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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마르치아 엘리아데, 이은봉 옮김, 한길사, 1998년 5월

ecrir (essensia78@hotmail.com)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조셉 캠벨과 함께 신화학 입문에 적당한 학자로 분류되는 학자이다. 신화를 본보기와 같은 것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를 한껏 끌어다 비슷한 것끼리 분류하는 연구 방식 등, 둘은 아주 많이 닮았다. 꽤나 대중성이 있는 신화학자라는 것까지도. 미르치아 엘리아데, 멀치아 엘리아데(사실 미르치아라고 되어 있는 책이 더 많은데, 한 번역자가 엘리아데 본인에게 물어본 결과 멀치아라고 불러달라고 했단다) 등 여러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우주와 역사: 영원 회귀의 신화], [성과 속], [이미지와 상징],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샤마니즘], [종교형태론], [종교의 의미], [신화와 현실]과 같은 책 제목들이 보일 것이다. 이 책들 중 [우주와 역사: 영원 회귀의 신화], [성과 속], [종교형태론]은 시대와 출판사를 달리 하면서 계속해서 재출간되는 스테디셀러이다. 이 세 권의 책은 엘리아데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시간과 신화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여 하나의 명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중심 명제가 확립된 상황에서 소소한 주제들로 들어가서 그 명제를 증명하거나 명제와 관련된 상징들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세 권의 책 중 앞의 두 권과, 실제로는 엘리아데가 썼다기보다는 강의를 묶은 책인 [신화와 현실]이 첫 번째에 속하고, 나머지가 두 번째에 속한다. 두 번째 책들이 예가 풍부해서 좀더 재미있기는 하지만, 엘리아데는 드물게 첫 번째 부류마저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학자에 속한다. 그의 글이 주는 재미는 캠벨이 가진 힘과는 조금 다르다.
   이 글에서는 엘리아데의 중심 명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초기작 [성과 속]을 중심으로 때로 설명을 위하여 그 전작인 [우주와 역사: 영원 회귀의 신화]의 내용을 조금 첨가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엘리아데와 캠벨의 비교, 그리고 엘리아데에 대한 비판을 약간 덧붙이기로 한다.

   신화의 역할: 역사의 공포와 거룩한 실존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일화를 말하고 싶다. 엘리아데의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난, 몇 년 전의 이야기이다. PC 통신 동호회 대화방에서 꽤나 거창하고 진지하게 신의 존재 혹은 종교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졌었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한편에는 신, 특히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편에는 대강 기독교도가 있는 그런 양편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논쟁은 당연히 살벌한 수위까지 나갔고, 얼마 안 되는, 아니 아마도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도 아이는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 아이가 “아무리, 실제로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저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비종교인인 아이들도 모두 수긍했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것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엘리아데는 저런 생각을 이론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분. 엘리아데는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새로운 식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역사에 대한 공포. 앞으로만 나아가지 뒤돌아보지 않으며 어떤 일을 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역사라는 괴물에 대한 공포. 엘리아데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역사의 공포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고 말한다. 적어도 고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역사는 직선적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인들로서는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하는 생각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자시계로 시간을 계산하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을 되돌린다는 생각은 가장 허망된 바람이자 가장 절실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잘못했던 일이나 죄를 저질렀던 시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흘러간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곳의 출구는 신. 신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약속. 그래서 엘리아데는 기독교가 현대인의 종교이며 타락한 인간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재인과 달리 고대인은 어떤 방법으로 저런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는가?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는 주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대인들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거룩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살았다. 보통 연초 등에 그런 시간이 있었는데, 이 때 고대인들은 아득한 옛날에 신들이 했던 일, 세계가 만들어졌던 일들을 재연함으로써 바로 그 시간 속에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이전까지의 자신의 죄와 잘못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무효화되느냐고 현대인의 관점으로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그 시간의 되돌림은 진실이었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자신은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성과 속]에서 엘리아데는 그것을 “거룩한 것에의 참여”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한 역사, 거룩한 이야기인 그들의 시조와 신의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고대인들은 거기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의미’를 주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엘리아데는 우리가 보기에는 환상적이고 실질적이지 않을 것 같은 고대인들의 일과 축제를 “실재”라고,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라고 느끼는 일들을 “공허하고 환상적인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의 삶이 공허하고 환상적인 것은, 그들이 하는 행동에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일하는 것은 그저 살기 위해서, 먹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사소한 쟁기질을 하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조상, 영웅, 혹은 신들이 이전에 보여주었던 일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연한 의식이 있었으므로, 허무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룩함”을 부여함으로써, 허무하고 공허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장황하게 설명한 공포와 그의 극복에서 신화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명색이 신화학 시간인데, 신화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엘리아데는 주욱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시간을 새로이 하고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주는 “거룩한 역사”가 바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엘리아데는, “신화는 거룩한 역사, 즉 시간의 시발점에서 태초(ab initio)에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신화는 그 때에 일어난 일들의 역사이며, 신들이나 반신적 존재들이 시간의 시발점에서 행한 일들을 읊은 것이다. ……신화는 새로운 우주적 상황 혹은 원초적 사건의 출현을 선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창조의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어떤 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어떻게 해서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말해준다”고 신화를 정의하고 있다. 신화를 재연하는 것은 단순한 재연이 아니라,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래서 진정한 인간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화의 영웅이야기를 재연하면서 인간은 실제로 그 영웅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신화는 “실재”이고 이 세상을 “실재”로 만들어주는 거룩한 역사다. 세속적이고 공허한 세상에 거룩한 것이 침입하여 의미있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신화인 것이다.

