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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고사기

2003.08.30 00:0808.30

고사기

노성환 역주, 예전사, 1999년 4월


hermod (german.banpo.or.krshiderk@yahoo.co.kr)



신화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수 만큼이나 많은 정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신화에 관심을 가진 이래,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성한 이야기’를 신화로서 생각해 오고 있다. 이 때 ‘세계의 기원’이란 자연 질서의 기원과 인간 사회 질서의 기원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북유럽 신화나 그리스 신화와 같은 신화에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신화 중 제주도 신화에도 이러한 두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점은 특징적이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현대 한국 영토 안에서 전승되어온 신화는 대개 인간 사회 질서의 기원을 신성시하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 신화의 경우에도 위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자연 질서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는 [주역(周易)], [회남자(淮南子)] 등 중국의 서적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주요한 부분은 일본 기층문화와의 유사성이 강한 동남아시아·태평양 지역 신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실려 있는 많은 정치적 신화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 질서의 기원, 즉 천황 가문의 일본 정복 및 천황제 확립의 기원을 신성화하는 신화들은, 일본 내 주요 신화 서적이 성립되던 7, 8세기 일본 중심부의 정치적 구조 및 정치적 요구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신화에서도 역시 동남아시아 신화와의 공통점이 보이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는 고구려, 가야 등 한반도 여러 나라 및 지역의 건국 신화와 공통점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많은 신화를 보면, 그 신화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계속 내용을 변경해 간다고 한다.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문예출판사, 1995)에는 무문자사회(無文字社會)에서 보이는 그러한 변이 양상이 소개되어 있으며, 수메르―――바빌로니아―――앗시리아로 이어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적 변화 과정에서 신화들이 주인공 신들의 이름을 바꾸어 가는 과정 역시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에서 보이는 신화 내용의 차이들 역시 이러한 시각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양상은 일본 신화에서도 역시 보인다. 즉 일본 신화를 전하고 있는 중요 텍스트인 [고사기(古事記: 고지키)](712),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720), [풍토기(風土記: 후도키)](8세기 초 이후) 등은, 8세기 초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면에서는 상호간에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일본 신화와 역사를 보는 관점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고([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관계는 한국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관계와 비슷하다), [풍토기]는 천황 가문 중심적 입장에서 편찬된 앞의 두 텍스트와 일정 정도의 대립각을 그리면서 각 지방의 신화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 신화의 다양한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들 3종의 신화 텍스트를 모두 보아야 한다. 이 중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한국어 번역은 나와 있고, [풍토기]의 번역은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또한 기존의 [일본서기] 한국어 번역은 주로 역사학적 입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신화의 이해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 따라서, 필자로서는 일본 신화의 기본적 이해를 위해 [고사기]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한국에는 현재 노성환 역주 [고사기](예전사, 1999)와 권오엽 역주 [고사기](충남대학교출판부, 2000) 등, 2종의 [고사기] 번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중 필자가 이제까지 읽어온 것은 일본 신화를 전공한 울산대학교 노성환 교수 역주 [고사기]이다. 이 번역본은 상, 중, 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3분류는 [고사기]의 내용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상권은 거의 순전히 신들의 이야기, 중권은 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천황들의 이야기, 하권은 인간적 성격을 강하게 띤 천황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주요한 일본 신화는 대부분 상권에 실려 있고, 그 밖의 몇 가지 신화적 이야기가 중, 하권에 실려 있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

   [고사기] 상권에서 제시되는 태초의 시작으로부터 천황가문 조상의 성립까지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천지 개벽과 태초의 신들의 출현 → 이자나기노 미코토(伊耶那美命)와 이자나미노 미코토(伊耶那岐命)가 결합하여 일본 국토 및 수많은 신들이 탄생한다 → 이자나미가 죽자 이자나기가 저승을 방문하고, 그 후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스사노오노 미코토(速須佐之男命), 쓰쿠요미노 미코토(月讀命)의 3신이 태어난다 →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의 대립 후 아마테라스가 동굴 속으로 숨었다가 다시 나오고 스사노오는 추방된다 → 이즈모(出雲) 지방으로 내려간 스사노오는 머리 여덟 개 달린 뱀을 퇴치하고 그 지역을 장악한다 → 스사노오의 아들 오쿠니 누시노카미(大國主神)가 이즈모 지방을 다스린다 → 천상의 신들이 이즈모를 점령하고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 미코토(邇邇藝命)가 일본 열도 서쪽 끝으로 강림한다 → 니니기의 자손이자 1대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일본 열도 동쪽으로 진격하여 오늘날의 교토 부근 지역에 도착한 뒤 천황 가문의 통치가 시작된다

는 내용으로 상권과 중권이 이어진다. 이러한 신화적 흐름은 일본 신화의 근본 구조이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일본서기>> 권 1, 2에는 이러한 큰 틀과 어긋나는 많은 단편적 신화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고사기], [일본서기] 수록 신화에서는 아마테라스의 후손 즉 천황 가문에 정복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이즈모 지방에서 작성된 [이즈모국 풍토기(出雲國風土記)]에는, 이자나미 및 이자니기에 의한 일본 열도 창조와는 별도의 (세계) 창조신화의 흔적이 엿보이는 등 천황의 정부에 대하여 이즈모 지방의 독자성이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이렇듯 일본 신화는 세부로 들어갈수록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사기]를 읽으면 일본 신화의 큰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고, 번역본에 달린 충실한 주석들을 같이 읽는다면 각 신화소의 여러 측면들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사기] 중권과 하권에도 야마토타케루노 미코토(倭建命)의 영웅신화, 후백제 견훤 탄생 신화와 유사한 미와야마(三輪山) 신화,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을 간직한 나무에 얽힌 이야기 등,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가지 사족을 달자면, 백제 멸망 후 점점 더 치열해져간 신라와의 적대 관계 속에서 노골적으로 반(反) 한반도 감정을 드러낸 [일본서기]에 비하면 [고사기]는 그런 면이 현저히 약하기는 하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점에는 주의하여 흥분하지 말고 일본 신화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입장에서 독서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고사기]는 일본의 중요 고전으로서 근세로부터 근대에 걸쳐 재발견, 재평가 받아온 책이기도 하므로, 신화 공부와 함께 일본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독서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사기] 상권에 실려 있는 신화 중 한 두 가지를 실어본다.

   니니기노 미코토는 하늘의 바위 자리를 떠나 여러 겹으로 쳐진 하늘의 구름을 가르고 위세 있게 길을 헤치고 헤치어, 천부교(天浮橋)로부터 우키시마(浮島)라는 섬에 위엄있게 내려서서, 쓰쿠시(筑紫)의 히무카(日向)의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지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로 내려왔다. (중략) 이때 니니기노 미코토가 말을 하기를 “이 곳은 한국을 바라보고 있고(此地者, 向韓國), 가사사의 곶과도 바로 통하여 있어 아침 해가 바로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다”라고 하며, 그 곳의 땅 밑 반석에 두터운 기둥을 세운 훌륭한 궁궐을 짓고, 하늘을 향해 지기(千木)를 높이 올리고 그 곳에 살았다.

([고사기] 상권 144~147쪽)

   바다에 사는 모든 크고 작은 물고기를 모아 놓고 묻기를, “너희는 천신(天神)의 자손을 따르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때 모든 물고기들은 모두 “예,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해삼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하여 아메노 우즈메노 미코토(天宇受賣命)가 해삼에게 “이 입은 대답할 줄 모르는 입입니다”라며 끈이 달려 있는 단도로 그 입을 찢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해삼의 입은 찢어져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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