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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이어드를 말한다

2003.12.26 20:1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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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상현과 이영도, 김상현과 홍정훈

우리나라의 소설이 현대적인 의미를 갖게 된 이래로, ‘환상 소설’이라는 영역에 공간성을 부여한 작가는 이영도 씨입니다. ‘최초’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의미 있는’에의 이야기입니다. 이영도 씨가 부여한 의미는, 외국의 예와 같이, 환상 소설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한없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글을 끝까지 통제할 줄 아는 역량―――작가의 당연한 미덕이겠지만―――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 그리고 해야할 자신의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글 속에 묻어두는 것까지 보여줌으로써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영역을 습작가들의 것에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영도 씨가 우리에게 주는 안타까움이란 단지, 수작들이 여럿 선보이다가 그를 아우르는 명작으로써의 존재가 아니라, 수작들이 나오기 이전에 나온 명작이라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 이후의 여러 수작들은 끊임없이 <이영도 표>와 비교되게 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여타의 환상 소설 작가들에게 <이영도>라는 이름은 넘기 힘든 산이자 분명한 목표가 되었으며, 저 같은 독자에게는 생에 추가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김상현 씨가 있습니다.

   ‘이영도’라는 이름 앞에서 절대로 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인물과 플롯, 그리고 주제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장하게 흐르는 글을 쓰는 환상 소설 ‘작가’가 여기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이영도 씨의 [폴라리스 랩소디]는 첫 머리에서 ‘자유’와 ‘복수’, 그리고 ‘해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글이 어디로 귀결될지를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이런 서술은 작가가 글에게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달려가겠다는 야심만만한 선언입니다(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쓴다. 혹은 작중인물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라는 말들을 습작가들은 하더군요). 김상현 씨 또한 그의 작품 [네크로폴리스]에서, 그리고 [하이어드]의 4권 첫머리에서 그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글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시도이며, 특히 통신 연재의 경우에는 창작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작품은 큰 흥미를 불러 일으킵니다.

   더 나아가 김상현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 속에 적절하게 구성해서 읽는 이가 그를 통해 사유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의 첫 작품은 [탐그루]는 세 가지의 세상―――세헤라자드의 세상, 비류의 세상, 그리고 탐그루―――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바를(산만하다고 느낄 정도로) 세세하게 벌여둡니다. 처녀작의 여러 미숙함은 글을 더해갈수록 유려하고 모난 부분없이 잘 다듬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침, 이 서평의 前 대상작품이 홍정훈 씨의 글이었습니다. 물론, 홍정훈 씨의 글이라고는 고작해야 [비상하는 매]와 [더 로그] 7권까지 밖에 읽지 못했으니 제 이해는 단편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홍정훈 씨와 김상현 씨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홍정훈 씨의 글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독설 혹은 사회 비판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비상하는 매]에서는 덜하지만 [더 로그]는 그런 면모를 조금 더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은 그의 거침없는 글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그러나, 김상현 씨의 독설이 조금은 더 장중하고 세련되었으며, 역사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현재의 현상에 대한 거침없음은 쉽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가교를 놓는 일은 어렵습니다. 현재의 거침없음은 비교의 대상도 없을뿐더러 단편적이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평가가 내려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해야하며, 혹여 타인의 관점과 다르기라도 할 경우에는 재창조해야하는 고난을 감내하게 됩니다(물론 김상현 씨의 역사관은 여타의 ‘젊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김상현 씨의 작업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젊은 작가로서 자신의 분명한 ‘돋보기’를 통해서 현재를 바라봅니다. 때로는 차갑고 암울한 눈빛으로, 그러나 지금 이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조금 더, 홍정훈 씨의 독설은 굳이 소설이 아니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지 ‘소설’이라는 문학적인 형식을 빈 것뿐이지, 만약 홍정훈 씨가 다른 장르의 예술적인 소양을 가졌다면, 음악이나 미술, 혹은 만화나 영화 등의 도구로써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홍정훈 씨는 작가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현 씨는, 그에 비하자면, 작가지요. 김상현 씨가 다재다능한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상현 씨의 독설은 소설로써만이 가능합니다. 아니, 김상현 씨는 내포와 비유, 혹은 반전과 복선을 짙게 유지해나갈 줄 아는 ‘작가’입니다. 그의 이야기 또한 다른 문예 장르로의 변주가 가능할테지만, 그러나 소설로써의 완성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2. [하이어드]

김상현 씨의 두 번째 작품, [하이어드]는 [탐그루]의 악덕을 상당부분 접어버렸지만, 글 자체의 흐름은 약간은 평이하고 안정적인, 그러나 그 이야기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입니다.

