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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인도의 신화와 예술

2014.08.31 23:4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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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신화와 예술

하인리히 침머 지음, 조셉 캠벨 엮음, 이숙종 옮김, 대원사, 1995년

pena (pena12@gmail.com)


목차
제1장 영원과 시간
 1. 개미들의 행진
 2. 환생의 수레바퀴
 3. 인생의 지혜
제2장 비쉬누의 신화
 1. 비쉬누의 마야
 2. 존재의 물
 3. 비존재의 바다
 4. 인도 예술에서의 마야
제3장 생명의 수호자
 1. 뱀, 비쉬누와 부처의 후원자
 2. 신들과 신들의 탈것들
 3. 뱀과 새
 4. 뱀의 정복자로서의 비쉬누
 5. 연화
 6. 코끼리
 7. 신성한 강
제4장 시바의 우주적 환희
 1. '근본적 형상'과 '해학적 현현'
 2. 팽창하는 형상의 현상
 3. 시바 샤크티
 4. 위대한 주
 5. 시바의 춤
 6. 영광의 얼굴
 7. 세 도시의 파괴자
제5장 여신
 1. 여신의 기원
 2. 보석의 섬
제6장 결론



 하인리히 침머가 짓고 조셉 캠벨이 엮은 『인도의 신화와 예술』은 두 거장의 합작품과 같은 책이다. 비교신화의 권위자 조셉 캠벨보다 조금 더 앞선 세대의 인도신화 권위자인 하인리히 침머가 미완성으로 남긴 원고를 조셉 캠벨이 엮었다. 아무래도 엮은이인 조셉 캠벨의 영향 때문에 익숙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캠벨이 다루지 않는 예술품과 신화 사이의 관계, 즉 신화가 시각적으로 형상화되는 방법과 그 해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캠벨과 궤를 달리하는 명저이다.
 이 책을 목차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영원과 시간

 근대성, 즉 모더니티란 것은 서구적인 관념이지만, 서구의 사상이 온 세계에 퍼진 오늘날에는 모두가 알아야만 하고 사실 모두의 머리에 깊이 파고든 관념이기도 하다. 근대라는 개념을 역사 속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로 들어가면 순환적 역사관과 직선적 역사관이라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서구에서는 근대, 또는 현대를 역사의 종말 - 그 종말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궁극의 상태든, 혹은 정말로 종말을 향해서 치달아가는 파국의 형상이든 - 로 보았고, 동양에서는 열매가 지듯이 몰락하지만, 봄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가을, 겨울로 표현하는 것이 직선적 역사관이다. 그 반대인 순환적 역사관의 전형적인 예가 인도신화이다.
 가장 위대한 왕이라 자신하는 자에게 나타나 신이, 그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왕 중 하나일 뿐이며 감히 비유로도 사람 몸에 난 털 한 가닥만큼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 겸손을 가르치는 신화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신화가 독자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겸손보다는, 인도인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이 모든 것이 이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이며, 인간의 관념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우주관이 그 안에 숨어 있다.


  오, 제신의 왕이시여, 나는 우주의 무시무시한 종말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매 순환 끝의 모든 멸망을 몇 번이고 보았습니다. 그 두려운 때에 모든 단일의 원자는 용해되어 최초의 순수한 영원의 물로 변하며 그로부터 원래의 모든 것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창조들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서로 끝없이 꼬리를 물고 좇는 세계의 지나가는 시대들을 셀 것입니까? 그리고 뉘라서 넓고 무한한 공간을 통하여 각기 자기의 브라마와 자기의 비쉬누와 자기의 시바를 안고 나란히 존재하는 우주를 세려 들겠습니까? 누가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인드라들을 셀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한 인드라의 수명과 왕권은 일흔하나의 영겁을 지탱하며 일흔여덟의 인드라가 소멸할 때에 브라마의 하루 낮과 밤이 경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브라마의 낮과 밤으로 잰 브라마 하나의 존재는 108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브라마가 브라마의 뒤를 따르며 하나가 가라앉으면 또 하나가 일어납니다. 그 끝없는 연속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 브라마들을 세는 데는 끝이 없으며 인드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느 일정한 순간에 각기 브라마와 인드라를 품고 있는 우주들을 나란히 늘어놓아보십시오. 누가 감히 이들의 수를 셀 수 있겠습니까? 저 멀리 시야를 넘어 아득한 곳에서 수많은 외계의 공간과 여러 우주는 헤아릴 수 없이 왔다가 사라집니다. 부서질 듯한 작은 배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비쉬누의 몸을 이루는 셀 수 없는 맑은 물 위를 떠가는 것입니다. 그 몸의 모든 털 구멍 하나하나로부터 우주가 일다가 꺼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감히 그들을 헤아려보겠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그들 모든 세계, 즉 현재의 세계들과 과거의 세계들 가운데 있는 신들을 헤아려 보겠습니까?
 - 16~17쪽



