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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보이스, 파워
어슐러 K. 르 귄, 이수현 옮김, 시공사, 2009년 1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1. 성인식

 동양의 대표적인 관습인 ‘관혼상제’도 오늘날에는 많은 변화를 맞았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지만 제사의 경우는 유교 쇠퇴와 서양식 사고 확산, 기독교 전파, 핵가족화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성인식은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고 없는 제도가 되고 말았다. 아시아 전역에서 쇠퇴하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해도 중국, 대만, 일본에서는 표면적이나마 시행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현대 한국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면 성인식의 역할을 대체하는 건 주로 고등학교 졸업식과 대학교 입학식이다. 물론 진정한 사회적 성인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대학교 졸업식이나 남자 일부에게만 해당되긴 하지만 군대에 다녀오는 것도 성인식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기도 한다(군대 갔다오더니 어른 되었다는 식의 언급은 클리셰처럼 흔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는 실제 연령이나 법률에 상관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술, 담배를 하거나 나이트클럽에 출입하는 등에 대해 용인하는 게 우리나라의 문화적 관습처럼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시즌이면 술집과 클럽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면에서 고교 졸업을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중학교 졸업식이다. 알몸 졸업식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거듭 화제가 되었던 중학교 졸업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역시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 때문이다. 중학교를 졸업한다는 건 사실상 험난하고 암울한 시기인 고등학교 생활로 들어가야 하는 입구이기에 전혀 즐겁고 축복받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젊음의 활기와 자유로이 놀고 싶은 마음을 분출할 길 없는 아이들은 졸업식을 마지막 해방의 순간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그러니 알몸 졸업식을 나쁘다고 비난하고 억압할 게 아니라 그 쌓였던 에너지를 밝고 긍정적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졸업식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주는 게 사회와 어른들의 역할이 아닐까.
 원시 부족사회의 성인식은 어렵고 험난한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유독 알몸이나 폭력 등 물의를 빚는 이유도 이러한 부족사회 성인식의 전통에서 해석해보면 흥미롭게 여겨진다. 또한 고교 졸업도 단순히 연령이 20세가 되는 것 말고도 그만큼 길고 힘겨운 수험생 시절을 겪어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제 리뷰 대상으로 돌아가자. 왜 갑자기 소설의 리뷰에 앞서 한국의 성인식 문화를 얘기했냐 하면 바로 이 [기프트], [보이스], [파워] 연작이 다루는 중요한 테마가 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것, 성인식, 즉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무대 서부 해안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독특한 능력을 쓸 수 있다. 보통은 새를 부르거나 하는 소소하고 작은 힘이지만 극소수는 강력한 마법과 같은 능력을 지니기도 하는데, 바로 [기프트]의 주인공 오렉의 혈통은 타인의 목숨을 앗을 수 있는 위험하고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이 대대로 영지를 다스리곤 한다.
 이 작품에서 이러한 능력은 보통 열 살 정도부터 쓸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능력을 구사하게 된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며 성인으로 대접받게 된다. 원시부족에서 시련을 이기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 성인으로 대접받는 것과 흡사한 이런 과정은 바로 성인식에 다름 아니다.
 오렉이 우연히 능력을 구사한 후에 말을 탈 때 아버지에게서 잔소리를 듣지 않는 걸 보고 스스로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대접받음을 깨닫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성인식을 치른 아이의 반응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붉은 망아지를 타도 되느냐고 물었다. (중략) 나는 아버지가 소 떼를 피해야 한다거나 달린 다음에 걷게 해줘야 한다는 잔소리 없이 망아지를 타도 된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열세 살의 남자가 아니라 열세 살의 소년이었을 때나 할 법한 잔소리였다.
 ─ 기프트, 103~104쪽

 하지만 오렉은 쉽사리 성인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능력의 발현이 또래들보다 훨씬 늦었을 뿐더러 처음엔 자신의 능력임을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보이기를 꺼린다.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는 자신의 능력을 혐오하는 오렉의 마음은 성장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어른이 되기 싫은(혹은 무서운) 사춘기의 흔들리는 마음 그 자체다.

2. 기프트

 서부 해안 3권 모두 처음부터 영 어덜트(YA) 장르로 나온 글이라고 하지만 르 귄의 독자에게 유난히 이색적인 글은 아니다. 사실 어스시 시리즈도 넓은 의미에선 청소년의 성장 이야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게드, 아르하, 알렌, 테하누로 바뀌면서도 늘 어스시 연작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인물들을 그려왔다. 서부 해안 연대기 역시 전작의 주인공이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새로운 주인공의 성장담을 지켜보거나 도와준다는 이야기의 얼개가 동일하기에 오랜 독자들은 친숙함을 느낄 것이다.
 반면 청소년 소설을 기대한 평범한 10대에게는 조금 무겁고 지루한 글일 수도 있다. 잡지 [판타스틱]이 남긴 유행어 ‘소설의 끓는 점’을 대입하자면 끓는 점이 비교적 늦은 편이라고나 할까(어지간한 10대는 책의 두께만 보고 질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무래도 재미나 자극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초반을 버티기가 힘들지 싶다. 필자는 [기프트]의 끓는 점을 5장의 후반, 갑작스레 나타난 뱀이 죽는 순간으로 보고 있다. 오렉의 능력이 발현되었다고 인정한 주위 사람과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오렉. 그로부터 사건의 속도가 빨라지고 인물들의 갈등이 가속화된다.
 아주 잠시 우쭐했던 오렉은 고집스레 능력을 다시 쓰길 거부하고 결국 산을 폐허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눈을 가린 오렉.
 하지만 진짜 갈등은 뱀을 죽이고 뒷산을 초토화시킨 게 정말 자신이 한 일인지 여부다.
 결국 오렉은 자신의 진짜 능력을 뒤늦게 깨닫는다. 약간의 미스터리 요소가 들어간 이 능력에 대한 수수께끼의 해답의 실마리는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그리아가 내놓는다.

