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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스 실피에나

김성일, 도서출판 초여명, 2008년 2월

senyor (garleng@naver.com)



1. 들어가는 글

 1974년, 미국의 TSR 사가 <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초판을 내면서 처음으로 TRPG라는 유희가 생겨났다. 한국에서도 유학을 비롯한 미국 장기 체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걸 배워와 국내에서 플레이를 하며 80년대부터 TRPG팀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국내에 TRPG가 보급된 것은 1995년 커뮤니케이션 그룹에서 <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초중급 합본 룰북을 발매하고(그 전에도 기본 세트와 익스퍼트 세트로 분리되어, 박스 형태로 발매된 적이 있었다), 동시에 자사의 게임 잡지였던 <게임 매거진>에 TRPG 섹션을 개설해 룰과 관련 설정을 소개하고 플레이 기록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던전스 앤 드래곤즈>만이 아니라 일본의 TRPG 시스템인 <소드 월드>도 이 무렵 국내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TRPG 외의 즐길 거리가 늘어난 데다가, IMF가 터지며 한국 TRPG 시장은 다시 침체되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TRPG를 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남았고, 그 가운데 1997년 창립된 도서출판 초여명이 있었다. 초여명이, 딱히 당시까지 남아 있던 한국 RPG인들의 메카 역할을 수행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초여명이 라이센스를 받아 출간하고 있는 룰인 <겁스>는 그 때나 지금이나 특유의 세밀함과 방대함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룰이고,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각 팀들 위주로 돌아가는 TRPG 판의 구조적 특성 상 특정한 출판사 하나나 유명한 팀 하나가 메카가 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여명이 괄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1998년에 국내 최초의 TRPG 룰인 <라콘도리아 R.P.G>를 출간한 겨울가족 출판사가 공중 분해되고 그간 <던전스 앤 드래곤즈>를 국내 출간해 왔던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2000년에 폐업한 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TRPG 룰북 전문 출판사라는 위치 때문이다. 그러한 열악한 상황 하에서 초여명은 손해를 감수하며 번역 등의 다른 루트로 수익을 얻고, 그것을 룰북 출간에 투자했다.
 TSR 사를 위저드 오브 코스트 사가 인수하며 <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3판 룰이 나오고 그 핵심 부분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됨으로써 룰북이 없는 사람도 그를 보고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되고, 2004년에는 초여명에서 <겁스>의 국문 2판 룰이 나오면서 한국 TRPG 판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겁스>를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여전히 난점은 있었다. <겁스>는 단일한 한 가지 룰로 중세 판타지 물, SF 물, 이능력 배틀 물, 첩보 물, 역사 물 등의 온갖 장르를 모두 소화할 수 있게끔 한다는 취지에 더해 게이밍적인 단순화나 추상화를 가급적 배제한다는 지향성으로 인해 룰이 꽤나 방대하고 복잡하다. 그에 비해서, 어떤 배경에서 플레이할 수 있을 지를 지원하는 ‘배경 설정 자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지원이 빈약하다.
 이것은 컴퓨터 게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와 <네버윈터 나이츠 시리즈>의 배경으로 채택되어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배경 세계인 ‘포가튼 렐름’처럼, 유명한 캐릭터에 의존하는 마케팅이 불가능하며 개별 팀 내에서 배경 설정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서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제작사인 스티브 잭슨 게임즈도, 국내 출판하는 초여명도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어서 기본적인 룰을 확장하고 추가하는 ‘규칙 서플리먼트’에 더해 각 장르를 <겁스>로 플레이하기 위한 ‘장르 서플리먼트’의 출간을 병행하며 팀에서 배경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각 장르의 핵심적인 코드와 서사 관행, 대표적인 인물상 등을 분석하고 그것을 룰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를 상세히 다루는 방법론을 채택했다(이로 인해 <겁스>의 장르 서플리먼트로 나온 책들은 해당 분야의 작가나 전문가들의 충실한 감수를 거치게 됨으로써, 게임을 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장르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무난히 수행할 수 있는 준 교양서적 정도의 품질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제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스티브 잭슨 게임즈 측에서도 점차 레디메이드 상태의 배경 세계 설정 제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겁스 실피에나>(이하 ‘실피에나’)는 초여명이 자체 제작한, 겁스 플레이를 위한 배경 세계다. 지구로 치자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무렵 수준의 문명을 이루고 있으며, 마법과 괴물, 신비로운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피에나만의 특별한 점은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것들이 파괴된 후이며 살아남은 이들은 빈곤하고 힘겨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배경에 더해, <던전스 앤 드래곤즈>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갈등들과 이념적 대립,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충돌, 그 모두를 하나로 엮는 거대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이야깃거리가 충실하다는 점이다. 2.에서는 그를 가능케 하는 개별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작품에 대해

