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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윌터 M. 밀러 Jr., 박태섭 옮김, 시공사, 2000년 2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1. 종교 vs 과학

 과학과 종교는 많은 면에서 대립해왔기에 이름에서부터 과학을 내세운 과학소설에서 종교를 다루는 게 어색하거나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SF가 종교를 소재로 썼고 신과 초월자, 믿음과 구원 등 종교적 테마를 다룬 경우도 무수히 많다.
 물론 SF가 종교와 과학의 대결에서 과학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대표적으로 과학이 발달하거나 외계의 지성체와 접촉하면 종교는 자연스레 소멸할 거라 본 아서 C. 클라크는 낙관적인 시점으로 종교의 패배를 예측했다. 이는 무지와 두려움이 해소되면 종교는 사라질 거라 보는 리처드 도킨스의 관점과도 흡사하다. 아이작 아시모프 역시 과학이 종교를 대체한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종교집단은 무지몽매하고 독선적인 무리로 그려질 뿐이다.

 권말 해설에 따르면 1960년대 뉴웨이브가 융성하기 전까지 미국 장르소설에서 종교를 테마로 다루는 건 터부시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라고 해도 이른바 펄프(질 낮은 장르소설을 가리킴)에서 종교를 다루는 방식은 으레 상상이 가능하다. 예수가 외계인이라든지, 시간여행을 해서 예수를 만난다든지 하는 식이다.
 뉴웨이브 이후부터 종교와 신, 죄와 벌 같은 테마가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내 이름은 콘라드], [신들의 사회] 등 로저 젤라즈니는 신화와 종교를 SF로 각색했다는 평가까지 듣는 작가이고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 메시아를 보여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초월적 외계 존재와 접촉으로 일종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는 [발리스], [성스러운 침입] 등을 쓴 필립 K. 딕도 빼놓을 수 없다.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은 판타지인 [나니아 연대기]처럼 종교를 소재로 쓰거나 우화적으로 취급하여 각색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외에 종교적 테마를 다룬 대표작으로는 SF가 정립되기도 전에 초월적 존재를 논리와 합리성에 기반하여 상상한 [스타메이커], 외계인을 통해 메시아, 구원, 속죄, 신앙심 같은 종교적 테마를 고찰한 [낯선 땅 이방인], [양심의 문제], [사자의 대변인], 인조인간이 창조자인 인간을 신으로 믿는다는 이야기인 [유리탑], 로봇이 인간보다 더 순수한 불성을 지닐 수 있음을 고찰한 [레디 메이드 보살] 등이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를 다룬 작품의 대표작을 찾자면 [스패로(구작 제목은 영혼의 빛)]와 함께 지금 소개하려는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을 들 수 있겠다.

2. 종말 속의 수도원

 본작은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SF로 손꼽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대표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물) 장르이기도 하다. 핵전쟁으로 문명이 파괴되고 중세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런 파멸 속에서도 가톨릭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건 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긴 하지만 꼼꼼하고 세심하게 종교가 융성한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세계에선 책이 사라지고 산적이 판을 치는 야만의 시대이기도 하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책이 금지되고 대신 발전한 다른 미디어를 받아들이며 수동적 인간이 된 사회를 그린 [화씨451]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구술로 외우는, 인쇄술 발달 이전에 무당이나 음유시인이 했던 방식으로 책의 내용을 수호하려 한다면 본작에서는 요새로 써도 될 만큼 튼튼한 수도원 건물에서 비밀리에 장서를 소장하는 식으로 지식과 책을 지켜나간다. 하지만 극중 프랜시스 수사가 그랬듯 수도승들은 책의 내용이나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과거의 유산, 자기들이 모시는 수호성인이 지켜온 가치이기 때문에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식의 수호자라기보다는 문화재 관리자에 가깝다.
 이런 관점은 프랜시스 수사가 기계의 설계도라는 것조차 모른 채 입수한 청사진을 예술품처럼 다루며 그림으로 그려 사본을 만들거나, 콘호어 수사가 고서를 읽고 전등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전기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본작의 중요한 무대이자 상징인 리보위츠 수도원은 따라서 문명과 과학 기술을 수호하고 간직하는 역할을 하고 있되 연구소나 도서관이라기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해당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공개를 해선 안 되지만 없어져서도 안 되기에 보관을 하고 있는 수도원의 존재는 모순된 것처럼 느껴지며 수도원장의 고뇌도 거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는 결국 과학 문명에 대한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3. 종교의 역할

 결과적으로 작가가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라는 점도 작용했는지 본작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종교의 손을 들어주는 매우 드문 SF가 되었다.
 가령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과학을 남용하여 멸망에 이른다는 내용의 종말물은 무수히 많지만 이토록 종교가 그 구원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작품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다만 본작은 종교가 생존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재건으로 이끈다는 식의 낙관적이고 낭만적인(그리고 노골적 선교 목적의) 내용은 아니다. 만약 정말 이런 결말이 되었다면 가톨릭 추천도서는 되었을지언정 휴고상 수상작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걸작 SF로 추앙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반전 같은 건 없지만 아직 안 읽은 독자를 위해서 스포일러는 피하겠다) 소극적이고 도피적이며 약간 센티멘털한 결말이다.

