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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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박애진, 온우주, 2013년 12월


정도경 (Lantana7435@gmail.com)



 대학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읽은 어떤 소설에 홀랑 반해서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서 보고서를 쓰려다가 교수님한테 야단맞은 적이 있다. 나도 여자고 소설의 작가도 여자고 교수님도 여자분이라서 나는 내 나름대로 괜찮은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여성적 글쓰기’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이 작품은 그런 식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며 ‘여성적 글쓰기’라는 구분 자체가 오류이므로 특히 어디 학회 같은 데 가서 그런 주제로 발표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마구 화를 내셨다. 그 교수님이 원래 학생들한테 자상하거나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괜한 벼락만 더 뒤집어 쓸 것 같아서 어째서 안 되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아마 ‘남자는 이성과 논리, 여자는 감정과 욕망’이라는 서양 특유의 이분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은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학위를 한 분이었다.) 서구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성과 논리는 언제나 감정보다 우월하고, 그러므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욕망은 원죄와 직결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억누르고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 서양 중세 천 년의 유구한 역사 동안 여성은 감정과 욕망의 화신으로 억압받았으며, 특히 여성의 성욕만을 무지무지하게 죄악시하는 서양 기독교 특유의 관점이 극단적으로 부풀어올라 벌어진 사건이 마녀 사냥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자가 스스로 나서서 ‘여성적 글쓰기’ 등으로 문학을 성별에 따라 이분화해 버릴 경우, 서양식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남성 작가들의 주류 문학보다 열등한, 감정과 욕망에 휙휙 휘둘리며 조리 있는 서사나 성찰 따위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여류’ (는 곧 이류) 문학의 존재를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뭐 그런 논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다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다른 존재한테 같은 기준을 들이대면 그건 거기서부터 ‘틀린’ 기준이 돼 버린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는 분명 여성만의 관점, 여성만의 사고방식, 그리고 남성은 남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겪지 않고 겪을 일도 없는 여성 특유의 신체적 사건들과 거기에 관련된 생각과 감정들이 나타난다. 문학에서 19세기 문학과 20세기 문학은 분명히 다른데, 시대가 다른 건 다르다고 말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다른 건 어째서 다르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 나는 홍길동도 아닌데 어째서 여성 작가를 여성 작가라 부르지 못하는가? 


   여기서 빨리감기 하여 약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의문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여기에 대한 대답을 – 최소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냈다.
 박애진 작가의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에서.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은 여자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를 지나는 어린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연령대의 ‘어린 여자들’이라면 곧바로 ‘소녀 감성’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작품집에 실린 첫 두 작품은 그런 ‘소녀 감성’에서 아주 동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와 「짝짓기」는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다른 모든 소녀들이 자신에게 운명 지워진 (혹은 그냥 맘에 드는, 애인으로 지낼 수 있는) 소년을 만나는 동안 주인공 소녀만 결정적인 통과의례를 치르지 못하고 애를 태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디어 자신만의 소년을 만난다.

 여기서 주어와 목적어를 잘 구분해야 한다. ‘소녀’가 (주어) ‘소년’을 (목적어) 만나는 이야기이다. 주체는 철저하게 소녀이다. 「짝짓기」에는 심지어 “소년을 가진다”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년은 소녀가 발견하고 경험해야 하는 대상이며, 소녀에게 소년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완성이라기보다는 통과의례의 완성이다. 물론 그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소녀는 보통의 사랑 이야기에서 여자 주인공이 하듯이 소년에게 사랑 받는다거나 선택 받고 인정 받기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보다 소녀는 소년을 만남으로써 또래집단에서 그 과정을 이미 겪은 다른 소녀들에게 인정받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더 강하게 갈구한다. 간단히 말해 소녀에게는 다른 소녀들이 가장 중요하다.


