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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월야환담: 채월야

2003.11.28 22:2811.28





bluewind08@hotmail.com

   작가 홍정훈의 작품들, 그리고 월야환담

  [월야환담: 채월야](이하 [월야환담])은 [비상하는 매], [더 로그]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홍정훈(휘긴)의 완결작으로서는 세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 외에 무협 꽁트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던 [흑랑가인]과 출판사와의 트러블로 인해 중도하차한 [13번째 현자], 그리고 현재 연재중인 [발틴 사가]가 있지만 일단은 완결된 작품을 중심으로 보기로 하겠다.
  한국 환타지계에서는 초기 작가 중의 한 명으로, 현재까지도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인 홍정훈의 작품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닌다. [비상하는 매]와 [더 로그]는 보기 좋은 이름만 몇 개 빌려와서 쓰는 식이 아닌 TRPG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짜여진 세계관 위에서 쓰여졌으며, 격투기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에게 공통되는 특징이지만 현란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을 쓰고, 인간 불신 주의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나 권력과 종교 등, 지배층에 대한 뿌리깊은 조소와 불신을 깔고 있다. 일단 독립된 이야기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하나 하나가 다른 커다란 이야기의 일부라는 점도 부족하지만 특색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더 로그]는 ‘레이펜테나 연대기’의 일부였으며, [월야환담]도 후속작 [월야환담: 창월야]가 있다. 또한 파워레벨이라고 할까, 상대하는 적들의 능력이나 주인공의 능력이 초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이런 점은 장점도 될 수 있고, 단점도 될 수 있다. 그의 글을 비판하는 여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게임적인 구성이라는 것인데,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등장인물들의 능력을 수치화 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해두겠다. D&D 룰에 기반을 둔 [비상하는 매]와 [더 로그]에서는 이런 점이 두드러졌으며 등장 인물들을 룰에 따라 몇 레벨, 공격력은 얼마, 방어도는 얼마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게임적인 구성의 글은 대개 모험기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주인공은 전투나 이벤트를 통해 경험치를 습득하여 능력을 성장(레벨업)을 하는 단순한 구성을 취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험기 형태를 취하는 소설의 대부분이 가지는 구성이다. 그러나 게임 룰을 기반으로 한 소설에서는 그 게임 룰에 따른 캐릭터의 수치 탓에 게임 룰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는 역설을 낳게 된다. 게임 룰은 전투력을 비롯한 캐릭터의 외적 성장인 면에서는 충실하지만 내적인 성장을 받쳐주지는 않는다. 퀘스트―――성장―――더 어려운 퀘스트로 이어지는 구성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읽어서 재미가 있으면 되는 것이니. 그러나 단순한 킬링 타임용 소설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저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는 작가 스스로도 인식한 듯 보이며, [13번째 현자]부터 게임룰을 따르지 않는 소설을 쓰려는 노력이 보인다. [월야환담]의 연재가 시작될 때 반가워했던 점도 작가의 기존 작품, 그리고 현재 나오고 있는 무수한 중세 배경(환상과 왜곡으로 점철된 중세기는 하지만) 소설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월야환담]도 거기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기존의 작품과 다른 시도를 하면서 작가가 가진 한계점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단점들

