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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기생체

콜린 윌슨,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2012년 11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콜린 윌슨은 비평가로 더 유명하며 『아웃사이더』, 『잔혹』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다만 그가 미스터리, 오컬트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폴라북스에서 김상훈 기획으로 외국 SF를 출간하는 〈미래의 문학〉 시리즈 첫 번째 작품으로 하필이면 콜린 윌슨의 러브크래프트 오마주 소설을 출간했다는 사실에는 여러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콜린 윌슨이 과학소설을 썼다는 점을 어필하며 시리즈 제목인 ‘문학’을 강조하고,  SF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닐까.


외적으로는 윌슨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은 후 “이런 거 나도 쓰겠다” “그럼 네가 써봐라” “그래서 써봤습니다”라는 재미있는 경위를 거쳐 탄생했으며, 내적으로는 1994년부터 2007년에 걸쳐 일어난 일을 이후 2014년에 출간된 기록으로 소개한다는 설정을 가진 액자소설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에는 작중 시기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201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는 우연이다.
시대 배경은 집필 당시보다 미래지만 주인공이 영국인이고 죽은 지인의 원고에 남긴 수수께끼 같은 기록을 발견한다는 점, 그리고 발굴 도중 맞닥뜨린 불가해한 사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19세기 고딕 및 모험소설의 클리셰 오프닝의 완벽에 가까운 재현 혹은 패러디다.
여기서 중간에 러브크래프티언 호러로 빠졌다가 동양의 선적인 깨달음을 통해 서양식 초능력(사이코키네시스)을 습득한 주인공이 ‘마음의 암’이라 부른 정신기생체와의 싸움에 돌입하고, 동료를 늘리며 때론 잃기도 하면서 싸우다가 마지막은 『타이거! 타이거!』, 『유년기의 끝』 등을 연상시키는 SF스러운 장대하면서 여운이 남는 결말로 끝난다.


사실 철학적인 사변이 많이 들어가서 중간 중간 읽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콜린 윌슨이라는 독자가 좋아하는 요소를 잔뜩 집어넣어 쓴 자기만족형 혹은 자기취향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서문에서 자화자찬했듯이 ‘보통 장르소설보다 훨씬 높은 지적 수준을 갖고 있으면서도 해당 장르 독자들을 위한 읽는 재미도 배려했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전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작가가 SF에 관련된 소재를 노골적으로 도구로 쓰고 있음이 훤하게 보이며, 더구나 그 도구라는 것들도 유사과학과 오컬트라 불리는, 이른바 진지한 SF나 하드SF에서 쓰지 않거나 경멸하는 소재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갖다 쓰고 있다는 점에서 SF팬덤의 평가가 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러브크래프트에 영감을 받았다거나 오거스트 덜레스와의 서신이 창작의 계기라는 서문만 보고 착각하기 쉽지만 러브크래프트는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본문 중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같다며 직접 인용되거나 ‘차토구아인’ 등 몇몇 용어를 따왔으나 내용상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음은 미리 밝혀두어도 무방할 것 같다.


오히려 이 소설은 러브크래프트보다 새로운 능력을 얻은 인간의 이야기며 인류 진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한 존』, 『슬랜』, 『파괴된 사나이』의 뒤를 잇는 초인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장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고 본작의 인물들은 후천적인 노력과 각성(!)으로 초능력을 손에 넣었다는 차이점은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각성과 득도에 가까운 깨달음, 그리고 결말을 보면 『타이거! 타이거!』와 제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윌슨이 이들 작품에게서 받은 영향이 엿보인다.

 

다만 윌슨이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공포를 다뤘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윌슨은 러브크래프트를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며 그가 만약 유럽에서 부유하게 자랐으면 펄프의 클리셰가 사라지며 환상성이 강한 작품을 썼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바로 이 작품이 그런 글이라는 것이다. 같은 ‘아웃사이더’지만 너무나도 다른 인생을 산 러브크래프트와 윌슨의 차이가 작풍의 차이를 낳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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