  난 열여섯 살이 지난 아이들 틈에 끼지 못 했다.
  심지어는 열여섯 살이 되지 못한 아이들 틈에도.
  열여섯 살이 지난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세계에 날 끼워주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도 그걸 눈치챘다.
  -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16쪽*
  (*열여섯 살이라는 상징적인 나이를 논하는 부분에서 쪽수도 16쪽으로 맞췄다는 편집자의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의 인용문과 「짝짓기」의 경우 또래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경험이란 (후자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성경험이다. 그리고 주체가 여성이므로 성경험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 특유의 삶의 경험, 혹은 몸의 체험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양쪽 작품에서 모두, 임신은 자연스러운 사건이거나 (「어른들은…」) 혹은 정해진 기간 안에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생애과업(「짝짓기」)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른들은…」과 「짝짓기」를 지배하는 것은 분명 성경험과 임신이라는 여성만의 경험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어른 여성의 관점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여 성년기를 맞이하면 마술적인 과정을 통하여 짝짓기의 대상인 소년이 나타나서 주인공 소녀가 겪은 성장의 아픔이나 또래집단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겪는 결핍을 달래주고 채워준다는 전개의 바탕에는 분명 ‘소녀적’인 감성이 깔려 있다. 심지어 소년들의 묘사조차 소녀적이다. 「어른들은…」의 커피 소년은 부끄러움을 타고, 「짝짓기」의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뒤에서 매달리기도 하고 주인공 소녀와 둘만 남게 되자 수줍어하기도 한다. 팔이 너무 연약해서 나무 위로 올려주려 해도 스스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지 못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 어떤 묘사에서도 완력이라든가 적극성 등 일반적인 의미의 남성성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임신은 된다. 주인공 소녀들을 위해서는 다행이다.)

 그러나 「어른들은…」과 「짝짓기」의 요정 같은 소년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은…」과 「짝짓기」의 ‘소녀 감성’이 소녀적이면서도 나약해지지 않는 지점이다. 「어른들은…」에서 커피의 동반자는 커피를 마실 때에만 나타난다. 그러니까 커피의 동반자를 불러내거나 불러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공에게 달려 있다. 주인공이 원하면 불러낼 수 있고, 불러내면 불러내는 대로 나타나지만, 주인공이 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안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실에서 아이를 키우고 가정 살림과 일상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주인공 혼자의 몫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혼자서 “나와 아이, 우리 둘이 함께 할 공간”을 준비한다. 「짝짓기」의 소년들은 아예 머무르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길지 않은 그 시간이 지나면 자기 할 일을 다 했든 못 했든 사라진다. 주인공이 사는 마을의 배란기 소녀들을 임신시키는 것이 마술적으로 나타나는 소년들의 주 임무이고 소녀에게 발견되어 임신의 도구(?)로 사용(??)된 후에 사라진다는 측면에서 어찌 보면 좀 소모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소녀들의 동화 속에서 임신은 꿈결 같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고 출산이나 양육은 그저 먼 미래의 암시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은 법이다. 임신과 출산과 양육이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남성이 정자만 제공하고 이후의 과정에는 신체적으로 직접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여성도 난자만 제공하고 이후의 과정에서 분리될 수 있다면, 배란의 과정은 생략한 채 임신과 출산과 양육만을 담당하는 제 3의 성이 따로 있다면 –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완전한 결합」이다.

 「완전한 결합」에서 인간의 성별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라 샤하, 주트, 아메,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샤하와 주트가 난자와 정자를 제공하지만 아이를 몸 속에 품고 낳아서 키우는 것은 아메의 몫이며 오로지 아메만의 몫이다. 현실 사회의 가족이나 부모자식 관계에 해당하는 개념이 작품 속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메가 샤하와 주트에 비해 훨씬 짧은 인생을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 바치는 동안 샤하와 주트는 직장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교감’ – 그러니까 연애도 하고 성관계도 하면서 현실에서 한국의 미혼 남녀들이 살아가듯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