   [월야환담]의 스토리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일단 주인공 한세건의 복수극으로 시작하며,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 가는 내러티브도 비교적 흔한 소재이다. 흡혈귀가 적이라는 것도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다. TRPG룰을 기반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게임적인 구성이 유지되는 것도 여전하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 세건이 스스로를 비웃었듯이 “흡혈귀를 사냥해 돈을 벌고, 돈을 벌어서 더 좋은 장비를 구입하고, 그 장비로 다시 흡혈귀를 사냥해서 돈을 버는” 과정의 끊임없는 반복이며, 흡혈귀들에게 빠른 재생력과 초인적인 육체적 능력, 그리고 다양한 사술을 주었듯이 반대편에 서는 흡혈귀 사냥꾼에게는 사이케델릭 문과 총화기를 주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흡혈귀들에게는 VT라는―――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고 작중에서 수없이 주장하고는 있지만―――전투력에 대한 수치가 주어져 있으며 트레이딩 카드 게임의 캐릭터처럼 24인의 진마는 각각 독특한 특수 능력이 부여된다. 약한 상태에서 시작해 차츰차츰 강해져가는 주인공,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 전투를 통해 벌어지는 점도 같고, 마법 아이템이 총화기로 대체된 것을 제외하면 다양한 무기를 얻고 활용하면서 더 강해져가는 주인공의 모습도 그렇다.
   단점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약과 폭주족, 오컬트와 흡혈귀, 각종 현대식 총화기와 격투기에 대한 작가의 지식을 마구 마구 섞어 버린 탓에 출판된 어떤 국내 환타지와도 다른 독특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아진 설명 탓에 몰입도를 떨어뜨리며, 효과음을 사용하며 박진감 넘치게 묘사되는 전투씬도 좋지만 지나친 효과음의 남발로 역시 읽기가 어렵다. 지나치게 많아진 캐릭터 때문에 몇몇 주연급을 제외하면 비슷한 전형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문제점이다. 지나치게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려던 탓에 작품 자체의 완결성은 전작에 비해서도 떨어진다.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너무나 많으며,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너무 많다. 속된 말로 줄여서 말하면 난잡하다고 할 수 있겠다. 흡혈귀의 눈물을 찾는 실베스테르의 이야기는 그 이유도 나오지 않았고, 달성되는 법도 없었으며 테트라 아낙스의 지배를 뒤집기 위한 팬텀의 음모도 그렇다. 진마 창영과 정야는 진마들이 한국에 모이는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 이상으로 둘의 도피행각이 차지하는 분량(비중이 아니다)이 길어졌다. 이 모든 것은 작가가 연재를 마치면서 하는 한마디로 해결되기는 한다.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월야환담: 창월야](후속작)에서” 독자의 입장에서 그 의문들이 풀리길 바라면서 후속작을 즐겁게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월야환담]처럼 템포가 빠른 소설을 읽고 난 후에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감출 수 없다.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들처럼 보면서는 즐겁지만 보고 난 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듯한 느낌이니까. 후속작을 위한 프롤로그 같은 느낌은 엔딩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김성희의 등장으로, 성공한 사람이 절대로 없다는(그러나 언제나 주인공은 성공하는) 수술을 통해 흡혈귀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사건 해결은 여태까지 달려온 광기어린 주인공의 행각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는 뜬금없는 방법이었다. 후속작을 위해 살려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러나……

  [월야환담]은 순수성에 대한 고민이고, 비판이다. “그렇다면 울어봐,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봐”라는 실베스테르의 전용 대사(?)는 작품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 된다.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안타고니스트 사혁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세건이 마지막으로 한 말도 그것이었다. 거짓 영생을 위해 흡혈귀가 되고 생존을 위해, 혹은 새로 얻은 힘을 과시하며 살육을 즐기기 위해 피를 빠는 흡혈귀나, 돈을 위해 흡혈귀를 사냥하는 흡혈귀 사냥꾼이나 전부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흡혈귀와 흡혈귀 사냥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는 영웅, 부패한 경찰, 재능의 불충분을 약물로 때우려는 예술가, 사이비 종교단체 등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 현대사회에 대한 이런 비판과 조소가 지나치게 넓은 부분을 다루려다 보니 전형적인 경우에만 국한되어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주인공인 세건 역시 마찬가지다. 결벽증에 가까운 증오심으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지만 그것 역시 어떻게 보면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며, 그런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주인공이 선택하는 방법 또한 단순한 폭력일 뿐이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순으로 점철된 주인공의 태도는 반면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벼랑 끝으로 돌진하는 듯한 주인공의 광기와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은 월야환담을 이끌어 가는 마력이기도 하다.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제의식이라고 할 만한 순수성,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없기에 모순에 빠지고 마는 캐릭터들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수성에 대해서 작가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언제나 죽음을 갈망하는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평범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는 듯한 세건의 태도가 그렇고, 흡혈귀가 되면 죽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베스테르에게서부터 도망치며 삶을 구걸하기 위해 울지는 않을거라고 외치는 세건의 태도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쩌면 결국 살아가면서 타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 가는게 나은거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이함, 그리고 가끔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는 하지만 놓치고 있지는 않은 주제의식, 매력적인 캐릭터 같은 것은 [월야환담]의 특징이고 장점이다. 천편일률적인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자신에게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변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작가 홍정훈의 노력 역시 그렇고. 언제나 약간씩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보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다음에는 더 좋은 작품을 써주기를 기대하면서 얼렁뚱땅, 되는대로 늘어놓은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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