 이 설정에서는 크게 ‘제국’과 그에 속한 백작령이던 ‘실피에나’, 그리고 제국과 대립하고 있는 풍요롭고 강대한 도시 국가 ‘팔레나트’ 3개의 나라가 등장하고 그 중에서도 주된 배경은 제목에서도 나타나듯 실피에나다. 원래 실피에나는 제국 성립 이전부터 이 땅에 있었던 고대 왕국이었지만 제국에 흡수되어 백작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피에나의 주민들은 여전히 실피에나를 ‘우리나라’라고 불러왔다. 오랜 세월 가난하지만 행복한 역사를 이어온 실피에나는 흉년과 각지에서 빈발한 지진으로 인해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에서 당시 백작이 수석기사에게 살해당한 이후 각지의 귀족과 관리들이 남작을 자칭하며 군벌화 되어서는 이후 200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났다. 오랜 내전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실피에나 각지에서는 기아와 약탈,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피에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화산 ‘우르고로스’의 대분화와 더불어 절정에 달했다.
 이후 각지에서도 화재와 지진이 잇따라 일어났고, 고대 왕국 시절부터 이 땅에 있어왔던 각지의 유적에서는 용암이 솟아올랐다. 사상 최대의 흉작이 찾아올 것이 예상되었으나 각지의 남작들은 창고를 봉하고 저택에 틀어박혀 백성들의 원성을 외면했다. 더 이상 참다못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켜 영주를 살해했고, 내전 기간 동안 남작들이 고용한 용병들은 산적단으로 변해 마을을 약탈했으며, 유적에서는 용암의 뒤를 이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벌레를 닮은 괴물들-유적충이라고 부른다-이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했다. 화산 분화로 인해 살 곳을 잃고 쫓겨난 난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웃 영지로 향하고 이미 자신들의 문제로도 한계에 달해 있던 그 곳의 영지민들은 창칼로 난민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와중에서, 각각 실피에나의 동부와 서부에서 두 명의 ‘영웅’이 나타난다.
 한 명의 이름은 에르네스 사령관. 평범한 나무꾼이었다가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계시’를 받아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한 ‘백성의 나라’를 세운다는 이상 하에 탁월한 지도력으로 동지들을 규합해서는 혁명군을 창설했다. 에르네스가 이끄는 혁명군은 실피에나 동부 각지에서 백성들을 외면하는 남작들을 하나 둘 무너뜨리고서 백성들에게 땅과 식량, 자유를 주었고 결국에는 동부에서 가장 큰 군벌이었던 무라드 파라고스를 물리침으로써 거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루피나 실피엔 백작. 200년 간의 내전 시기 동안 제국 수도로 망명해 있던 실피에나 백작가의 정통 후예이며, 가문과 절연하고서는 팔레나트의 지원을 받아 휘하의 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남작들을 진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는 백성들에게 다시 나눠준 뒤 옛 수도였던 실피에니스에서 작위 계승식을 올려 200여 년 만에 다시 실피에나 백작부를 세웠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갈등과 대결 구도 가운데 가장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에르네스가 이끄는 혁명정부와 루피나가 이끄는 백작부, 두 세력 간의 대립이다. 책의 서술로는, 둘 모두 탁월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둘은 모두 내전과 남작들의 오랜 수탈, 지진과 화산 분화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 땅의 백성들에게 다시 평화와 번영을 되찾아 주고자 하고 있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백성의 나라를 표방하는 혁명정부와 옛 질서를 회복하고 안정을 가져오려는 백작부는 실피에나 땅 위에 공존할 수 없다. 두 세력 사이에서는 결국 ‘운하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충돌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보르스의 띠’라는 경계를 둔 채 현재 휴전 중이지만 여전히 서로 스파이와 밀정을 주고받고 있으며 언제고 다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그리고 백작과 사령관 둘 다 현재의 교착 상황이 장기화되어 실피에나에 두 개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피하고자 한다). 화산 분화의 여파로 인해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인 실피에나 중심 지역을 제외하고는 각각 실피에나를 양분하고 있는 이 두 거대 세력 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실피에나 설정의 가장 큰 줄기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수많은 다른 분열과 대립, 그리고 그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운명’의 흐름이 존재한다.