 “어쩌면 처음에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쓰는 거였는지도 몰라. 치유를 위한 거였는지도.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걸 무기로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렇게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방법은 잊은 거야……”
 ─ 기프트, 254쪽

 [기프트]가 말하는 잘못된 재능 이야기는 간단히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부모가 강요하는 진로와 자기 자신의 적성(혹은 꿈) 사이의 갈등을 다뤘다고 요약할 수 있다.
 제목의 기프트=선물은 혈통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본인이 원하지 않은 능력은 적어도 오렉에게 있어 선물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짐이요 가문의 뒤를 잇기 위해 인생을 바치도록 떠안은 빚일 뿐이다.

 “싸우지 않으면 지배당하고, 혈통이 끊기니까. (중략) 선물이란, 능력이란 그걸 위해 있는 거야. 영지를 지키고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게.”
 ─ 기프트, 19쪽

 오렉이 받은 진짜 선물은 스스로가 끌리고 선택했던, 후천적으로 물려받은 능력이었다. 노작가는 젊은이들에게 부모가, 타인이 부여하고 강요하는 인물이 되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보이스

 전작 [기프트]가 작고 폐쇄된 사회 속에서 한 아이의 고민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반면 [보이스]는 더 커다란 하나의 국가 전체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침략당해 식민지가 된 도시국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시 자유를 되찾는 과정과 혼란을 지켜보게 되고 그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사회와 자신의 성장을 동시에 이루게 된다. 시간적으로는 [기프트]의 소년, 소녀가 성인이 되었고 부부가 되어 초반부터 계속 중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소년이던 게드가 성인이 되어 알렌을 돌보는 [머나먼 바닷가]와 흡사한 구도이므로 르 귄의 독자라면 익숙할 것이다.

 [기프트]에서는 오렉의 능력이 진짜인지 여부가 핵심 수수께끼인 것처럼 [보이스]에서는 우물에서 솟는 샘, 신탁이 담긴 의미(신탁의 진위 여부까지)가 수수께끼로 등장한다.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이 되지만 완전한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 게 이 작품의 주요한 특징인 것 같다. 특히 어리고 미숙한 화자의 1인칭 화법 덕분에 작품이 품은 몇몇 수수께끼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기프트]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구현된 것 같으나 [보이스]는 도가 지나쳐서 답답함까지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기프트]가 부모와 보금자리를 떠나는 독립을 통해 성장을 이룬 반면 [보이스]의 메메르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그려 거의 대조적인 방식의 성장을 그리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시련을 통해 용기와 도전과 같은 덕목을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4. 파워

 3부작의 완결편인 [파워]는 앞의 두 작품과 약간 다른 구성을 갖고 있다. 우선 4부로 이루어진 가비르의 긴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에트라의 노예 생활 - 숲의 자유민 - 고향인 습지 - 종착지 메순 순서로 무대가 크게 바뀐다는 점도 그렇다. 전편들은 시간의 변경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파워]는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의 변경과 확장이 큰 특징이다. 역마살이라도 낀 듯이 다양한 장소를 이동하는 가비르는 고향을 떠나는 오렉, 고향이 해방을 맞으며 새롭게 변하는 메메르와는 다른 방식의 시련과 도전에 임하게 된다.
 즉 오렉은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나서며 끝나고, 메메르는 자신이 있는 곳이 새롭게 거듭나며 끝나는데, 가비르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내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즉 앞의 둘이 새출발과 함께 성장을 이뤘다면 가비르는 종착지에 이르러서 이루었다는 부분이 특징이다. 시리즈 전체의 끝이기도 한 [파워]의 주인공이 많은 곳을 헤매다 안주하며 끝나는 게 인상적인 이유다. 물론 전편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환경과 시련을 맞이하고 이를 극복해내며 한 단계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이러한 구성의 차이 덕분에 세 편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동적인 이야기가 되었는데, [파워]가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네뷸러 상을 수상한 건 이렇듯 읽는 재미가 가장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서부 해안 연대기 전체에 대한 평가를 담아 완결작이라 할 수 있는 파워에게 상을 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5. 문학에 대한 사랑, 종이책에 대한 경의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이 서부 해안 시리즈가 2000년대에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노작가가 청소년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건 시, 노래, 소설,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며 종이책에 대한 한결같은 경의이기 때문이다.
 오렉이 스스로 눈을 봉했을 때도 읽으려 애썼던 게 책이며, 버려지고 금지되었음에도 메메르가 몰래 찾아서 읽은 게 책이고, 힘든 노예 생활과 그보다 더 힘든 도피 생활 속에서도 보물처럼 부적처럼 가비르가 소중히 품고 있었던 게 바로 책이다.
 문학의 위기와 종이책의 소멸을 말하는 시대에 문학과 책에 대한 고집스런 사랑을 말이 아닌 작품을 통해 보여준 노작가의 집념과 애정이 말없는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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