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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성스러움

르네 지라르, 박무호 옮김, 민음사, 2000년 3월


ecrir (essensia78@hotmail.com)



숭고한 희생? 거룩한 비극? 웃기지 마. 그딴 건 없어. 다 눈가림일 뿐이야. 원형을 재현한다? 원형이 있는 것도 맞고 재현하는 것도 맞지만 원형의 자리에 있는 것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 인간은 원형을 되풀이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끊임없이 거기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걸 되풀이하는 거야. 그럼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뭐냐고? 그것은 폭력. 원초의 폭력. 폭력. 오로지 폭력. 믿고 싶지 않겠지. 달아나고 싶겠지.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야. 아름답게 포장하지 마. 이제까지 그 허울좋은 학문들이 해 온 게 다 그 눈가림에 포장이지. 그게 아니야. 진실은 이거야. 믿어. 눈 돌리고 싶지만 돌릴 수 없는 이 진실을 믿어.

   이게 웬 주절거림인고 하니 이 책을 읽고 나서 대번에 내 귓전을 때리는 듯했던 말들을 풀어 옮긴 것이다. 아무리 온화하게 풀고 분석하고자 해도 아마 이 위에 써 놓은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하긴 힘들 듯하다. 그래도 한번 시도나 해 보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떼어 보자.

   같은 소재, 같은 주제, 너무나 다른 해석
   르네 지라르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는 정통(?) 종교학자, 신화학자, 인류학자가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실은 같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그 방대한 분량 내내 밝히고자 했던 것이 숲의 사제가 새로운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주기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제의의 흔적이라는 사실이었듯이, 캠벨이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 영웅이라고 역설하면서 그의 희생적 면모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며 밝히듯이, 엘리아데가 모든 성현은 태초 그때에 있었던 일을 본떠서 그때를 다시 사는 것이라고 하며 시베리아의 샤머니즘부터 현대의 기독교까지 넘나들듯이, 르네 지라르의 관심 또한 신화와 신화의 재현, 즉 제의에 있다. 그러나 그가 보는 눈은 그들과 굉장히 다르다.
   이것은 르네 지라르의 출신(?) 탓일지도 모른다. 다른 학자들은 보통 철학에서 시작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신화학, 종교학, 인류학을 판 사람들이며, 다른 분야를 섭렵했다고 하더라도 이쪽의 후광이 훨씬 강하다. 엘리아데는 소설‘도’ 썼다는 것으로 유명하지, 소설가 엘리아데가 신화학에도 조예가 깊더라고 하진 않는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고문서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현대 사상, 프랑스 문학, 프랑스 문화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문적이기보다는 문학적 기질이 더 농후한 사람이다. 첫 저서의 제목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인데, 인간의 욕망과 모방과 심층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부터 나타나되 좀더 문학비평에 가깝다. 르네 지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문학은 신화를 반영만 하고 변형하거나 재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한 구절을 인용하며, 문학을 통해 신화를 이야기하지 못한 전통이 거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 말대로 르네 지라르가 드는 사례는 오지의 관찰 사례, 프로이트 등 다양하지만 주종이 그리스 비극이다. 즉, 문학이다. 신화적 텍스트를 가져다 쓴 문학에서 르네 지라르는 원래의 텍스트에서 약화된 의미를 캐고 진실을 발굴한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지만. 그런데 그 진실이란 것이 매우 거칠다.