마야와 창조, 현현

 마야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인간이 보는 세상이다. 인간은 그 마야를 실재라고  여긴다. 물론 인간에게 그것은 실재로 다가오며 그것을 겪어내게 만든다. 그러나 마야는 또한 비쉬누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 환상들은 인간이 자신에게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런 욕망을 공격하여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도 하고, 기쁜 환상이긴 하나 끝없이 순환해야 하는 굴레를 씌워주기도 한다. 요컨대 실재와 환상의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재와 환상의 속에서 비쉬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나기도 하고, 창조를 하기도 한다. 비쉬누는 만유의 대양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잔다. 그 안에서 꾸는 꿈은 또 다른 실재로서 존재하며 또한 그가 눈을 떴을 때 거기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된다. 이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단지 신의 하룻밤의 꿈에 불과한 것이며 그가 눈을 뜬다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일시에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은혜를 입은 성자가 아니고서야 일시에 사라져버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끝까지 그것이 실재라고 느끼고 살다가 죽겠지만, 우리는 이미 이 비쉬누의 신화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이것이 환상이라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에서 또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도 우리는 허상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마치 장자의 꿈처럼 의심이라도 해 보지 못하고 이것을 실재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 이것은 참으로, 창조주에 비해 볼 때 한 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존재를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면에 또다시 우리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린다. 우리는 마야라는 환상 안에서 갇혀서 살 수밖에 없으며 비쉬누에 비교하자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갖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비쉬누에게서 왔으며 그 안에 비쉬누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란 없다. 그런 것은 창조되었을 리가 없고 그러므로 존재할 리도 없다. 보잘것없는 인간인 나의 안에도 위대한 비쉬누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나는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약간은, 병주고 약 주는 듯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위대한 비쉬누의 하룻밤 꿈에 불과한 존재로써 그 의미가 자칫 작아질 수 있는 인간에게, 그러나 너에게도 비쉬누의 조각이 들어있다고 하여 살아갈 구실을 주는 것이다. 아니 살아갈 수 있는 긍지, 자존심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야에 질려 있다 하더라도 이 사실들만 깨달으면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가 내뿜는 호흡을 음미하며 그 호흡이 자신 안에도 있음을 감사하며, 또 체험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힌두의 신비주의 사상에서는 마야에 대해, 평범한 존재가 겪게 되는 환상으로, 세상의 유희이고 명랑하고 매혹적이며 카르마에 매여있지 않으므로 오히려 유해하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생명의 수호자

 비쉬누는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인도신 삼위일체 중의 한 신이다. 이 책에서는 조금 더 풍부한 이야기와 예술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의 주이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 그러나 그는 지고의 존재이면서도 모든 존재들의 기원을 받아들여 그 화신을 세계에 현현시키기도 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비해 친근한 존재이다.
 비쉬누가 서구적인 관념에서 조금 혼란스러운 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대극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쉬누는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며 파괴하기도 한다. 그는 인간의 화신으로 현현해서 뱀왕을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곳으로 내쫓기도 하나 자신의 동물로서의 현현은 뱀으로 표상하고 있다. 내쫓지만, 사실은 자신의 본질이다. 침머가 예로 든 예술작품들에 보면 폭력의 상징인 뱀왕을 무찌른 비쉬누의 현현인 크리쉬나와 발라라마에게서도 뱀의 상징, 나가의 상징이 발견된다. 또한 뱀왕을 무찔러서 그들의 종족을 어디로 쫓아내는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우주적 대양으로 건너가서 조용히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우주적 대양이란 앞에서 비쉬누가 그 위에 누워서 창조와 파괴를 수행하는 그 곳이다. 일단 그들은 어두운 면의 현현이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서 내쫓긴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 곳은 자신의 본질인 비쉬누가 있는 우주의 대양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본질인 비쉬누에 흡수되고, 인간들은 어두운 현현인 뱀족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된다. 목을 조르거나 그 머리를 밟아서 없애버리라고 하는 성경과는 판이한 차이를 보인다. 뱀은 쫓아내지지만, 사실은 가장 거룩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 비쉬누의 현현이 뱀이라는 것과, 뱀왕을 쫓아낸 크리슈나, 발라라마도 뱀왕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이 연결에서 나는 인도신화의 특징 중 하나인 연속성과 동일성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연결되어 있으며, 형상이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배격할 필요도 없고, 다만 중재하고 타협하는 선에서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 장에서는 비쉬누가 여신, 연화 등으로 형상화되어서 미분화된 세상의 이원성을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쉬누의 신화를 형상화한 예술작품들의 역동성과 다중성, 해석성에 관해 장을 할애한다. 사실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 이야기를 짧게 쓰는 것, 즉 단편을 쓰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것을 만화와 같은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것으로 바꾸려면, 그림 하나하나에 함축성이 들어가고, 그림과 글이 따로 떨어져서는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그 사이사이의 여백에까지 호흡을 조절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작품들은 비쉬누의 다양한 상징과 거대한 이야기를 단 하나의 평면 내지는 입체로 재구성했다. 한 장면에 모든 것을 구겨넣는 것이 아닌, 조화롭게 배열하고 약동하는 율동감을 넣는 것. 질감을 달리 하여 세속의 뜬구름 같은 마야의 향기를 표현하거나 돌처럼 육중한 무게를 표현하는 기교 면에서 이 책 또한 지극히 인도적이다.


