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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세계 환상 문학 걸작 단편선 1·2
닐 게이먼 외 지음, 테리 윈들링·앨런 대트로 엮음, 백영미·이매진 옮김, 황금가지, 2003년 11월


pena (pena12@gmail.com)


 출처가 기억나지 않아 정확하지 않지만, 이 책이 나왔던 때에 황금가지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의 연간 장르문학 단편선을 계속 낼 계획이었다. SF의 유명한 편집자로서 도조와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하트웰의 [Year’s Best SF]가 [오늘의 SF 걸작선]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고, 도조와의 걸작선도 다른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번역되어 나오는 이변이 일어났었다. (이것은 좋은 이변이다!) [2004 세계 환상 문학 걸작 단편선]이라는 제목의 두 권으로 출간된 이 책 또한 앨런 대트로와 테리 윈들링이라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두 사람이 1년 동안 각종 잡지 등에 실린 환상문학과 공포문학 단편들을 망라하여 엄선한 선집이다. 1988년부터 이어져오던 환상문학선집인데 이들이 편집을 맡은 2002년부터는(한국 출간연도 때문에 2004라고 박혔지만, 원래는 2002년에 출간된 선집이다) 공포문학도 포함했고, 선정의 경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만 그런 거 알 리가 있나, 그저 ‘엄선’할 정도의 장르문학 잡지가 있고 ‘경향’을 내세워 선정할 만큼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고 부러울 뿐이다.


 이 책 출간 당시에 썼던 쪽글들을 들춰보니, 당시의 장르문학계에 대해서 이러한 정리를 해두었던 것이 있다. “최근에 필자는 장르 문학 중에서 최근 10년 안에 쓰인 글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가장 최신예 글로 읽은 것이 『멋진 징조들』인데, 이것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도 저 기준에 걸릴 것이나, 1990년 작이니, 벌써 때는 21세기가 오고도 5년에 가깝게 지난 것이다. 최신 소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의 대세는 아무래도 19세기 만세, 만만세가 아닐까 싶다.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이른바 퍼블릭 도메인이 소설 시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완역판, 최초 전집, 절판된 작품의 재간……. 순문학계에서는 여전히 신작이 베스트셀러인 반면에, 장르 문학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구절을 입에 달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약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3년은 더 안 좋아져서 순문학계도 신작보다 퍼블릭 도메인 만세인 세상이다. 2013년이 FTA 효력 발휘되기 전 마지막 기회라는 점 때문에 더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멋진 징조들』이나 『다이아몬드 시대』, 『쿼런틴』등이 출판되면서 SF 장르에서 최신작을 내기 시작해서 반가웠다는 말도 당시의 글에 있는데, 아마 저 작품들도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작품들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치면 요새 오히려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최신작이 들어오는 일이 더 많아졌다. 장르문학에 대한 고정수요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해서 최신작을 내주는 것이든, 아예 장르문학 팬이 관계자라서 내주는 것이든, 이미 낼 만한 과거의 걸작들은 다 내서 그런 것이든…… 아니, 마지막 이유는 빼자, 아직도 왜 안 나오는지 왜 안 소개되는지 이상한 작가와 작품들이 많으니, 어쨌든 이유가 뭐가 됐든 장르문학의 최신 흐름을 접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누릴 수 있는 호사인 건 분명하다.


 그럼 쓸데없이 긴 서두를 뒤로하고, 더 시도되었다면 좋았을, 그리고 사실은 우리나라 작품들만으로 이런 시도를 상업적으로 매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본보기인 [2004 세계 환상 문학 걸작 단편선]에 대해 이야기해보록 하겠다.