   엘리아데와 캠벨
   엘리아데에게도 캠벨과 비슷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자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따 왔다는 지적. 그것들을 약간은 억지 식으로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 그리고 캠벨과 똑같은 보수성. 엘리아데 역시 캠벨처럼 여성의 문제나, 어쨌든 신화 속에서 무언가 현재의 가치와는 안 맞는 것이 있다고 해도, 폭력적인 억압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초경을 맞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엘리아데는 초경을 맞은 소녀가 깜깜한 방 안에 갇히는 것을 신화의 본을 따른다는 이유로 정당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가 캠벨보다 약간 맘에 드는 것은, 그가 캠벨처럼 사람들을 교육시키려고 한다거나, 그러니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선동하는 측면이 덜하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강의집이 나왔다고 해도 캠벨의 [신화의 힘]과는 달리 직접적인 대담집이 나오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엘리아데는 대담집 대신 소설을 냈다. 캠벨이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인간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고 인간을 어딘가로 이끌려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반면, 엘리아데는 성과 속이라는, 어떻게 보면 모호한 범주를 설정하고 일상사에까지 종교적 심성을 개입시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에서 멈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캠벨보다 덜 노골적이고 더 섬세한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말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래도 저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것이 현대인의 무력감을 나타내준다면, 엘리아데는 고대인들의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고대인들은 거룩한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무력감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는 것인가? 처음 읽었을 때 엘리아데의 글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고대인의 방식을 조금 더 바람직하게 여기고, 현대인들을 타락했다고 여기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엘리아데는 현대인들이 그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거룩함의 의식을 현대에 재현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는 고대인들이 그런 방법으로 공포에서 벗어났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신화의 개념에 대해서도 이 정의가 꼭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기능을 무시했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신화는 이러이러한 측면이 있고 이러이러한 기능을 한다고 했을 뿐, 엘리아데는 그것이 전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신화라는 말은 열린 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처음에는. 비록 처음뿐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엘리아데의 미덕이다.

   [이미지와 상징],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샤마니즘], [종교형태론]과 같은 엘리아데의 나머지 저작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우주와 역사], [성과 속]에서 이미 확립한 중심 명제를 다양한 실례를 통해, 또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 증명해 나가는 작품들이다. 캠벨에 비해서 예들을 폭력적으로 잘라내거나 패턴에 맞추는 경향이 덜하기 때문에 날것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 예들을 피상적으로 즐기는 게 아니라 그런 증명이 이루어지는 이론적 기반을 알고 싶다면 이 글에서 소개한 두 권의 책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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