제 1장:역사와 문화
 이 챕터는 ‘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실피에나의 역사와 문화, 정치 구조, 산업 및 경제 구조, 그리고 마법과 종교가 사람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세계사를 통해 실피에나를 둘러싼 두 거대 세력, 제국과 팔레나트 간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오로라이트라는, 강력한 마력을 품은 특수한 광물에 대한 내용이다. 실피에나 각지에 있는 유적에서는 오로라이트가 대량으로 채굴되며 이 오로라이트는 팔레나트로 수출되어 팔레나트 마법사 조합의 강성함을 뒷받침한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팔레나트에게 위협을 느낀 제국은 결국 군대를 보내 팔레나트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패배했고, 팔레나트의 지배자였던 크리스토프 팔렌 자작은 당시 황제에게 책임을 면하려면 제국군 사령관이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폴로드 공작의 목을 손수 베라고 요구했고, 황제는 굴욕과 좌절감 속에서 그를 따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국과 황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팔레나트는 초강대국의 지위에 가까워졌다. 그 후로 세월이 흘렀으나 제국은 여전히 그 때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으며, 실피에나가 둘로 갈라진 지금은 팔레나트의 지원을 받는 루피나 백작의 반대 편에 있는 에르네스 사령관을 지원하여 오로라이트 수출량을 간접적으로 통제해 팔레나트를 약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제 2장:강산과 사람들
 ‘서부:늑대소굴’ ‘동부:올빼미 둥지’ ‘중부:고난의 땅’ ‘경계들’이라는 소제목들이 붙은 4개의 작은 챕터로 나뉘어 있는 부분. 루피나 실피엔 백작이 현재 지배하고 있는 실피에나 서부, 에르네스 사령관과 혁명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실피에나 동부, 우르고로스 화산을 중심으로 양대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무정부 지역이며 완충 지대인 실피에나 중부, 그리고 완전히 어느 쪽 소속이라고도 하기 힘든 세부적인 지역 및 군소 세력들을 다루고 있다. 각 지역 별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이야깃거리(RPG를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시나리오 거리’)들을 제시하고 있는 챕터로,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루피나 백작의 서부와, 에르네스 사령관의 동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이야깃거리들이 서로 대칭구조를 이루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서부의 경우 루피나 백작이 정식으로 실피에나 전역의 정통한 통치자임을 천명한 이후 계승식에서 그녀가 보인 장엄한 카리스마에 매료된 많은 옛 남작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이다. 하지만 오랜 내전에 잔뼈가 굵은 자신들과는 달리 안전하게 지내다가 외국의 지원을 받아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온 그녀를 무시하거나 불신하는 남작들도 많고, 몇몇 유력한 남작들은 상당히 구체적인 역모를 꾸미고 있기도 하다.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대체로 루피나 백작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지만, 루피나가 백작으로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기 영지에서 폭정을 행해 온 남작의 지지를 받는 조건으로 지금까지의 폭정을 눈감아주고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백작도 믿지 못할 여자다’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농업과 목축업을 통해 성장해왔던 지방이 급격히 산업화되고 분업 및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신식공방들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상공업자들이 대립을 빚고 폭력배를 고용해 서로의 공방을 사보타주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늘어난 도시빈민들이 사회 문제가 되는 중이다. 시야를 넓게 보자면, 루피나의 백작위 계승을 지원하고 군사를 빌려줬던 팔레나트는 이제 슬슬 오로라이트 수출에 매겨지는 관세를 폐지시키려고 하는 등 그동안의 ‘투자’를 회수하려는 참이다.    
 그에 비해 동부의 경우, 에르네스 사령관은 옛 남작을 비롯한 영주와 귀족들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시민화’를 강제했다. 에르네스 사령관은 궁극적으로 실피에나를 백성들의 자치적 공동체들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만들어 가고자 하지만 옛 남작들 대부분이 평범한 시민이 되거나 죄질에 따라 처벌을 받은 지금 하층민들과 부유한 상공인 및 부농 간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에르네스 사령관은 스스로가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지도자일 뿐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시민이라고 여기지만 그 동안의 오랜 관습에 너무 익숙해져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에르네스를 ‘성군’이라고 부르며 ‘자비롭고 현명하게 자신들을 다스려주기를’ 원하고 있기도 하다. 반대 방향에서의 문제도 있다. 옛 남작들이 모조리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소수는 내전으로 인해 상황이 나쁜 가운데에도 온건하고 관대한 통치를 폈다. 하지만 혁명군이 드넓은 동부 각지에서 발호하던 혼란 도중 그런 ‘좋은 귀족’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던 옛 가신이나 영민들 많은 수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으며 이제 그들은 망령이 되어 일어나 출몰하고 있다. 시야를 넓게 보자면, 그간 혁명군을 지원해 온 제국 황실은 팔레나트를 견제하고 혁명 정부 내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한 공작을 펴고 있다. 