 실제로 본작에서 인상적인 부분이자 종교 자체를 안 믿는 필자에게도 호의적으로 남은 부분은 종교, 즉 가톨릭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해답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2부에서 학자인 따데오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 장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수도원장은 과학이 빚은 과거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같은 일이 또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고 맞선다. 3부에서는 의사가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안락사를 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수도원장은 신의 뜻과 교리에 맞지 않다며 반대한다. 본작은 이 두 가지의 종교적 테마를 다룬 논쟁에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고 끝까지 해결책을 주지 않은 채 고뇌한다. 비록 3부에서 벌어진 핵전쟁을 보면 수도원장의 경고가 옳았음을 보여주지만 이는 당시에 있던 독재군주의 영향이 큰 것으로 따데오의 생각이 틀렸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따데오가 2부 마지막에 자신의 뜻을 굽히고 수도원을 지키는 데 협력하는 모습에서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꿈꾸는 작가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전술했듯 수도원이 장서를 보관만 하고 활용에 반대했던 이유는 결국 과학 기술이 쓰이는 사람의 과오로 인해 파멸을 안겨다주는 무기가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과학을 활용하는 이의 마음을 선하고 정의롭게 이끄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본작에서 암시하는 종교관이다.
 이는 과학의 극한 발달이나 초월적 지성체와 접촉을 통해 문명이 발달하면 초월자 숭배와 기복신앙 같은 기존 종교의 역할은 사라지고 철학과 명상을 다루는 정도로만 남을 거라고 예측한 아서 C. 클라크의 생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단지 본작에서는 신이 인류 멸망을 허용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한 의문이나 반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듯 종교에 대한 회의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본작의 종교는 결국 멸망 앞에 무력한 무용지물도 아니고 재건을 이끄는 구원의 상징도 아니라는 점, 이런 양극단의 찬반론이 아니라 위안과 희망의 실마리에 불과하다는 점, 이것이 바로 본작이 추구하는 종교의 모습이며 역할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한편 전술한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 비판자로 유명하며 당연히 수많은 종교인들의 반박과 비난을 받았다. 이때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근거 중 하나가 많은 과학자들이 종교를 갖고 있으며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과학에 대한 종교의 우월함에 대한 근거로 쓰는 건 너무 성급하고 어리석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을 일일이 조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골을 넣은 축구 선수가 드리는 기도나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수상자의 수상 소감과 흡사하다. 교만에 빠지지 않는 겸허한 태도의 발로인 것이다. 또한 위안과 의지, 선량함과 정의를 스스로가 아니라 신과 종교를 통해 얻는 종교 교육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는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에 가까웠던 유럽 국가들 및 초기 미국의 전통이다(대통령 취임식이나 법정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전통은 오래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 유교를 종교로 여기는 이는 없으나 유교적 전통이 이어져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조상을 신처럼 숭배하지 않지만 으레 제사를 지내는 걸 보라.
 결론적으로 본작은 멸망 후에도 가톨릭이 건재한 것은 종교가 이런 소극적이지만 윤리적인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만약 이런 멸망 후의 세계에서 교조적이고 협박적인(‘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방식으로 포교를 했다면 금방 반발과 저항을 받아 무너졌음이 틀림없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증거로 2부에서는 교황청이 세를 확대하려다 독재자가 이끄는 왕국과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이 나오는데 명확히 묘사하지 않았어도 교황청이 패배하여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결국 3부의 비극은 종교가 이러한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잘못도 있다. 그렇기에 수도원장은 지구에서의 종교는 역할을 다했다,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거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러한 소극적이고 염세적이기까지 한 인간에 대한 태도는 종교를 유일한 버팀목이자 위로로 여기고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또한 본작에서는 두 가지 신비로운 인물을 제시하고 있다. 2부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 벤자민이 등장하며, 3부에는 기형 머리였던 레이첼이 새로운 생명체로 살아나는 장면이 있다. 이 두 사람은 독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데 주로 종교적인 기적의 산물로 여겨진다. 벤자민은 300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라 주장하며 1부의 순례자와 동일인물이다(사실이라면 최소한 1부와 2부의 간격인 600년 이상 살았다는 얘기다). 레이첼은 노파의 머리에 얹힌 죽은 기형의 머리였는데 노파의 죽음과 동시에 살아나게 된다. 핵폭발 후의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기적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종의 처녀수태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예민한 SF독자들은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기도 했다. 둘 다 방사능으로 인해 생겨난 돌연변이며 특히 레이첼은 원래 노파와 샴쌍둥이 같은 관계였는데 숙주에 해당하는 노파가 죽자 레이첼이 대신 몸의 주도권을 가져오며 깨어났다는 식이다.
 해답이 어느 쪽이든 신이 버린 듯한 비극적 멸망을 맞은 세상 속에서 종교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추구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4. 내외적으로 아까운 걸작

 저자인 윌터 M. 밀러 Jr.는 우울증에서 빚어진 핵폭발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못 이기고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비록 그가 사는 현실에서는 희망을 실어 보낼 외계 행성이 아직 없지만 그가 남긴 소설은 인류가 보관해야 할 장서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권말 해설에서 언급하듯 1990년대 이후로 냉전 구도가 무너지며 고전적인 핵전쟁에 의한 종말물은 쇠퇴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의 멸망과 종교의 역할이라는 거대한 테마는 아직도 굳건히 살아 숨 쉬며 인류가 외계 행성으로 이주할 날이 올 때까지도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여담이지만 본작은 불만족스러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빠르게 절판된 데다가 장사꾼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중고서적이 거래되는 안타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이렇듯 작가의 자살을 포함한 소설 외적인 상황이 극중 인물 프랜시스 수사의 비극적인 일생과 겹쳐질 정도며 이로 인하여 고전 걸작에게 더욱 신비로운 아우라를 더해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폰 북스 초기작 대다수가 재간되었음에도 [인간을 넘어서], [중력의 임무]와 함께 재간을 바라는 목소리가 이어지지만 아직도 요원한 작품군에 속하기도 하다.
 이 아까운 걸작이 부디 더 좋은 번역으로 오랫동안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출간을 검토하거나 고민하는 출판사에게 이 리뷰가 약간의 보탬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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