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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런던

차이나 미에빌, 김수진 옮김, 아고라, 2011년 5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1. 좌파 괴기작가, 영어덜트로 진출?

 차이나 미에빌은 이제 신진기예라는 수식도 어울리지 않게 된 어엿한 중견작가다. 이전에도 로커스상, 영국 환상문학상, 아서 클라크상 등을 수상하며 두각을 드러내다 2009년 『이중도시(The City & the City)』로 휴고상과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타면서(네뷸러상은 후보) 장르계에서 무시 못 할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해당 작품은 신생 출판사 아작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하자.
 그 전인 2007년에 낸 장편인 본작 『언런던』은 그의 비블로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어덜트 장르? 차이나 미에빌이 청소년 소설을 냈다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모르는 이라면 우선 이 괴짜 작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다.

 우선 작가 소개에도 언급했듯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사회주의 노동당 당원이라는 점과, 톨킨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판타지를 비판하고 러브크래프트의 전통을 잇는 이른바 ‘뉴 위어드’ 작가의 일원이라는 이 두 가지가 그를 설명하는 커다란 테마가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도시’. 그의 작품들 대다수의 주요 무대가 도시라는 점. 실제 런던 혹은 런던과 비슷한 가상의 도시를 소설의 배경으로 주로 다루는데 그의 대표작인 〈바스-라그 시리즈〉는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국가를 무대로 하고 있다. 뉴크로부존은 이름 앞에 붙는 ‘뉴’를 보면 알 수 있듯 개척지라서 언뜻 뉴욕을 연상할 수 있겠으나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스팀펑크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 후반의 분위기, 우중중한 기후, 오래된 역사로 인해 생긴 난개발과 슬럼가 등 영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더 많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데뷔작 『쥐의 왕』 역시 던전처럼 된 런던 옛 지하철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등 그의 장단편 상당수가 런던을 무대로 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적어도 도시 판타지라는 장르를 말할 때 차이나 미에빌은 빼놓을 수 없는 대표선수인 셈이다. 본작도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런던의 지하에 있다는, 일종의 거울도시인 언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영어덜트라니?

 소설에서 보이는 과격하고 잔혹한 내용, 권선징악을 동화라고 폄하하는 발언, 톨킨류 판타지를 강하게 비판하는 등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영어덜트 즉 청소년 소설 출간은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해리포터 열풍의 본토는 역시 다른 건가? 그 역시 시류를 따라가는 건가? 상업적 이익을 좇은 결과일까?

 이런 우려를 품었다면 안심하시길.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괴짜 좌파 괴기소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의 본색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실 원서를 보면 표지부터 딱히 청소년을 끌어들일 모양새는 아니고, 근거는 없지만 성인 독자─원래 미에빌의 독자를 포함해서─들이 더 좋아했을 거라 추측된다. 우리나라 번역 출판본 역시 일반 소설로 나왔고 딱히 청소년층을 노리기 위한 시도는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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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 표지. 청소년 소설이라기엔……



