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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탐정록

한동진·한상진, 학산문화사, 2009년 1월


세뇰 (garleng@naver.com)



1. 들어가는 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철도와 전신은 세상을 하나로 이었고, 비행선과 잠수함으로 인간의 인지는 하늘 위와 바다 속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으며,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들은 속속들이 식민지로 팔려 나갔다. 대영제국을 비추는 지지 않는 태양처럼,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미신과 자연을 정복하리라는 낙관이 팽배했다. 그와 동시에 공장에서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들이 하루에 15시간씩 혹사당했고,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드리운 긴 그림자가 19세기 영국을 덮었다. 바로 그 무렵, 통 손님이 오질 않아 고민하는 한 개업의가 있었다. 그는 심심풀이 삼아 천재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 13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전 세계의 수 천만 팬들을 열광하게 한 불세출의 명탐정, 셜록 홈즈의 탄생이었다.

 셜록 홈즈보다 먼저 등장한 천재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도 있었고, 홈즈를 오마쥬하면서도 독특하고 매력적인 개성을 확립한 에르큘 포아로도 있었다. 천재적인 주의력과 분석력보다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제인 마플 같은 예도 있었고, 추리 자체보다는 어둡고 비정한 세상을 단호한 의지력과 결단력으로 헤쳐 나가 범죄자를 벌하는 것을 보여준 필립 말로우도 있었다. 뒤팽 이래로 추리물이 하나의 명확한 장르로 굳어지며 수많은 명탐정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셜록 홈즈일 것이다. 연극과 영화, TV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거듭 만들어지고 그를 모델로 한 파생 캐릭터들이 생겨나고 배경이 다른 시대와 장소로 바뀌고 인물상이 재해석되며 홈즈는 21세기까지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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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컬 드라마 『House M.D』의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

탐정이 아니라 의사지만 매사에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고 추리력이 뛰어나며 괴짜 기질이 있는 등 홈즈를 모델로 한 구석이 많다

(물론 홈즈는 하우스보다 훨씬 신사적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셜록 홈즈 파생작에 속한다. 1930년 일제 치하의 조선 경성을 살아가는 천재 탐정 설홍주와 그의 친구인 중국인 한의사 왕도손, 하숙집 주인이며 김치찌개를 잘 끓이는 허도순 부인, 설홍주를 껄끄러워 하지만 능력은 인정하는 레이시치 레이토우 경부 등 원작의 캐릭터들을 일제시대 조선이라는 배경에 대단히 잘 어울리게 바꿔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게 이 부분이다. 단순히 배경이 바뀌고 주요 인물들이 현지화된 수준을 벗어나, 그러한 배경과 인물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져 있다. 벌어지는 사건들의 유형 역시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살인범죄 수사만이 아니라 암호 해독을 통한 보물찾기, 일상 속의 수수께끼 등 그 배리에이션이 풍부하다. 2.에서는,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5편의 작품들을 다룬다.      



2. 작품에 관해

 운수 좋은 날

 설홍주의 고등학교 후배가, 이상한 방식으로 사라진 대학교 동기의 행방을 찾기 위해 설홍주를 찾아오는 부분과 유명한 거상 유원기의 실종사건에 대해 설홍주가 수사를 펼치는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설홍주와 왕도손의 짧은 대화를 통해 시대상과 더불어 둘의 인물상을 간접적으로 제시해 보이는 첫 장면으로 시작해서, 설홍주의 특기이며 동시에 그 모델인 셜록 홈즈의 특기인 ‘상세한 관찰을 통해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조합해서 상대의 생각이나 행적 추론하기’가 이뤄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몇 년 전 영국 BBC에서 제작한 현대판 셜록 홈즈 드라마인 『셜록』에서 홈즈의 시야로 보는 화면에 단서가 될 만한 요소들이 잡히면 그 위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독특한 연출법으로 재현한 이 특기는 이후에도 거의 매 작품마다 한두 번씩 등장해서 원작의 팬들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이 단편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설홍주의 탐정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초반부의 짧은 안락의자형 추리와, 일견 그것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실종사건이 훌륭하게 하나로 엮이는 구성이다. 부담 없이 읽기 좋은 분량과 어우러져,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인 두 번째 작품으로 넘어가기 위한 애피타이저 역할을 한다.      