 이런 세계에서 주인공 이연이 사랑하는 아메 해인의 고민과 선택은 주인공의 감성적이고 약간은 추상적인 사랑보다 훨씬 더 진지한 현실의 무게를 가지고 다가온다. 해인은 아메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의 책임이자 인생의 목표를 함께 나눌 이성을 원한다. 살아 있는 인큐베이터로서 후대의 생산과 양육이라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혼자서 온 힘을 다해 감당한 뒤에 일회용 쓰레기처럼 버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주인공 이연은 아메가 아니라 샤하이기 때문에 아메의 관점이나 생각, 두려움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자신은 평생 겪지 않아도 되는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메, 샤하, 주트라는 성별 구분은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용어들이지만 “이연”이나 “해인” 혹은 “준수”, “민우”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한국식이라서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현실적인 느낌이 더 강화된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제 3의 성을 상상해 내어 모든 문제를 그 쪽한테 미뤄 버리는 것보다는 남성도 여성과 동등하게 아이의 양육에 참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양성평등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올바름과 양성평등은 대체 누가 생각해낸 것인가. 작가의 세계는 작가의 것이다. 그리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나도 싫은 것이 인류보편의 진리다. 남자가 하기 싫은 건 여자도 싫다. 남한테 떠맡기고 그건 쟤의 ‘운명’이라고 맘 편하게 치부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여자도 그런 생각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적인 여성의 시각이며 어찌 보면 대단히 현실적인 여성적 상상력이다.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미혼의 여성도, 혹은 비혼(非婚)의 여성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도,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대한 솔직한 (혹은 노골적인) 귀차니즘적 관점 외에도 「완전한 결합」에서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 이연이 해인에 대해 느끼는 소유욕이다.


  “네, 두 사람용으로요!”
  난 당당히 말했다. 해인은 활짝 웃으며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줬다. 가게 주인은 별 주문을 다 받겠다는 듯 우릴 봤지만 결국 두 개가 합쳐 하나의 모양을 이루는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해인이 하루 시간을 두고 만나자고 한 이유는 명백했다. 다른 샤하에게 연락해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반지를 집어 던졌다.
  그대로 끝냈어야 했는데.
  - 「완전한 결합」, 90쪽


 이연과 해인은 언젠가 대면해야 할 임신과 출산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세 번째 파트너를 찾기 위해 언제나 탐색을 거듭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둘만의 관계를 원한다. 해인의 관점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 자신의 파트너가 자신만큼 성의껏, 열정적으로 동참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세계에서 출산과 양육이 존재의 목표인 아메로서 해인의 관점에는 언제나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계산이 포함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연은 해인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해인을 사랑하는 만큼 해인도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둘만의 관계를 원한다. 그래서 주트라는 제 3의 존재(성별로 보나, 해인과 이연의 관계로 보나 제 3의 존재가 맞다)가 이 관계에 끼어들었을 때, 해인은 자신과 함께 아메의 운명에 동참해줄 것이라 믿었던 샤하가 자신과 아이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연은 자신도 해인의 관심과 배려를 원하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깨닫고, 자기만 일방적으로 포기하고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신선함을 느낀다.

 물론 사회제도 자체가 난자와 정자를 제공한 생물학적 부모도 아이의 양육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행동으로 동참해야 하는 구조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갖추어져 있는 체제였다면 해인이 일방적인 희생을 겪어야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자신이 미래에 감내해야 할 일방적인 희생을 이연이 과연 전부 보상해줄지 끊임없이 이연을 시험하며 괴롭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연 또한 그런 관계에 지쳐서 자신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을 향해 돌아서버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어도 사람의 감정을 보장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돌아설 사람은 어쨌든 돌아선다. 박애진의 작품에는 서로 바라보고 갈구하고 돌아섰다가 또 마주보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모습들이 더없이 섬세하고 미묘하게 포착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은 서로 자신만을 보아주기를 원하는 소녀들, 같은 여자니까 자신의 전부를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주기를 요구하고 욕망하는 소녀들이다.

 이것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깊고도 친밀하며 배타적인 인간관계의 욕구, 제목에 나타난 그대로 “완전한 결합”의 욕구이며, 이 욕구는 한 작품만이 아니라 사실 박애진의 작품집 전체를 강렬하게 관통한다. 그리고 이 관계와 소유의 욕구야말로 ‘소녀적 감성’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까지 모두 포함한 소녀적 특성, 성장기와 성년 초기의 어느 시기에 성욕이나 식욕보다도 훨씬 더 무시무시하게 소녀의 존재 전체를 휩싸는 “원초적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녀들의 특성, 혹은 소녀만의 특성을 박애진 작가는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예민하고 불안정하고 사납고 발랄하고 덜 여물어 더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 잡아낸다. 게다가 남성이라는 변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어디까지나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성에게 향하는 여성의 시선과 여성에 대한 여성의 욕구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집 앞에서 현수가 희수를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현수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대신 맥주를 마셨다. 술은 쓰고 맛이 없다. 현수는 계속 망설일 뿐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희수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어?”
  현수의 눈은 쌍꺼풀이 없다. 가로로 긴 다이아몬드형 눈이 옅은 갈망과 기대를 품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희수는 침을 삼켰다.
  - 「조화造化」 258-259쪽


 물론 현수와 희수는 둘 다 여자다. 「조화造化」는 게임 속 가상세계의 인간관계가 잠시 언급된다는 것 외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주요 등장인물인 현수와 희수는 양쪽 모두 작품 속 주변인물들의 예상이나 독자들의 예측에 어긋나는 인물들이다. (최소한 이 글을 쓰는 필자의 예측은 어긋났다.)