제 3장:비밀들    
 이 챕터에서는 오늘날의 실피에나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오직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그리고 실피에나를 배경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플레이어들도 처음에는 모르는 걸로 시작하게 되는 실피에나의 진정한 숨겨진 비밀들이 제시되어 있다. 세간에는 그저 강력한 마력을 품은 마법광물이라고만 알려진 오로라이트가 원래 무엇인지, 최근 유적에서 나타나 광부들을 습격하는 유적충들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사령마법을 처음 만들어낸 고대의 전설적인 대마법사 ‘베르톨’이 남긴 유산이 현재의 실피에나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작부와 혁명정부 양쪽 모두에 스파이를 심어둔 채 실피에나 전역을 배후에서 조종하고자 하는 음모집단에 관해서도 나와 있다.

제 4장:캐릭터
 실피에나를 배경으로 게임을 할 때 쓸 수 있는 캐릭터들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반쯤 완성된 캐릭터 예시들이 실려 있는 챕터. 실피에나에 인간 외의 다른 종족으로는 무엇이 있으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인식은 어떠한지, 언데드와 실피에나에서만 볼 수 있는 괴물들로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내용도 아울러 다루고 있다.

제 5장:물품과 서비스
 실피에나의 전반적인 기술 수준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더불어서 내전과 흉년, 자연재해로 얼룩진- 모든 것이 빈곤하고 피폐하다는 실피에나의 특징에 맞춰진 여러 특이한 약초와 독, 무기와 갑옷, 기타 장비와 서비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 또한 실피에나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발생적 마법물품’에 대한 룰이 실려 있다.

제 6장:동물과 괴물
 실피에나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짐승들인 비늘개와 바위산양의 설정 및 데이터, 그리고 유적충과 독특한 괴물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

제 7장:캠페인
 실피에나를 배경으로 TRPG를 하기 위한 조언과 가이드라인, 그리고 실피에나 설정의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의 본질과 그것을 게임 상에서 어떤 룰로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3. 나오는 글

