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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운명의 딸

2003.07.26 02:4907.26



Filia@hitel.net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운명의 딸]은 기록주의적 소설이자, 페미니즘 소설이며 또한 마술적 리얼리즘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다.
   사실 이 소설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과연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 또한 환상문학의 반경 내에 포함시킬 만한 것인가. 그리고 이 소설이 정말 환상문학인가.
   아마도 PC통신상의 환타지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들의 눈에는 이 소설은 일반소설과 다를 바 없이 보일 것이다. 이 소설엔 초인적인 주인공도 없으며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볼 수 있는, 현실에서 살짝 비켜간 기괴함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굳이 이 소설과 동족인 소설을 찾는다면 마르케스나 호르헤스보다도 미국의 여류작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을 정도이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매우 흡사하다. 강인한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녀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있다. 그녀는 굴곡 많은 역사의 흐름 속을 희망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그러면서 소녀였던 여주인공은 여자가 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굳이 [바람과...]와 [운명의 딸]의 차이점을 찾자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차이와 [바람과...]의 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는 대 농장주의 딸이며 남부지방의 숙녀였다는 점이고, [운명의 딸]의 주인공인 엘리사 소머즈는 비누박스 안에 담겨져 버려진 인디오 혼혈 고아 소녀란 점이 틀릴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차이점 때문에 플롯적으로 매우 유사한 소설이 색다른 주제를 담게 되었다. 불 같은 성품을 지닌 스칼렛 오하라가 북쪽의 양키들로부터 자신의 농장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했다면, 가진 것이 하나 없던 엘리사 소머즈는 자신의 사랑을 찾아 멀고 먼 이국의 땅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스칼렛에게는 자신이 여성이며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기가 되었던 반면, 엘리사에는 자신이 여성이며 인디오 혼혈이란 것이 이중의 구속이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자신의 이름을 엘리아스로 바꾸고 남장을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타오 치엔이란 이름의 중국인(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백인이 아니므로 차별을 받는 인종) 선원을 만나 목숨을 구원 받는다. 그녀는 그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랑 때문에 그를 남자로 여기지 못한다. 게다가 둘은 다른 인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엘리사가 첫사랑의 연인 호아킨 안디에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로 맺어진다.
   어찌 보면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이런 패턴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에서 지겹도록 반복되어왔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에서 문학적 품격을 더해주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의 관계가 외부와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중점을 이룬 로맨스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엘리사와 타오 치엔의 관계는 주변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고 그것들을 회피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안으로 녹여내며 자신의 성장을 위한 질료로 삼는다. 사랑이야기는 사랑이야기로되 캐릭터들의 자신의 본분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에서 호흡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의 딸]의 메인 플롯은 분명 엘리사의 사랑이야기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조연들도 간과할 수 없는 매력들이 넘치고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관념의 감옥 속에서 안주한 채 다른 사랑을 거부하는 미스 로즈나 때론 엘리사를 다그치지만 결국 엘리사의 도피를 돕는 미스 프레시아, 사랑하는 남자와 도피하기 위해서 수녀원 탈출을 감행하는 파울리나, 매력적인 창부 롤라 몬테스 마지막으로 타오 치엔의 첫 번째 처이자, 타오 치엔의 수호자인 린. 이들은 약하면서도 서로 다른 의미로 강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제약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유롭고자 노력하는 능동적인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 중 흥미로운 것은 린이란 캐릭터인데, 그녀는 사실상 엘리사와 타오치엔이 만난 시점에서는 망자로서, 딱 한번 유령으로 등장한다. 타오 치엔의 회상장면에서 그녀는 전족을 한 작은 발을 지닌 버드나무 가지처럼 하늘거리며 걷는 중국여인이다. 그녀는 타오 치엔을 사랑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여인이었지만, 지나친 사랑(?)으로 건강을 해치고 유산을 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본래는 한의사였던 타오 치엔은 그 후, 피폐한 생활을 하다가 존 소머즈에게 납치되어 선원이 된다. 그 후 그는 늘 그녀를 그리워했고 그녀의 영혼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밀항 중 유산을 한 채 죽어가는 엘리사를 보며 그녀를 저버리려는 순간, 린의 영혼은 생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를 도우라고 말한다.
   그때까지의 소설의 흐름이나 분위기에서 봤을 때, 린의 영혼이 현현하는 그 순간은 참으로 이질적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벌어졌던 사건들은 엘리사를 둘러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갑자기 초자연적인 린의 영혼이 등장해서 사건의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독자로서는 그 순간 매우 당혹스러웠다. 린은 분명히 죽었는데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대체 그 린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실제로 린의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아니면 타오 치엔의 상념 중 하나가 린의 모습을 입고 나타난 것으로? 그것도 아니면 타오 치엔의 마음 속에 있던 아니마가 린의 모습으로 실체화된 것인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닌지조차도 궁금했다.
   그러나 린의 유령이 사라진 후의 묘사된 상황들은 그녀의 현현이 타오 치엔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주변에 떠도는 그녀의 향기 그건 분명히 린이 다시 그곳에 나타났다는 의미였다.
   그때까지 이 소설을 기록주의적 문학작품으로 판단하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다음 찰나에는 바로 그 장면에서 소위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적 성향이 표출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이 소설의 현실은 칠레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부터 빌어온 것이지만, 그 현실은 가상의 세계와 교묘하게 닿아있다. 그리고 가상의 세계를 들어냄으로써 소설은 소설로서의 현실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사실적인 소설의 현실이면서도 설화나 신화의 세계와도 같은 가공의 소설적 현실과 인접해 있고, 그것이 무리 없이 드러나는 것이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닐까.
   무지한 상태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겐 마술적 리얼리즘적 장면이 더욱 마술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어느 기성문단의 문학 작가가 말했다. 현재의 환상문학은 현실을 환상으로 아우를 수 있는 공력이 부족하다고. 그것이 가능한 소설이 나올 때야 말로 환상문학은 우리나라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작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정한 분위기의 특별할 것 없는 주제들을 담고 있는 소설들을 보면서, 최근의 환상문학계에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에 빚을 진 것이든, 동유럽의 작가들의 음울한 환상에 기댄 것이든 간에,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 더 많이 보고 배워야 할 예비작가들에게 이런 소설도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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