 희수는 외모부터 전형적인 ‘청순가련형’이다. “목은 가늘고 길었다. 허리가 잘록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었고, 스타킹을 신지 않은 종아리는 희고 곧았다.” (206쪽) 희수는 부모님이 소중히 키운 금지옥엽 외동딸로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아버지가 정해 준 남자와 맞선 비슷한 것을 보며 조신한 양갓집 규수처럼 행동하도록 규정되지만 – 현수를 좋아하며, 대체로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밤에 혼자 자위를 하고, 외부적인 규정에 맞지 않는 자신의 이 모든 인간적 측면들을 혐오하여 타인과 거리를 두는 데 무척 능숙하다. 그러나 예쁜 외모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데 익숙한 태도 때문에 ‘내숭’ 혹은 ‘어장관리녀’라는 오해를 받는다.

 현수는 이름과는 달리 여자이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 사는데, 그 이유는 가정내 성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임이 암시적으로 언급된다. 객관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큰 상처를 입었으나 이제 집을 벗어나 “지금은 괜찮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현수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혼자 절박한 혼란 속을 헤매는 희수는 어찌 보면 잘 만난 한 쌍이다.

 외면과 내면의 괴리, 혹은 과거와 현재의 괴리를 겪는 희수나 현수에 비해 주변의 등장인물들은 매우 현실적으로 평범하다. 현수의 친구인 경숙은 자신의 이름을 굳이 ‘경아’라고 우기고 외모가 예쁜 희수를 보자마자 적개심을 느끼고 깎아 내리려 드는 등 허영심이 강한 인물이며, 현수가 자신의 대리 남자친구 노릇만 잘 해 준다면 그 외에 현수라는 인간의 내면이나 가정사에 대해서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여자라면 소녀 시절에, 혹은 학창시절에 덤덤하고 털털한 성격의 여자 친구를 대리 남자친구로 삼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뒷배경이나 들러리 용도로 이용하려는 여자아이를 한 번쯤은 겪어 보았을 것이다. 경숙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캐릭터인데, 그나마 자신이 사실은 현수에게 관심도 없고 친구라고는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깨닫는다는 점에서 발전적이라고 해줄 수 있다.

 이 작품에도 남성 등장인물들이 있기는 있는데, 희수한테 차이는 것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역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성힐’은 희수하고 어떻게 썸 좀 타볼까 하다가 끝에 가서 차이고, 희수가 아버지를 통해서 선 본 남자인 형우는 드라이브 핑계로 희수를 외딴 곳에 데리고 나가서 들이대다가 차인다. (선 본 남자하고 단둘이 차 타고 드라이브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덧붙이자면 ‘성힐’은 본명이 지석인데 심지어 본명조차 자기 소개할 때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는 계속 게임 캐릭터 이름으로만 지칭된다.

 현수와 희수의 모습을 보면 박애진의 작품에서 여자들의 소통과 교감의 욕구가 어째서 동성인 여자를 향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처 입은 인물들에게 여자들의 세계는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안전하다. 여자들은 훨씬 위에 논의했던 「완전한 결합」에서 이연을 괴롭혀주기 위해 일부러 다른 샤하를 데리고 나오는 해인처럼 상대의 마음을 짓밟고 갈갈이 찢을지 몰라도 「조화 造化」의 형우처럼 희수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물리적으로 구석에 몰아넣고 몸으로 덤비지는 않는다. 그리고 상대의 감정을 볼모로 잡고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어쨌든 앞뒤 맥락과 논리와 공격 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반격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략 십대 중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에 이르는 어느 한 시기의 여자아이들이 겪는 폭발적인 감정의 흐름, 살얼음처럼 연약하고 투명하지만 날카롭고 파괴적이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 소통과 이해의 욕망과 교감에의 갈구는 같은 나이 또래, 같은 시기를 겪는 같은 여자가 아니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여자들을, 때로는 그녀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의 마음이 움직이는 근거와 맥락과 방향을 이토록 솔직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박애진 작가는 참으로 드문 관점과 필력을 지녔다.

