속편에 해당하는 단편. 해리먼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달에 도시가 건설되고 우주여행이 실현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로 늙은 해리먼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최후의 시도를 한다.
 좀 더 순수하게 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술한 시몬 크럭과 더 닮아졌다고 볼 수 있으며 애잔한 결말이나 서두에 노래(혹은 시)를 소개하며 시작한다는 점에서 하인라인의 후기 단편 「지구의 푸른 언덕」을 연상시킨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밝히진 않겠지만 라이슬링은 꿈을 이루지 못했고 해리먼은 꿈을 이루었다는 차이가 있다.

생명선
 하인라인의 데뷔 단편. 세상에 없는 굉장한 발명을 한 천재 과학자의 짧은 흥망성쇠를 그렸다. 다만 발명품은 물론이고 그 원리와 기술까지도 발명자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는 점이 특이한데(보통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결국 알아내지 않을까), 미래사의 후기 작품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즉 미래사 전체에서 이질적이고 딱히 연결되지 않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가령 태양열 발전이나 월면도시는 미래사 전체에서 중요한 설정이니까 연대기의 일부로 충분히 기능하는데 이 단편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왜 미래사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을까. 필자의 추측으로는 작가가 나중에 작품들을 모으면서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창작했던 것들을 임의적으로 하나의 세계관에 끼워 넣다가 이리 된 것 같다. 이런 경우는 특히 연로한 작가들이 말년에 작품을 정리할 때 종종 일어나는데(대표적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와 마츠모토 레이지가 있다), 억지로 합치려다보니 설정에 모순이 생기거나 앞뒤가 안 맞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 단편의 경우 모순은 없으나 굳이 왜 있나 싶은 동떨어진 작품이 되고 말았다.

폭발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의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그 가능성과 위험성을 경고한 작품으로 SF의 미래 예측 및 경고 역할을 논할 때 본보기로 들 만한 단편이다. 우리의 실제 역사에서는 소설처럼 깔끔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으나 원자력을 통제하는 데 나름 성공하여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소설이 주는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처음부터 주제와 집필 의도가 분명해서 그런지 작중에는 원자력의 위험성을 다소 과장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없지 않으나, 일본 토호쿠 지방 지진으로 인해 일어난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피해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2014년 1월에 오염수가 아직도 유출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단편이 보내는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도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 2
  • No Profile
    잠본이 14.04.20 18:05 댓글

    실제로는 '위령곡'이 먼저 잡지에 발표되고 나서 '달을 판 사나이'가 프리퀄로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술적인 부분에서 좀 얼렁뚱땅하게 넘어가는 늙다리의 뒷동산 우주선 발사 모험담인 '위령곡'에 비해 '달을 판 사나이'는 여러모로 법과 경제와 과학을 총망라한 희대의 기업 드라마가 되어버렸(...)

    '생명선'은 기술 그 자체보다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들과 기존 조직들이 품게 되는 당혹감, 불신, 텃세 등등을 풍자한 게 아닌가 싶더군요. SF를 떠나 일반적인 우화 작품으로서도 읽을만하긴 합니다. 미래사에 끼워넣은 건 아마도 다른 작품들과 묶어팔기 쉬워서일수도 있고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애착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므두셀라의 아이들'에서 이 단편에 대한 오마주가 나옵니다. http://zambony.egloos.com/1959834

  • 잠본이님께
    pilza2 14.05.01 01:07 댓글

    '무드셀라의 아이들'을 안 읽어서 몰랐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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