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서정오, 현암사, 2003년 7월



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 서점을 통해 ‘신화’ 분류에 들어있는 책의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예상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했으며, 가장 잘 팔린 책 열 권 중에도 다섯 권이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팔린 책의 권수를 가지고 매긴 순위만 가지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이 결과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빨리, 자주, 많이 접하며 국내 출판 시장은 끊임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생산해낸다. 한국 신화보다 훨씬 낯익고 친근한 것은 물론이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우리 것을 찾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꾸준히 발전하고 많은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어를 잘해야 먹고 살기 쉬운 세상이고, 어지간한 학문을 공부하려면 서구 학자들이 서구 중심으로 정립해놓은 이론을 소화하고 끼워맞춰야 하는 실정이다. 그런 만큼 서구인들이 고전으로 꼽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인기일 수밖에. 게다가 뒤늦은 인정이라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를 달지 않더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 구조는 명쾌하고 쉽고 화려하지 않은가. 그리스 로마의…… 아니 그리스 신들은(로마에도 그리스 신들을 흡수하고 동일시하기 전에 나름의 신화 체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세계 신화 중에서 가장 성질 더럽고 질투심 강하며 로맨스를 즐기는 이들이라는 점도 매력적이고 말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 난무하는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질투와 복수를 생각하면 국내 학부모들이 어떻게 이 신화를 ‘교육적’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읽히려 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 글쓴이는 그리스 신화가 자주 거론되는 데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료의 방대함이다.



   현재 이야기되는 그리스 신화는 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원전으로 하지만 그 외에도 로마 시대에 쓰고 상연했으며 이후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여러 차례 재해석된 많은 희곡이 바탕이 된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미 문헌으로 남긴 원자료가 적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월을 거치며 많은 재해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를 굳이 문헌신화와 구전신화로 나누는 데에 대해 결국 둘 다 근원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현시점에서는 이런 분류가 유용한 것이 사실이며, 여전히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채록한 지 20년이 지나 재해석은커녕 해석조차 완전히 되지 않은 신화와 채록한 지 천년이 지나 수많은 연구와 문학작품을 통해 더 풍부한 텍스트로 거듭난 신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 신화의 경우 고대 문헌에 속하는 자료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정도가 있을 뿐이며 구전신화로 판소리와 민담, 무가 등이 존재한다. 무속이 융성하고 여기에 속한 무가와 설화 등이 풍부한 만큼 이를 따로 무속신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구전신화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 해방 후 근대화와 서구화, 새마을 운동 등의 흐름 속에 묻혔다가 1970, 80년대경 ‘우리 것’과 ‘전통’으로 눈을 돌리고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등을 지정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초기 일본학자들의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발명된’ 전통이 많았던 점, 여전히 채록을 중심으로 할 뿐 다양한 연구의 대상이 된 텍스트가 많지 않다는 점 등 문제점이 산재해 있다. 게다가 국내에 비교신화학이 없고 주로 국문학과 민속학 쪽에서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그리고 이제까지 나온 관련 서적에 한자가 많이 쓰인 것도 한국 신화를 신화학, 혹은 전체적인 신화 공부에서 고립시키는 이유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이 절반을 차지하는 신화학 베스트 10 중에 들어가 있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서정오)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 가지](서정오)의 가치는 작지 않다. 전자는 무속신화, 후자는 민담 중에서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뽑아 쉽고 재미있게 새로 쓴 책으로, 장담하는데 재미있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지지고 엎드려 군밤을 까며 듣는 옛날 이야기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이 신화를 자료로 남기는 데 있지 않고 널리 알리는 데 있는 만큼, 무엇보다도 이야기로서 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에 이야기의 본모습을 살리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그 맛을 살리는 데 더 힘을 쏟았다고 하고 또한 “구전되는 이야기는 한두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것이므로, 글쓴이도 적극 전승과 창작에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썼고, 따라서 고치고 다듬는 일을 크게 겁내지 않았다”고 썼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에 크게 공감한다. 학문적인 신화 연구조차도 상상력을 동원하고 원뜻을 훼손하는 작업을 피하지는 못하며, 넓게 보아 신화라는 텍스트의 가치는 풍성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끊임없이 변주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작업 자체가 이제까지 쌓인 무가와 민담 채록본과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쉽고 재미있고 인기를 끄는 글이 나와줌으로써 다른 다양한 작업이 가능한 여건이 마련된다는 이득도 무시할 수 없고 말이다. (웃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여러 지역의 무가를 넘나들며 뽑은 것으로, 바리데기처럼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할락궁이나 가믄장애기처럼 낯선 이름들도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 다시 작가의 입을 빌리면 “사실 여러 지역에서 독립하여 전해 온 이야기들을 하나의 틀 안에 묶어 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주제넘은 일이요 부질없는 헛손질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우리 신화에 나름의 질서를 얹고 싶었다.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가 거대한 ‘한국 신화’의 틀 안에서 톱니바퀴 구실을 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충분히 값어치 있는 것이라 믿고 한 일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과 꾸지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변명이 붙어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옥황상제 천지왕이 땅 세상의 바지왕과 혼인하여 대별왕과 소별왕을 낳았고 대별왕이 저승을, 소별왕이 이승을 다스린다는 구조나 염라대왕과 각종 저승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생각한 신화 체계가 중국의 신화 구조와 이름을 빌렸을 뿐 의미는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을 시점으로 하여 한국의 무속신화에 관심이 커졌다면. 여러 지역의 무속신화를 두루 묶었다고는 하지만 대별왕과 소별왕(천지왕본풀이), 할락궁이(이공본풀이), 가믄장애기(삼공본풀이), 지장애기(지장본풀이), 사만이(사만이본풀이)와 자청비(세경본풀이), 남선비와 여산부인과 노일제대귀일의 딸에 얽힌 조왕신과 측간부인 이야기(문전본풀이) 등 많은 이야기가 제주도 본풀이에 기반하고 있으니 현용준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나 [제주도 신화]를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여러 무속 용어의 사용이나 무속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조흥윤의 [한국의 샤마니즘]>이 굿에 대해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쓴 입문서이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한국신화]와 같은 개념에 바탕한 면이 많으므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구전신화를 중심으로 한 이 책과는 약간 다른 흐름에 있지만 문헌신화 중에서도 특히 시조신화를 분석하여 무속과 연관시킨 논의로는 유동식의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가 있다. 이 책은 한자가 많아 권하기가 망설여지지만 앞부분에 천신과 산신, 무조신의 관계에 있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글을 볼 수 있으며, 이 분야에서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고대 문헌을 거의 섭렵하고 있다. 물론 같은 분야에 속한 책이라면 어떤 것을 읽더라도 풍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목차
   이승신 소별왕과 저승신 대별왕
   저승차사 강림도령
   옥황선녀 오늘이
   군웅신 왕장군
   오구신 바리데기
   저승 삼시왕 초공 삼 형제
   서천꽃밭 꽃감관 신산만산할락궁이
   농신 자청비와 문도령
   객귀 사마장자와 저승 고지기 우마장자
   별의 신 칠성님과 옥녀부인
   운명신 감은장아기
   마마신 강남국 손님네
   성주신과 지신 황우양 부부
   탄생신 삼신할멈
   조앙신 여산부인과 문왕신 녹두생이
   말명신 도랑선비와 개울각시
   일월신 궁상이와 해당금이
   수명신 사만이
   활인적선의 신, 내일과 장상
   액막이신 지장아기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