자비와 우주적 환희, 잔인함

 인도 신화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도 그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바. 창조와 유지, 멸망의 삼위일체 중 멸망을 담당하는 신이자, 한 손으로는 잔인한 불을 휘두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공포와 자비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이다.
 시바는 남근의 주로서 그 신상으로서보다는 남근상인 링감으로 숭배되고 있기도 하다. 책에서 읽어보니 비쉬누와 브라마에 대한 우위권을 확보할 때에도 남근 속에서 시바가 등장하며 그 끝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파고드는 것,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근에 대한 상징,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요니라고 하는 상징, 성기의 결합을 상징하는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실제로 인간의 성기가 결합했을 때 자식이 생기는 것과 같은 생산력을 표상한다. 그래서인지 단순하지만 상당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상징물이 바로 시바의 링감인 듯하다.
 또한 시바는 고행자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머리를 풀고 있다. 크샤트리아의 단정한 머리와는 달랐다. 게다가 책 뒤에 있는 그림 중에서, 굉장히 큰 편에 속하는 그림에서는 시바가 머리를 잘라내는 모습도 있었다. 시바는 고행을 해서 해탈을 하고 싶어하나, 우주의 유지 때문에 할 수 없이 부부생활을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런 시바의 모습 중, 이 책에서 새로 알게 된 모습으로서는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고 환희의 춤을 추고 있는 시바를 들 수 있다. 이 광경을 보고 그의 배우자마저도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실제로 상상해 본다면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거대한 코끼리를 땅에 눕힌 시바는 그 가죽을 잘라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데다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것도 극히 일상적인 무표정으로 승리의 춤, 환희의 춤을. 이것이야말로 두려움과 매혹의 부조화, 또는 조화가 아닐까?


여신의 양면성

 여신이란 인도신화에서 생명력의 화신, 대지의 화신 같은 존재이다. 여신에게서는 생명력이 나오며, 그래서 두 명의 시바를 깔고 앉아 있는 여신의 그림에서 그것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인도에는 그보다 더 위대하고 혼란스럽고 매혹적인 여신들이 있다. 사랑하는 남편을 밑에 깔고서 혀를 낼름거리고 죽은 자의 해골로 된 목걸이로 치장하고 있으며 손에 온갖 무기를 들고 있고, 살풍경한 곳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이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형상들. 분명히 그들의 형상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이 표출하고 있는 탐욕스러움과 잔인함 때문에 그들은 또한 끔찍하다. 아름답게 숭배하기만 하는 대상이 아닌, 그야말로 양극을 다 가진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상을 들어보자면 그들은 모두 고고하고 여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다. 아테나와 같은 전쟁의 여신조차도 그러하다. 공정하고 지혜로운 전쟁의 화신인 아테나는 군복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여성적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인도의 이러한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여신상이 여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여신상들은 어느 여신상들보다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독특한 잔인성,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탐욕과 광기, 굶주림. 시바가 가진 잔인함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칼리가 시간이라는 뜻의 단어인 칼라의 여성형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의 특성이 이 여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탐욕, 광기, 자신이 낳은 것을 자신이 거둬가버리는 것, 그 파괴력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연약한 여성과 잔혹한 신, 탐욕과 수행, 대극이 만나는 참으로 원초적인 상징이 인도의 여신이 아닐 수 없다.


 구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언뜻 보아 이해하기 힘든 인도의 신화와 예술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는 안내서로 인정받는 책이므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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