2. 언클리셰와 순화된 기괴함

 소설의 도입부는 익숙하고 전형적이다. 위키백과처럼 굳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주인공임을 온갖 징조와 분위기로 표현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은밀하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대놓고 네가 예언된 주인공이며 곧 일어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정해진 영웅이며 구세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수준. 너무 노골적인 영웅설화 같아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1권의 중반쯤에서 의도적인 장치였음을 납득할 수 있다.
 예견된 영웅 ‘슈와찌’가 부상을 입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뿐인 슈와찌는 친구와 함께 왔을 때처럼 당혹스러움만을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그럼 이게 뭔가, 주인공이 승리가 아니라 패배와 좌절을 겪고 아무런 성취와 교훈이 없이 끝난다고? 아동 혹은 청소년 소설이라면 나와서는 안 될 이야기 아닌가? 게임으로 치면 절반도 못 가서 게임 오버가 되고 컨티뉴도 없이 그대로 게임 진행을 포기한 셈인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왓슨 역할─능력자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바보짓하고 감탄하며 가끔 해설을 보태는 조수─인 줄 알았던 아이 디바가 호기심과 책임감, 그리고 무엇보다 큰 용기를 품고 언런던으로 돌아가 모험과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조역인 줄 알았던 캐릭터가 주역이 되면서 진짜 영웅이 누구인지 독자들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2권 중반부까지는 다시 독자들의 기대에 충족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주인공이 동료들을 모아 모험을 떠나고, 아이템을 얻고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운다. 언런던의 수많은 억압받던 이들이 진실을 깨닫고 일어나 전쟁에 동참한다. 결말은 굳이 스포일러 운운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가 누군가. 기대했던 결말로 순조롭게 끝나는가 싶더니 짧은 에필로그에서 반전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흥미로운 전개를 펼쳐 보이며 현재진행형으로 막을 내린다.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일 줄 알았던 언런던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를 통해 끝나지 않을 것임을 호소한다. 얼핏 속편을 노린 열린 결말인가 싶기도 했지만─개인적으로는 속편이 안 나온다는 쪽에 걸겠다─ 그보다는 디바의, 그리고 독자─아마도 대상 독자층인 청소년─에게 언런던이 아닌 현실에서의 싸움은 계속 될 것이며 이에 동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걸로 보인다.
 인터뷰에서 ‘일부러 좌파적 메시지를 넣지는 않으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작품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 차이나 미에빌이니만큼 이런 결말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일반 소설보다 더 교훈이나 철학을 강조하는 청소년 소설의 특성상 노리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담길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결국 쩌리와 루저들이 모인 언런던은 환경오염, 부정부패, 자본주의의 폐단이 담긴 쓰레기통이며 현실의 문제는 그 뚜껑을 닫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알고 있을 작가는 언런던에서의 승리로 원인이 제거된 것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다. 살인 스모그의 원인도 결과도 모두 언런던이 아닌 현실의 런던에서 일어나는 일인 셈이다. 따라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려면 디바(즉 독자)는 런던에서도 싸워야만 한다. 어떻게? 소설에서처럼 진실을 전파하고(프로파간다)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아(단결) 싸워서(투쟁)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혁명).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니 운동권 좌파 소설의 규범처럼 되고 말았으나, 실제로 읽으면 흥미로운 모험담을 결코 잃지 않는다.

 이렇게 클리셰로 시작해서 클리셰인 듯하다가 클리셰를 뒤집는 표현을 ‘언클리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런던인 듯 런던 아닌 런던 같은’ 언런던처럼 말이다.
 덤으로 굳이 길게 쓸 필요 없어 언급만 해놓자면 작가의 장기인 기괴함(weird)은 많이 순화되었다. 영어덜트란 이름을 달고 나온 만큼 작가가 원했든 아니든 필연적인 결과겠지만.


3. 두 명의 선배 작가

 읽다 보면 아무래도 두 명의 작가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 발터 뫼르스와 닐 게이먼.
 본서의 삽화를 차이나 미에빌이 직접 그렸다는데 그림체나 분위기가 발터 뫼르스와 흡사하다. 그 역시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선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화적인 분위기 속에 씁쓸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풍조차 비슷하다.
 또한 이계로 진입한 듯한 느낌을 주는 환상적인 지하 도시를 그린 『네버웨어』, 아동용을 표방했으나 어둡고 심오한 이야기로 성인에게 더 호평받은 『코랄린』 등 닐 게이먼 작품의 영향도 느껴진다.
 아무래도 작가 본인이 의식을 했든 안 했든 이 두 선배 작가에 대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언급한 발터 뫼르스와 닐 게이먼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읽은 사람이라면 본작 역시 재미있게 읽을 게 분명하므로 강하게 추천한다. 반대로 본작을 재미있게 읽었고 이 두 작가를 모른다면 마찬가지로 취향에 맞을 테니 읽어보기를 바란다. 다만 닐 게이먼의 장편은 성격과 장르가 천차만별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참고 문서
위키백과 영문판 China Mieville, Un Lun Dun 항목
위키백과 한국어판 차이나 미에빌 항목
차이나 미에빌: 괴물에 대한 마륵스주의적 이해 (Socialist Worker)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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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6.02.05 05:32 댓글

    리뷰들을 읽어보면 끌리는데 아직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차이나 미에빌이네요. 입문작을 골라달라고 한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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