 황금 사각형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 나일산이 설홍주를 찾아와서는, 얼마 전 죽은 조부 나시언이 생전에 왜경들의 눈을 피해 은닉한 재산을 찾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 나 씨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인 동시에 작중 시점으로부터 10여 년 전 강원도에서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도 한 독립 운동가의 혈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왜경들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졌고, 결국 조부 나시언은 노환과 신경쇠약으로 사망하기 직전 나일산에게 묘한 유언을 남겼다. 아편 중독과 여색에 빠져 이미 반쯤 폐인이 된 나일산의 형 나일훈은 그 유언 속에 유산을 찾아내기 위한 단서가 있으리라 여기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찾아내려 하고 있다. 설홍주는 유언 속에서 언급된 조상의 이름에 주목하고, 나 씨 가문의 족보를 뒤져서 그 안에 숨겨진 암호를 찾아내 그 풀이에 도전한다. 
 원작의 비슷한 에피소드인 「머스그레이브 가의 의식문」을 오마쥬하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독특한 트릭 덕에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사건이 없어 따분할 때면 자극을 얻기 위해 코카인 주사도 꺼리지 않던 셜록 홈즈와는 달리, 골초일망정 마약에는 일절 손대지 않고 마약 중독자를 극도로 혐오하는 설홍주의 결벽성이 드러나는 등 소소한 재미거리도 많다.

 광화사
 독감으로 앓아누웠다가 간신히 일어난 설홍주. 일어나자마자 경시청의 레이시치 경부가 찾아와서는 교외의 고급 주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 수사를 도와달라고 그를 현장으로 끌고 간다. 현장에 있는 것은, 얼굴 전체가 알아볼 수 없이 짓뭉개지고 벌거벗겨진 채 쓰러져 있는 여자의 시체다. 레이시치 경부는 주변의 캔버스와 화구, 물감들, 그리고 피해자가 알몸이었다는 점, 옆에 놓인 캔버스에 그려진 여성의 뒷모습이 피해자의 신체적 특성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에 근거해 여자는 누드모델이며 이 집에서 살던 화가가 범인일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설홍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는 중편. 신여성이 대두하던 당시 조선 경성의 사회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물리적인 증거 확보 과정과 주변인 면담, 해당 분야에 대한 치밀한 조사,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교활한 범인과의 대결 등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천변풍경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아래에는 거지들이 모여 사는 움막들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그 움막촌에서 거지 소년 한 명이 설홍주를 찾아와서는 자기네 왕초가 살인누명을 써서 왜경들에게 잡혀 들어갔으니 그를 벗겨달라고 부탁한다. 새벽녘에 시내의 고급 일식 여관에서 신원 불명의 한 남자가 손도끼에 머리가 쪼개져 살해당했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순사가 범인을 쫓다가 결국 놓쳤다는 것이다. 레이시치 경부는 범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주변 지리를 잘 알고 발이 빠르고 힘이 좋다는 건 추측할 수 있었고, 근처의 전과자나 우범자들을 대상으로 그런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본 결과 왕초가 모든 조건에 부합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한 설홍주는 수사에 들어간다.
 원작의 「주홍색 연구」를 비롯한 몇몇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부랑아들로 이뤄진 뒷골목 정보원들인 통칭 ‘베이커 가 특공대’ 역할을 하는 청계천 변의 거지 소년들과 설홍주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묘사되는 단편. 서두에서 제시되는,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 변에 현대식 가옥이 늘어서 있고 자동차가 오가는 청계천 남쪽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 북쪽을 구획 짓는-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움막들과 시커멓게 얼어붙은 더러운 물줄기, 그 위로 날리는 흰 눈발의 묘사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구질서와 신질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당대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한 이 묘사는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 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소나기
 셜록 홈즈는 지금까지 수많은 매체에서 다양하게 재해석되어 왔고, 그로부터 파생된 캐릭터들까지 합치면 10여 명이 넘어가지만 그 와중에도 대체로 유지되는 홈즈만의 고유한 캐릭터성은 몇 가지가 있다. 여성 불신, 극단적으로 편향된 지식 수준-범죄 수사에 도움이 되는 화학이나 독학, 지질학 등의 분야는 잘 알지만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예술이나 역사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거나-, 상대가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결코 눈치 보거나 굽실대지 않는 강한 자존심, 방 안을 연기로 가득 채울 정도의 줄담배와 밤낮을 가리지 않는 바이올린 연주 같은 괴벽 등.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명민한 두뇌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고 ‘수준 낮은 범죄’에 그를 낭비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점이다. 설홍주는 홈즈의 그런 면모를 유독 강하게 이어받고 있다. 설홍주의 능력을 인정하고 친구로서 가깝게 지내면서도 은근히 고깝게 여기던 왕도손은, 질서정연한 논리적 분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설홍주의 방식으로는 완전히 무작위적인 우연이나 정신병적 광기에서 비롯한 사건은 해결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도전장을 던진다. 단골 중국요리점에서 요즘 자주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데, 매일 같이 와서 짬뽕과 교자만을 먹는다거나 늘 우산을 갖고 다니면서도 정작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그걸 쓰지 않는다거나 하는 기묘한 버릇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흥미를 느낀 설홍주는 왕도손과 함께 짬뽕 맛도 볼 겸 그 중국요리점으로 향한다.
 사기나 유괴, 살인 등 심각한 사건까지는 아닌, 비교적 스케일이 작고 일상적인 느낌이 강한 소품. 가벼운 전개에 재치 있는 대화가 짬뽕 국물과 해물처럼 잘 어우러져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3. 나오는 글

