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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

아이작 아시모프 외,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병곤 외 옮김, 오멜라스, 2010년 6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아주 가끔이지만 SF를 추천할 기회가 있다. 그럴 때는 단편집, 특히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앤솔로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은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이 절판 혹은 품절된 상태라는 게 문제다.
 대표적으로 고려원의 SF 걸작선 시리즈, 서울창작의 세계 미스테리 시리즈, 도솔의 SF 걸작선 시리즈가 작가와 작품의 균형이 고르고 세부 장르도 다양해서 추천하고 싶은데 이들 앤솔로지는 모두 베른 협약 가입 이전, 즉 저작권 계약을 안 맺고 멋대로 번역 출간해도 되었던 때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럼 지금 적법한 절차를 따라 나온 앤솔로지 자체가 많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시공사의 [21세기 SF 도서관]은 원래 예정한 분량도 다 안 나왔고 황금가지의 [플레이보이 걸작선]과 [오늘의 SF 걸작선]은 절판되었다(단 [오늘의 SF 걸작선]은 전자책으로 복간되었다). 행복한책읽기의 [하드 SF 르네상스]는 구입이 가능하지만 제목부터 알 수 있듯 초심자에게 권하기에는 ‘하드’한 게 문제다. 결국 한국 작가와 작품을 논외로 하자면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정도밖에는 쉽게 구해 읽을 SF 단편집이 없는 셈이다.

 그때 SF 명예의 전당 시리즈가 등장했다. 이것조차 한때의 품절과 반값 할인을 지나 지금(2015년 1월 현재)은 구매가 가능한 모양이지만 오멜라스라는 임프린트 자체가 사라졌음을 감안하면 절판은 시간 문제다. 지금 있는 재고가 소진되면 자연스레 절판될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를 SF 초심자에게 권해도 될지를 생각하면 결국은 고개를 젓게 된다. 우선 크고 두꺼운 외양이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하거니와, 여기 수록된 작품은 1964년 이전의 고전들이다. 영화와 만화, 게임 등으로 나름 SF 콘텐츠를 흡수한 현대 대중에게(영화 [아바타], [트랜스포머], [인터스텔라] 등의 흥행을 보라) 이런 고전적인 작품은 낡고 어렵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결국 출간될 때부터 오멜라스의 다른 라인업이 그렇듯 철저하게 SF 팬덤과 매니아 층에만 호소하는 작품으로 남을 우려가 컸고 지금의 상황은 예상대로 되고 말았다. 4권을 다 내지 말고 선별하여 2권 분량으로 압축하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이미 작가 투표로 엄선된 목록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넣고 뺄지 정하는 것도 애매하고 저작권 계약을 맺고 내는 책이니 현실적으로도 어려웠으리라 본다.

 하지만 SF에 흥미를 갖고 천천히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이 시리즈는 그야말로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어떤 예술 장르이든 시간순, 고전부터 시작하여 접해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때 이 시리즈가 빛을 발한다. SF의 고전 단편으로 무얼 골라 읽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여명기에서 황금기로 이어지는 대표작이 망라되어 있으니 말이다.
 또한 이미 SF를 어느 정도 접한 독자라 하더라도 그간 클리셰로 알았던 많은 요소들, 후대의 작품에서 오마주되고 변주되는 소재나 아이디어들이 여기에 실린 작품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비록 여전히 참신하고 세련되다고 말할 작품이 많지는 않은 게 사실이지만 SF에 대한 관심, 특히 창작에 대한 동기부여에는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 두껍고 비싼 시리즈이니 부디 제발 전국 방방곡곡의 도서관에는 반드시 꽂혀 있어 앞으로 SF를 사랑하거나 쓰게 될 사람을 낳아주는 산파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스름 / 존 캠벨
 작가보다 편집자로 장르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 앤솔로지의 첫 번째를 장식한 걸로 보인다. 자가수리와 복제를 통해 자연화된 기계라는 소재의 시조격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설의 밤 / 아이작 아시모프
 [세계 SF 걸작선(고려원, 1992)]에 수록된 바 있고, 로버트 실버버그와 공저한 장편도 [나이트 폴(작가정신, 1995)]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에 의지한 작품이므로 군더더기가 많은 장편보다는 단편 쪽이 낫지 않을까 싶다.

투기장 / 프레드릭 브라운
 전쟁중인 인류와 다른 외계인 사이에 초월적 존재가 개입한다. 다만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각 종족에서 무작위로 하나씩을 골라내어 정체불명의 투기장에 가두어놓고 종족의 운명을 건 결투를 벌이게 만든다. 여기까지는 숱한 작품에서 변주된 설정이다. 특히 외계인과 야구 등 스포츠로 대결한다는 설정의 만화나 영화도 곧잘 나오는 걸 생각하면 인기가 있는 설정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지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점이다. 투기장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쳐져 있어 두 종족은 서로 보기만 할 뿐 건드릴 수도 없다. 이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물론 해답을 알려면 직접 읽어보시라.

허들링 플레이스 / 클리포드 D. 시맥
 과거 SF에서 곧잘 다루는 사람처럼 똑똑한 로봇이 등장하는 세계. 하지만 여기서의 로봇은 그저 사람 같지만은 않다. 이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똑똑하되 인간과는 다른 존재를 추구한 작가의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다. 사람의 행동은 물론 생각까지 기계로 대체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여준다.

최초의 접촉 / 머레이 라인스터
 제목 그대로 ‘최초의 접촉’을 다룬 작품으로 SF 장르 내에서 굉장히 유명한 단편. 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두 종족이(특히 인간이)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할지 의심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사고실험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SF의 장단점을 포함한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후 비슷한 유형의 단편들이 이어지는 일종의 원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고 검은 가방 / 시릴 콘블루스
 우연히 얻게 된 특별한 아이템으로 벌어진 소동과 말로를 그렸다. 이야기 자체는 미래에서 온 첨단 기계든 마법의 산물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

표면장력 / 제임스 블리시
 당시에는 더욱 그랬겠지만 독특한 인류의 후예가 등장하여 마치 인류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듯한 모험을 미시세계 속에서 펼친다. 표면장력은 물리적인 장벽이며 경계임과 동시에 그들이, 그리고 우리 인류가 넘어서야 할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향한 통과점이기도 하다. 이를 위한 도구가 지식(과학)이며 연료가 꿈과 의지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과학소설이 과학과 소설의 접점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었으며, SF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펼쳐내 SF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 걸작이다.

90억 가지 신의 이름 / 아서 클라크
 [토탈호러(서울창작, 1993)]에 수록되어 덤덤하지만 충격적인 결말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차가운 방정식 / 롬 고드윈
 유명하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 과거 [환상특급(서울창작, 1994)]에도 수록되어 우리나라의 SF 꿈나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역자 후기에도 밝혔던 것처럼 이 단편의 결말에 반박하여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 작품도 나오는 등 작가와 독자를 아우른 SF 장르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한 {최초의 접촉}과 마찬가지로 사고실험에만 집중하고 있다. 마치 추리소설로 치면 트릭과 범인 맞추기만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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