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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정소연, 창비, 2015년 10월

영희 씨의 옆집 사람

赤魚

<옆집의 영희씨>는 SF, 굳이 말하자면 과학기술보다 사회상이나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는 소프트 SF에 속한다. ‘옆집에 사는 이웃’이 풍기는 일상성과 SF라니, 어딘가 어색한 조합 같다. 그런데 책에 수록된 단편들을 읽어가다 보면 이 어색할 것만 같은 조합이 희한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작품 속의 인물들이 당면하는 현실이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미래에 곧장 투영함으로서 SF적인 배경이 주는 비현실성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낯선 미래가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래서 문득 사람 사는 곳은,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는 똑같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사는 곳은 똑같다.’는 말이 종종 경험적인 진실로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이 지닌 욕구가 다양한 한편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입고, 숨 쉬는 기본적인 욕구부터 자아를 실현하려는 고차원적인 욕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구를 지니며 이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옆집의 영희씨>에 수록된 작품들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욕구는 소속의 욕구 혹은 그러한 욕구의 좌절로 나타나는 소외다.


소외된 이방인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일상을 영위해 나가지만 대개 이방인으로 겉돈다.「디저트」에서 보여 지는 화자의 세계는 오로지 K와의 대화다. 그런데 ‘나’는 결말에 이를 때까지 K가 계속 나열하는 여자 친구들의 이름에서 소외된다.「앨리스와의 티타임」에서 주인공은 아예 한 시대에 온전히 속하지 않고 여러 시대를 오가는 시간여행자이며, 「귀가」의 주인공은 화성인으로 살아가는 지구인이다.「우주류」의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우주인이 되는 꿈을 쫓아가지면 불운한 사고로 인해 장애를 입게 되면서 우주인이 될 기회에서 소외된다. 그 외에도 지구인 틈에서 지구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외계인(「입적」), 외계인 이웃(「옆집의 영희씨」), 신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친구(「처음이 아니기를」) 등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외되거나 그 세계에 소속되지 못하는 인물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외되는 원인은 주로 뚜렷이 외적으로 보이는 다른 이들과의 차이이다. 「비거스렁이」의 주인공처럼 내적 부적응으로 인해 발생한 소외감 때문에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주인공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형태나 외모 때문에 이방인이 된다. 이들은 장애인, 외계인, 성적 지향 등으로 인해 다른 이들과 구분되며 그로 인해 차별 받고 이방인으로 겉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집중하는 ‘소외’는 내면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한 것이며 차라리 부당한 차별에 가깝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외당하고 차별 받는 인물은 그 세계를 부정하거나 다른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경우는 영웅 신화나 현대적인 히어로물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전복하고 구원하는 영웅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회복한다. 즉, 그들을 소외시켰던 질서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집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주로 후자에 가깝다. 이들은 소속한 사회를 전복하는 혁명가나 영웅이 되기보다 스스로가 속할 수 있는 세계를 계속 탐색해 나간다.


세계의 변화를 위한 인물들의 노력

작가가 영웅적 행위에 대해 취하는 회의적인 태도는 「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재회」의 주인공 수미는 우수한 성적으로 비행사 시험을 통과하리라 예견되는 학생이다. 그런데 그녀는 시험 도중에 여객선의 구조요청을 받게 되고 이들을 구조하느냐 일생에 한 번 뿐인 시험을 포기하느냐는 기로에 선다. 많은 영웅들처럼 그녀도 여객선을 구조하는 이타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전형적인 영웅처럼 승리자로 귀환하지 못한다. 여객선 구조 후에 그녀가 얻는 것은 그녀의 선택을 아쉬워하는 선생의 질타와 시험 낙방 그리고 꿈을 이룰 수 없게 된 패배자의 삶이다. 자신의 삶을 희생한 선행이 보답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영웅 신화와 교훈이 이타적인 희생의 가치를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선행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현실 속에 비일비재하다. 차별 받는 소수를 지지했다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집단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타인의 목숨을 구한 행위의 대가로 평생 남는 심각한 장애를 얻기도 한다. 불의에 맞서다가 궁지에 몰리는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희생을 동반하는 이타적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재회」에서 수미의 실패를 지켜보았던 옛 남자친구 형진 역시 그렇다. 그는 구조를 요청하는 여객선이 자신의 비행사 시험 중에도 나타날까봐 노심초사했다고 말한다. 수미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이 쉽지 않음을 드러내는 솔직한 고백이다. 게다가 수미의 선택 후에도 비행사 학교의 불합리한 평가체제가 유지되는 것에서 보듯이 어렵사리 이타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만 희생될 뿐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개인의 영웅적 선행이 불발탄에 불과하다면 세계와 불화하는 이방인들은 그들을 향한 차별과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차별과 부조리가 없어질 때까지 거대한 사회에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와 맞서는 일상적 실천과 연대