환상이 일상으로 침투하다

 단편집을 홍보하는 문구와 선정 의도를 밝히는 말에서는 이 책이 톨킨 류의 하이 판타지에서부터 마술적 리얼리즘, 신화적 소설, 공포 소설까지 아우르는 선집이라고 밝혔다. 과연 그러하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진 하이 판타지나 하이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많다면, 이 단편집에서는 일상이나 실제를 배경으로 해서 환상성을 투영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단편의 특성일 수도 있고, 작품 선정을 맡은 두 편집자의 의도일 수도 있다. 서사가 등장하기에는 단편은 분량의 한계도 있고 특성도 영웅보다는 일상에 알맞다. 또한 서사성이 아닌 일상성과 현실성을 투입함으로써, 환상 문학의 범위가 흔히 순문학이라고 여기는 부분까지 뻗어 나간 측면도 있다. 예전부터 판타지의 범위를 논할 때 골치가 되었던 작가들 중 하나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목록에 포함되면서 이 단편집의 범위는 무척 확장되는데, 아무리 뛰어나고 잘 쓰는 작가라 해도 장르 내의 잡지, 장르 내의 판매가 우선인 많은 작가들에 비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반 대중이 우선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편집의 첫 작품이어서 영화제로 치면 개막작이라고 할 수 있는 켈리 링크의 「달래기」와 같은 경우, 논리적인 순서와도 상관이 없고 스토리조차 모호하며 액자 속에 또 액자가 계속 들어 있는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장르에서 보여 주던 패턴과 서사보다는 현대 문학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달래기」보다는 정도가 훨씬 덜하지만, 의식의 흐름 수법이나 상징을 능숙하게 다룬 작품들, 그리고 여성적인 서사를 자연스럽게 표출한 작품들이 모여서 『2004 세계 환상 문학 걸작 단편선』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뒤에서 말할 기회가 오겠지만, 이것은 확장인 동시에 후퇴이자 시대의 흐름이었던 듯하다.


역사성과 시대성에 근거한 다양성

 두 번째로 이 단편집에 포함된 작품들을 보면서 두드러지게 느낀 두 가지 특성이 역사성과 다양성이다. 일단 다양성의 경우에는 이 단편집에서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작가들의 국적 역시 영미권 외에 노르웨이, 독일, 일본, 유고슬라비아 등 가지각색"이란 말이다. 또한 작품의 길이나 형식도, 단편선이라고 말은 해 놨지만 시가 심심치 않게 섞여 있으며 에세이도 한두 편 실려 있다. 소설보다는 동화에 가까운 작품도 있지만, 그 구분은 쉽지 않은 데다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그래, 확실히 이 단편집은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작가가 쓰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성찬이다. 게다가 "영미권 외에" 라고 말해 놓긴 하였지만, 사실 영국과 미국의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도 많이 다르고, 미국의 작가들 중에서도 자신의 배경을 잊지 않은 흑인, 인디언, 히스패닉 계열이 쓰는 글은 백인 작가가 쓰는 글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은 그런 면에서 자신의 출신, 자신의 뿌리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다양성이 역사성과 연결되는데, 각각의 단편들은 기독교에 억눌려 왔던 고대의 신화, 전설들을 되살려 낸다거나(제프리 포드의 「녹색 말」, 「창조」, 멜리사 하디의 「아퀘로」, 크리스토퍼 파울러의 「녹인」등), 종교 이전의 주술성을 되살린다거나(엘리자베스 핸드의 「가장 낮은 패」, 밴틀리의 「마야 엄마」 등), 선대의 유산과도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나 서사시, 동화 등에서 자양분을 얻는다거나(셰인 벨의 「시부르의 탑들」, 톰 디시의 「헨젤, 회고, 또는 소아 비만의 위험성」, 트리시나 잭슨 애덤스의 「일곱 켤레의 쇠구두」, 재키 버틀리의 「유치원 아이들에게 시 읽어 주기, 애덤 로버츠의 「스위프틀리」, 로버트 필립스의 「백설 여왕」, 마거릿 로이드의 「다섯 편의 시」, 테오도라 고스의 「열두 꽃잎 장미」등. 공교롭게도 이 분류에는 시가 많이 들어간다), 아예 역사 환상으로서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나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숨겨진 이야기(그레이엄 조이스의 「코번트리 소년」, 제이 러셀의 「하이즈」, 셰인 벨의 「시부르의 탑들」 등)를 말한다. 이외에 특별히 분류할 수는 없지만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의 「멘도사 씨의 붓」이나 수전 파워의 「루프 워커」 같은 작품들은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각각 히스패닉, 인디언인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서 단편집에 풍요로움을 더한다. 여기에 공포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많은 작품들이 현대 문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킴 뉴먼의 「이집트 거리」, 테리 다울링의 「스티치」, 마이클 리블링의 「암갈 소년」, 칼턴 멜릭 3세의 「8월의 포르노」, 브라이언 호지의 「보금자리 본능」, 루시 테일러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등. 이 선집의 원제가 The Year's Best Fantasy & Horror 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사실 읽는 와중에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포 소설의 본령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포와 환상의 차이는 의도나 결과, 사람을 무섭게 하려 했느냐 또는 무섭게 만들었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일단 이 단편집에 실린 글들은 그렇다. 그렇다고 덜 무서운 건 아니지만.)을 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다양성은 작가들이 자신의 국적과 민족적인 뿌리를 잊지 않고, 드러내는 것에서 민족성과 역사성에 근거한 다양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스패닉 문화나, 인디언 문화나, 켈트의 믿음과 같은, 지금과 같은 세계 보편의 시대가 오기 전에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고유의 문화를 무의식중에,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찾고 탐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너무나 세계 문화적인 기반에 젖은 신선하지 못한(이 용어는 물론 필자 개인적으로 씹는 용어이다) 유럽에서는 역사적인 상흔을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옥타비오 파스는 『고독의 미로』에서, 멕시코란 나라는 신화적 자양분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현대 멕시코 혁명을 신화화했다고 지적했다. 역사 환상 소설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또한 현대 문명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환상을 이끌어 내는 작가들은 또한 현재 자신의 시대를 소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민족성, 역사성, 시대성을 아울러 '뿌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단편집에 실린 글들이 산만하거나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고 풍요롭게 머무를 수 있는 이유, 그 자체로 잘 쓴 작품일 수 있는 이유는 '뿌리'가 단단하기 때문, '뿌리'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뿌리가 자기 나라의 신화이든 역사이든 신화화한 역사이든 자신의 시대이든 간에.