 개인적으로 이번 리뷰를 쓰면서 약간 고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써서 거울에 투고해 온 <겁스:사이버펑크>, <겁스:무한세계>, <겁스:추리와 수사> 의 세 보조 자료들은 어디까지나 TRPG를 굳이 하지 않는 입장에서도 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일종의 준 교양서적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리뷰는 애초에 이 배경으로 TRPG를 플레이하기 위한 설정 자료에 관한 것이기에, TRPG를 하지 않는 사람(그 중에서도 겁스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이 리뷰의 가치가 덜할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겁스:실피에나>의 경우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모델로 한 듯한 여러 독특한 설정들과 갈등 구도의 배치에 있어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도, 실피에나 설정의 대표적인 특징인 1)포스트 아포칼립스 2)로우 파워 3)로우 마나 4)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이념적 가치의 대립과 현실적 이해득실 관계의 강조 5)‘운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접근과 그것이 이야기 상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독특한 테이스트를 내면서도 그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신비성이나 초월성에 대한 경이를 느끼게끔 해준다. 통상적인 ‘중세 판타지’ 장르에서 ‘마법’이나 ‘몬스터’가, 현실의 지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에 신비롭고 놀라운 대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너무나도 정형화되고 진부해져 어떤 경이도 되지 못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이러한 요소들의 조화는 마치 조지 RR. 마틴의 걸작 소설인 <얼음과 불의 노래>를 연상케 한다.
 이 책은, 영화나 소설 같은 단일한 서사체계를 위한 설정자료집이 아니다. 그 배경으로 직접 플레이를 해 비밀을 밝혀내고 갈등을 해결하고 모순을 겪고 고민한 끝에 세상을 바꾸는, RPG를 위한 배경과 떡밥들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진상’은, 그리고 그 진상을 파헤친 끝에 결국 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은 참가자들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는 플레이하는 팀마다 달라질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 책에서는 일부러 내막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 떡밥들도 많고, 좀 뜬금없어 보이는 설정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설정과 떡밥들은 TRPG를 하는 팀 내에서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자체로 이 실피에나라는 세상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강조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저러한 특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 7
  • No Profile
    세뇰 14.07.01 02:15 댓글

    허억. 1. 들어가는 글 부분에서, 에르네스 사령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 중 '에르네스가 이끄는 혁명군은 서부 각지에서....' 라고 되어 있는데, 서부가 아니라 동부입니다. 무라드 파라고스도 '서부'가 아니라 당시 '동부'에서 가장 큰 군벌이고요. 루피나 부분과 섞인 듯OTL 3. 나오는 글 부분에서도 '한국 근현대사를 모델로 한 듯한 여러 독특한 설정들과 갈등구도의 배치는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롭다'라고 쓴다는 걸 저렇게 써버렸....

     

    한글로 작성할 때는 중간 중간에 줄가름을 꽤 여유 있게 했는데 전부 붙어서 보이네요. 다음부터는 두 줄을 띄워야 하나.

  • 세뇰님께
    No Profile
    양원영 14.07.01 02:17 댓글

    수정했습니다. ㅎㅎ 게시판 기본 세팅에 따라서 레이아웃이 조금씩 달라지긴 해요. 통일하려고 가급적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 양원영님께
    No Profile
    세뇰 14.07.01 02:35 댓글

    늘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리뷰는 초여명에 보내는 제 러브레터 비슷한 거기도 한데... RPG 모르는 독자에게도 흥미를 끌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 No Profile
    미로냥 14.07.01 12:04 댓글

    저 티알 유저 아닌데 이거 보고 책을 다시 카트에 넣었습니다! ㅋㅋㅋ 지난 번에도 토막소개 쪽에서 보고 흥미로워서 살까말까 하고는 있었는데... 다음 번에 살거예요 'ㅂ')/ (영업 간증)

  • 미로냥님께
    No Profile
    세뇰 14.07.01 17:22 댓글

    얼레.... 미로냥님도 RPG하신다.... 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던 거 같은데 다른 분과 헷갈린 모양이네요. 급하게나마 쓴 보람이 느껴집니다. .....이래봤자 김성일 사장님은 나한테 책 한 권 안 주시겠지!

  • 세뇰님께
    No Profile
    미로냥 14.07.04 14:25 댓글

    ㅎㅎ 몇번 '하려고 했던' 적은 있는데 제가 고정시간을 내는 게 어렵고 파티플레이에 미숙해서(?) 하지는 못했어요.

    던전월드같은 룰북을 사기는 해요 'ㅂ'!

  • 미로냥님께
    No Profile
    세뇰 14.07.04 16:26 댓글

    마스터와 1대 1로 솔로 플레이를 지원하는 룰도 많습니다 고갱님!

    적당한 타이밍에 좋은 팀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매력적인 취미에요 RPG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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