「개화」에는 감시하는 사회의 압제에 저항해 유기체 공유기를 심고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점에서 보면 이들은 사회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공동체이다. 하지만 작가가 초점을 두는 부분은 투쟁이 아니라 연대이다. 「개화」에서 사람들이 저항하는 방식은 투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하다. 유기체 공유기의 씨를 심고 가꾼 후에 다시 그 씨를 퍼뜨리는 행위의 초점은 그것의 결과보다 과정, 씨를 매개로 하여 맺어지는 사람들 간의 연대에 있다. 
이와 같은 사람 간의 연대는 여러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 지구인보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페이아인이 등장하는「입적」에서는 입양한 아이가 페이아인임을 알게 된 양부모가 페이아인에 대한 선입견을 접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친다.「마산 앞바다」에는 성적 정체성을 감추고 있던 주인공이 같은 레즈비언 후배를 만나 연대한다.「앨리스와의 티타임」에서는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동료의 성격을 지닌 앨리스 셸던 부인과의 만남이 등장한다. 그리고 「비거스렁이」에는 마침내 주인공을 가장 잘 이해해 존재, 균형자가 나타난다.
인물들의 연대는 거대하거나 조직적이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이고 소박한 관계나 만남에 가깝다. 그런데 그토록 평범한 연대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시간여행자와 앨리스와의 만남은 알츠하이머 병의 치료법의 발견으로 이어지고(「앨리스와의 티타임」), 화성에 입양되었던 주인공은 지구인 가족과의 접촉을 계기로 양부모를 향한 새로운 가족애에 눈을 뜬다(「귀가」). 외계인 이웃과의 만남은 외계인에 대한 선입견을 벗고 새로운 관점을 얻게 하고(「옆집의 영희씨」), 커밍아웃한 용감한 후배와의 만남은 이방인의 고독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암시한다(「마산 앞바다」).
이처럼 사람 감의 연대가 이끌어 내는 마술적인 변화는 사회의 변화가 극적인 투쟁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에 기반을 둔 작은 실천과 연대에서 나아옴을 암시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물들의 소외가 해결되는 결말은 작가가 꿈꾸는 사회의 이상향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을 둘러싼 사회는 예외 없이 부조리한 차별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가득하다.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습격해서 빼앗아가거나(「처음이 아니기를」), 다른 이들과 외모나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거나 소외 당하고 때로는 기회를 빼앗긴다. 또한 2부 카두케우스 편에 등장하는 비행사 시험 같은 비인간적인 경쟁에 내몰리기도 한다. 2부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오로지 시험 점수나 자격증 개수와 같은 숫자로 자신의 존재를 정량화하여 증명하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나 행복을 결정할 것이라는 거짓말이 진실로 여겨지는 곳이다. 이러한 세계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바로 이 사회의 초상을 닮아있다. 그래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방인으로 겉돌며 끝없이 존재에 상처를 받고 있는 독자는 인간적 만남과 연대가 만들어내는 따스한 결말에 위로를 받으면서 문득 잊고 살던 가치와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영희씨의 옆집에 사는 당신

다시 표제작으로 돌아가서 옆집의 영희 씨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이 작품집의 주제를 표제작의 제목에 모두 함축해 놓은 것 같다. 옆집엔 영희씨가 살고 있다. 그리고 영희씨의 옆집엔 당신이 산다.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신체적 장애, 성적지향,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하지 않고 섬세한 배려로 영희 씨를 맞아주고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이웃으로서 말이다. 만약 언젠가 차별과 소외가 없는 더 나은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은 영희씨의 옆집, 바로 당신의 집일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아닐까.

댓글 2
  • No Profile
    유이립 16.01.02 19:24 댓글

    읽어 볼게요. 책 많이 팔리시길 빌어요!

  • No Profile
    pena 16.01.03 02:22 댓글

    담담한 어조로 아주 무겁거나 애틋하거나 아픈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예기치 않게 감성이 더 자극되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정소연님의 이후 작품도 기대합니다. 


    이토록 의외인 필진의 이토록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리뷰라니. 적어님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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