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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무

2004.01.30 22:0001.30





redfish.pe.krtoredfish@hotmail.com몇 년 전성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흥한 환타지 문학이 많은 작가를 양성해 오면서 현재 책으로 출판되는 환타지는 두 가지의 큰 흐름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흐름은 대중성과 재미에 힘을 많이 싣는 것이고 다른 한 흐름은 대중성과 재미보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힘을 싣는 것이다. 그런 흐름이 형성되어 온 지난 몇 여 년간 의미가 깊은 일은 환타지 문학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것은 온라인 창작의 특징상 대중성은 적을 지라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의 책을 출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 리무 역시 그런 문학상 중 하나인 한국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한 글이다.(제3회 우수작)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제목처럼 <리무>는 인도라는 이국(異國)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된 이야기이다. 작가가 인위로 설정한 <리무>는 대륙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강의 이름을 따서 ‘리무’라 이름 붙여진 여주인공은 폭풍의 신 루드라의 딸 라시프얀이라는 전생을 가지고 있다. 황가의 왕녀로 태어난 라시프얀은 신을 위협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들의 질투를 받아 죽을 운명이었던 쉬카르데와 얽힌 카르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쉬카르데는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벌어진 일련의 과정 때문에 두 사람으로 나뉘어 태어난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아비뉴아와 이즈나이다. 마치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쌍둥이처럼 태어난 두 사람은 카르마로 얽혀 있고 결국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사이에 그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리무’가 있다.

  기존의 신화를 차용하는 기법은 많은 작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리무>는 그 신화를 단지 차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화를 해석하여 모양은 같되 내용은 틀린 창작 신화를 일구어 낸 글이다. 뒤편에 붙여진 많은 참고 서적에서 보듯 이 글에는 작가가 인도 신화를 해석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여기 저기 보인다.

  이러한 고심 끝에 작가가 찾아낸 핵심은 <대립> 그리고 <융화>이다. <리무>에는 대립되는 수많은 소재들이 나온다. 적대하고 있는 국가, 리무의 선택, 신들과 쉬카르데, 그리고 아비뉴아와 이즈나. 그러나 이 것들은 선악으로 이분되어진 가치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이면서 하나일 수 없는 내면의 갈등을 닮아있다. 그런 갈등은 아비뉴아와 이즈나에 이르러서 절정을 이룬다. 원래 하나였던 사람에게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인격은 초자아superego와 이드id의 대립처럼 원초적이다. 초자아에 해당되는 아비뉴아는 어른스럽고 사회적이다. 반대로 이드에 해당되는 이즈나는 자신의 감정에 마저 미숙하며 사회에 융합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이런 원초적인 두 자아는 목숨을 걸고 대립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갈등을 화해 시켜 줄 수 있는 중계자를 찾게 되는데, 거기에 ‘리무’가 존재한다. 아비뉴아를 택할 것이냐 이즈나를 택할 것이냐 하는 리무의 긴 고민은 마치 우리 안에 존재하는 상반되는 마음 중 어떤 편을 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작가는 그 고민에 대해 이런 우화를 말한다. 머리를 두 개 가진 새끼 새를 가진 어미가 어느 쪽 머리를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 두 개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다. 두 개를 모두 선택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우화 속의 어미는 두 개를 모두 포기할 수 없었기에 결국 새끼 새를 잃고 만다. 그렇기에 작가는 결국 이 어미 새처럼 선택의 기로에 선 ‘리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하나를 잃지 않고는 하나를 얻을 수 없고, 선택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대립된 두 가지의 화해점으로 선 리무는 갈등 끝에 아비뉴아를 선택한다. 그리고 정반합의 변증법의 논리처럼 반(反)은 합(合)하여 새로운 것이 된다. 작가가 글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합을 향하는 <다르마> 곧, 현명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런 <다르마>를 지키는 이상 현명한 선택은 새로운 세계와 다음에 대한 기약을 만들어 낸다. 그 것이 부족하나마 이 글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주제였다.

  하지만 이런 졸렬한 분석을 하기에 앞서 리무는 좋은 글이다. 글을 펴든 순간 느낄 수 있는 것은 졸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동화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듯한 문체가 간결하게 흘러가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인도 신화에서 불쑥 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신들을 볼 수 있고 그 신들과 살아가며 갈등하고 화해하는 인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가다보면 다만 이야기에만 치중하지 않고 비중 있게 자신의 고민을 담아내는 필자의 생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흠을 잡자면 이야기의 재미에 비해 흡입력이 적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를 내내 머리에서 뗄 수 없었다. 같은 신화를 차용하였으나 두 작품은 그 해석에서 방향이 다른 극점에 위치한다. 두 글이 인도 신화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내린 다른 해석, 그리고 다른 방향은 나의 흥밋거리 중 하나였다. <리무>를 읽은 사람이라면 <신들의 사회>를, <신들의 사회>를 읽은 사람이라면 <리무>를 읽으면서 그 두 작품에 담긴 다른 해석을 비교해 보는 것도 아마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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