 이 책의 가장 주된 세일즈 포인트는 역시 188~90년대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1930년대 조선의 설홍주로 바뀌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단순히 스킨만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으로 바뀐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원작의 홈즈는 평소에는 상당히 나태하고, 마약을 비롯해 괴이하고 반사회적인 취향이나 버릇도 많은 인간이지만 설홍주는 줄담배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홈즈에 비해 훨씬 건실해 보인다. 양 쪽 다 당시의 사회와 지배 엘리트 계급에 대해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를 자주 보이고는 있지만 그 냉소와 관조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는 대제국이었고, 프랑스나 독일 등 신흥 라이벌들의 대두와 더불어 점차 쇠락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열강의 필두를 자임할 만한 강대한 국가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50년 뒤의 조선은 일본제국 산하에 있는 변방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홈즈는 고위 관료나 귀족 등 이른바 ‘높으신 분’들에게 굽힘 없는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대영제국의 충실한 신민이며 애국자였고 그의 냉소와 관조는 ‘위대한 조국’을 이끌고 지켜나가야 할 그러한 높으신 분들의 타락이나 잘못된 사회 체제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설홍주의 조국은 식민지배 하에 놓여있고, 누구보다도 독립에 힘을 쏟아야만 할 옛 왕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임시정부조차도 다양한 사상 및 지역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끼리 손발이 맞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식민지 출신 인텔리겐차 설홍주의 냉소와 관조는 홈즈의 그것보다 훨씬 허무주의적이고 절망적인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1.에서 제시한 ‘빛’과 ‘어둠’의 개념도 흔들리게 된다. ‘인간’의 재발견이었던 르네상스적 이상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원시의 자연과 미망을 정복하리라는 계몽주의적인 낙관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성립되는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 그리고 배타적 시장질서에 기댄 것이었고 한발 더 나아가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로 가는 문이 되어 2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나치의 만행이 워낙 악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려졌지만, 국수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적인 분위기는 당시 유럽과 미대륙 어디에나 흔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이라는 빛은 아동 노동자들을 비롯한 자국 내 소외계층과 식민지 국민들에 대한 착취라는 어둠과 서로 별개로 나란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그 자체로 이미 후자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일제 하의 식민지 조선 경성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천재 탐정이 다른 유형의 탐정과 구분되는 핵심적인 요소는 철저하게 합리적인 이성에 기반한 주의력과 분석력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설홍주는 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없이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시대 앞에서 그걸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개인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와 비극성이, 이 작품의 행간에 녹아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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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6.01.03 02:25 댓글

    흥미가 갔었는데 잊고 있다가 이 리뷰를 보고 다시 장바구니에 손을 댑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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