   초석적 폭력, 희생위기, 짝패, 희생양, 모방 욕망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은 결론까지 모두 12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필자가 읽고 느끼기에 이러한 장의 분류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르네 지라르의 글은 논리적인 전개에 따라 조직되어 있기보다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씩 나오고 여러 사례를 들거나 이전의 해석들에 반기를 들어가면서 개념의 근거를 드는 식이다. 물론 보통 다른 글도 그러한 순서로 논지를 전개하지만, 르네 지라르의 경우에는 그 순서를 뒤집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이해하기에는 더 좋아 보인다. 그렇게 해서 필자가 이해한 것을 말하기 전에, 이것은 필자가 씹어서 남긴 건더기이며 필자의 삐뚤어진 손으로 빚은 진흙 인형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고, 한 번 읽은 후에 두뇌 속에서 폐기처리한 후 튼튼한 이빨이든 다 빠질 것처럼 흔들리는 이빨이든 자신의 이빨로 책을 베어물길 바란다는 점, 미리 말해 두고 싶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해서 태초이든 어쨌든 어떤 시점에 ‘초석적 폭력’이 존재했다. 그것은 카인의 이마에 찍힌 낙인과도 같이 인간 의식 깊숙이에 남아 있는데, 그만큼 인상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석적 폭력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해서 닥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엘리아데가 태초 그때에 있었던 우주적 시간을 말한다면 르네 지라르는 초석적 폭력에 대해서 말한다. 모든 폭력의 근원에 있는, 시작에 있는 폭력. 엘리아데는 신화가, 제의가 우주적 시작을 재현한다고 말한다. 르네 지라르는 제의가, 신화가 초석적 폭력을 재현한다고 말한다.
   어째서 초석적 폭력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는가? 어째서 계속해서 희생제의를 통해, 희생양이 선택되고 그가 피를 흘리거나 죽거나 상해를 당하는가? 먼저 ‘희생위기’란 것이 도래한다. 이것은 전염병이 만연한 상황일 수도 있고, 왕이 늙은 상황일 수도 있고, 전쟁이 계속되는 시기일 수도 있다. 어떤 현상이든, 어떤 상황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있다. 이 위기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시기이며, 고통을 당할 만큼 사회가 늙거나 오염되었다고 믿어지는 시기이며, 이 오염과 고통을 떨쳐버리고자 서로간에 폭력 의식이 차오르는 시기이다. 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 르네 지라르는 여러 사례를 통해 옛날 사람들은 누구와 누구가 닮았다고 하는 것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다고 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박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개성이나 인격 존중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여겨질 만큼 절실했다. 당신과 누구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그렇게나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 전반의 사람들이 희생 위기가 닥치면 점점 동일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본인들은 서로간의 차이를 두려고 하며 서로간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전왕의 죽음을 두고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벌이는 설전이 “당신이 그리한다면 나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하는 그대로 당신이 그렇게 된다.”는 논조를 띠는 그 예와 같이 두 적수는 똑같은 증오, 똑같은 전략, 똑같은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한마디로 폭력에 경도된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폭력 의식이 차오르고 폭력 의식은 해소될 구멍을 찾아서 헤맨다. 르네 지라르의 표현에 따르면 모두가 서로의 폭력의 쌍둥이가 된다. 이것을 서로의 ‘짝패’라고 이름붙인다.
   모순적이게도 이렇게 모두가 서로의 짝패가 되었을 때 돌파구가 생긴다.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은 그들 중 누구를 택해도 사회 전체와 같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시점 이후로 사람들은 그 모든 폭력과 오염을 한몸에 짊어지고 폭력의 대상이 되어, 해소할 길 없는 이 폭력을 터뜨려 없애 줄 이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다. 또는 만들어 낸다. 그것이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지었거나 혹은 그렇게 의심받거나 몰릴 경우가 많은데, 르네 지라르는 이것이 ‘초석적 폭력’으로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희생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양이나 염소나 여러 가지 다른 동식물을 선정할 때의 기준이 인간에 가까운 것, 인간을 연상시키는 것인 문화권이 상당히 많다. 그것은 인간희생의 흔적이며, 폭력의 대상을 고를 때에 부메랑처럼 다시 복수가 돌아오지 않고 그 한 사람으로 끝나도록 인고가 없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고르던 기준이 한 단계 더 완화된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가면과 축제 또한 희생위기와 희생양, 짝패와 연결시켜서 설명한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가면을 쓴 사람의 정체성과 개성이 사라지고 가면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어 아무리 다른 가면을 쓰고 있어도 모두가 동일해지는 짝패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또한 축제가 기념할 만한 들뜬 행사가 되는 것은, 모두가 폭력에 경도되어 있긴 하지만 모두가 서로의 짝패가 되는 일치의 경험, 그리고 광란의 끝에는 위기의 해소가 기다리고 있는 제의의 절차가 의미가 완화된 채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짝패’와 연관되어 중요한 개념으로 ‘모방 욕망’이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리는 상대를 욕망할 때 상대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분명 아들이 아버지를 모방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버지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이렇게 되면 근친상간 + 동성애가 되는 것인가?!!) 아버지가 욕망하는 것이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어머니를 욕망하게 되고, 아버지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고자 하기 때문에 친부살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희생위기부터 희생양에 이르기까지의 논의가 이제는 거의 다 감췄다고 생각했던 해묵은 딱지를 건드리는 기분이라면, 모방 욕망은 현재도 출혈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쉬는 상처이다. 독창성과 개성을 부르짖는 주제에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이 존재하는 이 모순된 현대를 꼭 짚는 개념으로, 여기야말로 르네 지라르가 문학 비평가로 시작한 강점을 살린 지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따로 밀어내서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필자는 아직 이 ‘모방 욕망’을 책 속의 줄기에 따라 씹어 소화하지는 못했다. 희생위기를 앞두고 모두가 동일해지는 ‘짝패’ 현상의 근거가 된다는 것만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다.

   르네 지라르가 이 연구를 내놓은 지 시간도 꽤나 흘렀고, 필자가 처음 이 저작을 아주 최근에야 접한 것도 아닌데, 아직도 이 저작은 소화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일면 논리적이고 깔끔하기보다는 약간은 난삽하고 논점에서 자주 일탈하는 것처럼 보이며 논지의 전개를 여러 사례에 기댄 르네 지라르의 글쓰기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좀더 본질적인 이유는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맨 첫 문단의 주절거림에서 필자가 받은 충격은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필자에게 르네 지라르는 기존 관념을 비판하는 비판자이되, 견실한 학자 타입의 비판자라기보다는 새로이 등장한 교주처럼 느껴졌다. 모든 성스럽고 거룩한 것의 허상, 그 오래된 포장을 걷으면 폭력과 이기주의와 책임전가의 근육과 혈관이 꿈틀꿈틀 날것 그대로 밖으로 드러난 인간의 추악한 얼굴이 나타난다. 일면 추악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수긍이 가는 얼굴, 수긍이 가면 갈수록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 인간이란 원체 추악하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추악한 일면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이론으로 정당화하고 거룩하게 추켜세우기까지 할 줄 아는 영리한 존재라는 것이 구역질나는 기분.
   그러나 이렇게 자극적이기만 하고 극단적이기만 했다면 이제껏 르네 지라르가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일까? 그것은 인간에 대해서 아직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희생양이 거룩하게 받아들여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써 놓은 르네 지라르의 글을 필자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극단적일지라도 새롭다는 것에서 르네 지라르의 책은 충분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 논지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그 비평적인 눈길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결정적으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극만 추구하는 교주라고 버리고 싶지 않은 이유는 논지와 전혀 상관없는 다음의 한 마디 때문이다.

   “인류 문화의 모든 것을 ‘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희생은 인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말로써 설명되어야만 한다.”

   결국 신화를, 원형을,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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