양날의 검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일상성, 여성성이 부각되는 것, 뿌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 거장의 작품이 활발하게 재해석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고 시대의 조류인 듯하다. 그것은 또한 시대의 조류가 갖는 아쉬운 점, 문제점도 함께 떠안고 있다는 소리이다.


 이 시대에는 거장이 없다. 거인이 없다. 거대 담론은 없다. 정통적인 패턴과 서사를 가지고 이야기의 힘을 최고도로 이끌어서 감동을 이끌어내는 장르문학의 본령은 희미해졌다. 패턴과 거장을 섬세하게, 독창적으로 재해석해서 새로운 맛을 이끌어내면 본래의 맛도 살려 놓기는 어려운 법이다. 뭉툭하고 거칠거칠하고 유치할지라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은 빛을 잃었다. '힘'이 없다. 소소하다.


 수록작들을 보면서 머릿속에서는 저런 말들이 왔다 갔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단편집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요즘의 경향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 이 단편집을 통해 구체화된 것일 테지만.


 그래도 마지막 변명거리는 있다. 이러한 뒷면의 미비한 점조차도 단편이기 때문일 수도, 편집자의 선정 의도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잡설을 거두고 말하자면 나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다수에 감동받았다. 때로는 글솜씨에, 때로는 발상에, 그리고 때로는 그냥 다 읽고 나서 왠지 모르지만 가슴이 따뜻해짐에. 그리고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인, 뿌리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일까,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쓰는 판타지들이 저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참으로 엉뚱하고도 안이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글은 어른이 써야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단편집의 작가들은 적어도 삼십대는 넘은 사람들이다. 글은 마음의 거울이고 작가는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내놓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유리하다. 물론 젊은이만이 가능한 패기와 기발한 발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뿌리가 없는 발상, 발상 외에 다른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한 글은 사라진다. 빨리, 또는 서서히. 결국 문제는 장르의 존폐가 아니라 좋은 작품이 나오느냐 못 나오느냐에 있는 게 맞다면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환상은 아름답다. 뿌리를 단단히 내린 환상은 더욱더 아름답다.


 그러니까 너무 깨발랄 발칙한 것만 바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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