 그렇다고 박애진 작가의 작품이나 이 시기 여자들의 마음이 온통 동성에 대한 침침하고 끈끈한 집착과 욕망과 상처로만 얼룩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단추를 주머니에 감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입었다. 팬티를 입고 청바지에 다리를 넣고 티셔츠에 머리를 밀었다. 거울을 보고 옷매무시를 다듬고 코트에 팔을 꿰더니 단추를 잠갔다. 소매에 단추가 없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네 코트 소매에 자꾸 눈이 갔다.
  - 「낙원」 299쪽


 여성인 주인공은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친구의 코트 소매에서 단추 하나를 훔친다. 단추 하나가 마치 연인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중요한 어떤 것의 열쇠인 양 두근거리며 떼어내서 감추고, 연인이 눈치채지 못하고 가 버린 뒤에는 그 단추 하나로 연인을 전부 가진 것처럼 기뻐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건 소녀에게만 한정된 감성이 아니다. 사실은 인간 보편의 욕망이다. 그러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어른이나, 그래도 갖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돌진하는 남성과는 달리 소녀는 수줍어하고, 겨우 단추 하나에 애를 태우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한다. 단추 하나에 애정과 갈망을 모두 파묻는 연약하고 섬세한, 전형적이지만 사실적이라서 더 마음에 아리게 와 닿는 소녀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그 단추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가 “쓰게 웃고” 단추를 담은 상자를 치워버릴 때, 소녀는 여자가 된다.

 합평회 자리에서 박애진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남성 독자도 조금 더 배려하거나 남자 등장인물들의 입지를 조금 넓혀주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다.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에도 실린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에 대한 얘기다.

 박애진 작가의 작품이 모두 다 남성 독자들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에 실린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여러 사이즈와 색깔의 치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예쁘다 혹은 예쁘지 않다, 치수가 너무 크거나 작다, 길이가 너무 짧거나 길다고 논평할 수는 있지만, 치마가 남자한테는 맞지 않는다 혹은 남성 소비자를 배려해서 좀 더 큰 사이즈의 치마를 만들라고 말하는 것은 최소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상당히 부조리한 요구이다.

 여성복 상점은 여자들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보고 옷 입지 말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고 해서 남성 독자들보고 읽지 말라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특히나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 자체를 터부시 당해본 입장에서, 이토록 여성적인 글은 반갑다.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에 나타난 소녀들의 정서가 딱 인생의 요 시기에만 걷잡을 수 없이 반짝이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대체로 사라지거나 많이 변형되는 종류이기 때문에, 그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글들은 더욱 반갑다.

 여성들이라면 어떤 한 이야기만이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 독자라면 주변의 여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인생에 중요한 여성이 있다면 그 내면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던 인형을 칼로 찔러 죽이거나 성기의 크기와 모양까지 최적화한 로봇을 구입해서 애인으로 삼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미리 경고해야겠다. 뒷일은 보장 못 하니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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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애진 14.03.05 15:01 댓글 수정 삭제

    이렇게 깊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조화에서 현수와 희수를 알아봐주셔서요. 다 제가 제대로 쓰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 많이 했는데... ㅠㅠ

    더 길게..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는데 댓글로는 초큼 수줍어서;; 다음에 만나서 해요. 갸아-

  • No Profile
    정도경 14.03.14 19:07 댓글 수정 삭제

    넵 감사합니다. 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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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 여성적 글쓰기2 2014.03.01
비소설 고독한 미로 2014.03.01
이달의 거울 픽 127호 토막소개1 2014.02.01
비소설 통과의례 - 상징을 행위로 2014.02.01
이달의 거울 픽 126호 토막소개 2013.12.31
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 인류의 멸망 앞에서 고뇌하는 종교의 초상 2013.12.31
이달의 거울 픽 125호 토막소개 2013.11.30
비소설 겁스 추리와 수사 - 꼼짝 마, 움직이는 놈 다 범인이야!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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