   1) 이야기

   전 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이어드]는 한 권 한 권이 메이런과 아이라, 혹은 쿨란 등의 공통적인 등장인물을 바탕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각 권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영도 씨는 이 글의 서문에서 “하이파이성장하드보일드……” 운운하셨지만, 역시 주된 흐름은 주인공인 메이런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성장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서 사회로 진출하는 메이런과 그의 친구 아이라. 그들이 점차로 사회에 순응(아이라), 혹은 변혁(메이런)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작가는 자신과 사회의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한국의 현대사와 ‘팍스 아메리카나’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의 주류적 질서를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특수화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작가 나름대로의 요약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 종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섥혀있는 세계가 우주라는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는 전작 [탐그루]에서 시도했던 것과 유사하면서도 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작가는 월남전을 미 제국주의의 횡포로 단언하면서, 우리나라가 그로 인해 얻은 많은 경제적인 이익들이 지금 현재에는 부작용―――고엽제, 따이라이한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용병 인생으로 살아온 쿨란과 키티 본에게 우리나라, 우리의 역사를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변혁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고민을 같이하기도 합니다. 글의 두 축인 메이런과 아이라는, 한 사람은 조직 외에서, 또다른 한 사람은 조직과 주류적 시스템 내에서 부딪치고 갈등과 합의 혹은 타협과 흥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 한국이 처해있는 가치관과 전통적 혹은 인습적인 사고들이 현대적인 의미의 가치관과 부딪혀 나가면서 겪게 되는 혼돈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70년대를 지나면서 전(前)시대에 비할 수 없이 풍족해진 경제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민주적인 의식은 박약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아직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물질적 성장과 정신적 비성숙의 불협화음이 지금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딱!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도 속에서나 제도 밖에서 이런 불협화음은 구체적으로 충돌하고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합의 없는 일방적인 경제 시스템의 설정은 IMF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분배없는 성장 우선주의는 첨예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반민주적 가치관이 민주적 사고의 성장과정에 교묘하게 스며듦으로써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갈등은 더욱 더 첨예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설정

   이영도 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하이어드]는 분명히 한국의 환상 소설의 기준이 될 수 있었을 작품입니다.

   이우혁 씨의 [왜란종결자]가 우리나라의 고전을 배경으로 하여 환상 세계를 구현하였다면, 김상현 씨는 톨킨의 설정이 아닐지라도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설정을 제시하였습니다. 환상 소설에서 ‘틀린 존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실주의적인 (소위) 순수 소설이 현실의 표피적인 갈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환상 소설에서는 인간의 내피적인―――혹은 다중적인―――갈등을 (인간과는) ‘틀린 존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설정상 차원을 한 단계 높이지만 않았더라면, 김상현 씨의 ‘레이스(race)’는 훌륭한 환상 소설의 설정 상 전범이 될 수 있었을 겝니다. 이영도 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는 그만큼 독특하고 독창적인 자신의 세계관으로 어필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김상현 씨의 종족 설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특히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기존의 설정, 혹은 새로운 설정보다는, 병렬화된 종족관이 더 낫지 싶습니다. 물론, 단지 동물, 곤충들을 의인화했을 뿐이지만, 그 시도는 성공적이고 또한 효과적입니다. 글의 주제에 맞추어 자신의 설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3) 주제의식

   환상 소설이 다룰 수 있는 주제 중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역시 ‘인간(본연)’에의 것입니다. 김상현 씨는 [하이어드]에서 투박하게 시대를 비유함으로써 배경을 삼고, 그 바탕 아래에서 인간의 본연을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작인 [탐그루]는 사회 의식과 인간 본연에의 탐사가 불협을 이루고 조금 어긋나며 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영도 씨가 많이 듣는 이야기인, 급전직하적 결말이, 실은 김상현 씨의 [탐그루]에게 더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탐그루]는 보기 드물게 잘 쓰여진 액자 구성의 소설이며, 따라서 두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다가 함께 마쳐야한다는 어려움이 있는 바, 내화의 급작스러운 결말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하이어드]는 더 많은 진전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분명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환상 세계에 이[this] 세계를 담아낸 외피적인 면모에 더해, 김상현 씨는 ‘트랜서’라는 독특한 설정을 이끌어 냅니다. 다중적인 인간. 하나의 잣대만으로 살아갈 수 없어, 끊임없이 병렬적인 잣대들을 어긋대어가면서 자신의 행로를 결정하는 인간의 삶은, 인간이 ‘관계’라는 울타리 속에 있기에 이루어지는 삶일 것입니다. 즉, 무수한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설정하지만, 그 가치는 획일화되고 일관적일 수 없어 다중적이며, 또 병렬적입니다.

   트랜서인 메이런이 당하는 일은, 바로 현대의 인간들이 당하는 일입니다. 무수한 사유와 사고를 접해나가는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유지하고 자신을 지키기를 원하는 인간. 메이런의 해답인, 끊임없이 달려가야한다는 것은, 진정한 답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달려감을 멈추면 사그러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은 분명한 답이기에, 어쨌든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갈등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고, 김상현 씨는 아주 적절하게 그것을 형상화해내었습니다. 환상 소설이기에 가능한 형상화, 김상현 씨의 [하이어드]는 우리나라 환상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밖에 없는 글입니다.


3. 마치며

죄송하다는 말씀 하나, 이미 [하이어드]에 대한 글을 썼기에, 이 글은 사족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이어드]에 대해서 쓰지 않을 수 없었고, 헌 글을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부득이하게 사족을 대었습니다. 그리고 하이어드는 사족을 달 만큼 좋은 글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앞선 글이, ‘거울MIrror’의 비평 게시판 2번에 있으니 그 글을 같이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용 없는 글, 끝까지 스크롤바를 내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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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03.12.27 23:18 댓글 수정 삭제
    옥의 티. <틀린 존재>-><다른 존재>. '틀리다'라는 말은 wrong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른손'이 '왼손'에 대한 차별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어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