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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멋진 징조들

2004.03.26 21:1503.26





cybragon@freechal.com

   실은 이 책을 읽기 전에, 몇 군데서 상당한 칭찬을 들었다. 말 그대로 ‘멋진’ 유머와 패러디가 날뛰는 작품으로, 단박에 빠져들만큼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2개월에 걸쳐 겨우 다 읽고 다시 1개월이 훨씬 넘은 지금, 그 평 자체에는 완전히 동의한다. 분명히 [멋진 징조들]은 훌륭하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한 패러디 소설이며, 현대 사회(약간 낡은 80년대긴 하지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기독교 신화를(특히 묵시록을) 온통 들쑤시는 패러디는 배꼽이 빠져나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도 모를 정도의 웃음을 선사한다. 문장은 감칠맛나고, 번역은 입에 짝짝 들러붙는다. 한마디로, 터럭만큼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패러디 문학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완벽한 ‘패러디’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다 읽는데 2개월 넘게 질질 끌어야 했던 원인이고, 읽은지 다시 2개월이 다 되어갈 즈음에야 어렵게 리뷰를 쓰게 만드는 원인이다. 분명히 완벽한 패러디임에 틀림 없지만, 그래봤자 패러디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되풀이되어 쏟아져 나온 각종 ‘마이너 문화 창작품’에 질린 나에게, 뭔가 독창적인, 사람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을 찾는 나에게, 이 책은 집에서 혼자 밥 차려 먹으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그리고 직업상 필요한 ‘젊은 애’들의 문화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그건 사실 내가 젊기는 커녕 어릴 때 조차도 한번도 붙잡아본 적 없는 감각이지만) 습관적으로 켜놓는 시트콤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멋진 징조들(Good Omens)]은 이름부터가 [징조(Omen)]의 패러디이다. 혹은 [나쁜 징조들(Evil Omens)]의 패러디인지도 모르겠다(전혀 관계 없긴 하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판타지 게임에도 그런 이름의 주문이 나온다). 어쨌거나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 대로, 아마겟돈을 일으킬 적 그리스도가 태어나고(여기까지는 원작과 같겠지) 그동안 계속 지상 파견 근무를 하느라고 너무나 인간적이 되어버린 천사와 악마가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얽혀서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 내지만, 미리 다 까발리면―――대부분의 ‘명작’과 달리―――읽는 재미가 거의 없어져 버리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그 많은 인물과 사건이 다 하나로 뭉쳐져 대단원을 향해 치닫게 되는 구성(이걸 뭐라고 하더라?)이라는 것만 밝혀 놓는다(그래봤자 패러디지만).

   사실 나는 패러디를 좋아했다. 국내에 ‘패러디’라는 것을 유행시키기 시작한 [총알탄 사나이]부터, 일본 아니메의 패러디 집대성이라 할 [푸니푸니 포에미]까지……. 그렇다. 딱 거기까지.

   패러디란 것은, 원작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재미 추구 장르이다. 마치 요리를 푹 졸여 그 정수만 뽑아다 다른 음식의 양념으로 붓는 것 같은 작업이고, ‘맛있는 것만’ 잔뜩 들어가 있지만 많이 먹다 보면 어느새 무슨 맛인지 모르게 되는 물건이다. 한번 패러디 무감각증에 걸리면 투박하다고 내버려뒀던 원래 요리를 먹고 나서야 겨우 미각을 회복할 수 있다.
   요컨대, 온갖 요리를 양념으로 만들어 끼얹되 그 자체의 주 재료는 들어가있지 않은, 음식 아닌 음식이 패러디인 것이다.



   나는 랩을 싫어한다. 듣다 보면 꽤 흥겹고(우리나라 전통 민요가 랩과 맥락이 닿는다던가?) 어느새 따라서 중얼중얼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문득 깨달을 수 밖에 없다. ‘랩’은 음악의 양념일 뿐, 음악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떤 ‘랩 음악’이든, 각 타이틀마다 가지고 있는 특유의 리듬을 제외한 랩 부분은, 그저 랩에 불과할 뿐 어디서 무슨 랩이 나와야 걸맞을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랩으로 구성된 음악은 들어본 적도 없고, 아마도 나오지(혹은 나와도 인기를 끌지) 않을 것이다. 20와트 스피커에서 대략 3분하고 42초 동안 쉬지 않고 랩이 흘러나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왜 유독 랩 ‘음악’에서만 예전 곡을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그리 많은지, 한국 랩의 선구자라고 하는 서태지가 왜 외국에서는 ‘뮤지션’이 아닌 ‘어레인저’라고 불리는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고추장이나 간장이 요리의 맛을 내 주지만 요리는 아닌 것처럼, 랩도 패러디도 작품의 맛은 내 주지만 ‘작품’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멋진 징조들]은 바로 그런 패러디의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기독교 전설부터 UFO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만의 ‘독창적인 것(Something ORIGINAL)’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어디서 본듯한 것들이 뒤얽혀 제각각의 색깔을 뽑내며 박혀 있을 뿐이다. 소금부터 DHA 까지 조미료란 조미료는 다 섞여 있지만, 정작 우리가 먹어야할 요리 재료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패러디에 식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패러디라는 것을 알아볼만한 상식을 갖춘 사람들에게, [멋진 징조들]은 아주 상큼한 별미가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한’ 패러디니까, 그 점은 보증할 수 있다.

   하지만 패러디를 이해하기엔 조금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 특히 각종 초자연적 현상이나 묵시록같은 오컬트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기엔 무리가 있다. 아마 그저 그런 환협지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패러디에 신물이 난 사람들, 주변 온갖 것들이 TV 시트콤마냥 똑같은 얘기만 조잘조잘대는데 싫증난 사람들은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0년 너머 계속되고 있는 '합성 조미료'에 질린 사람들에게, 조미료 덩어리를 봉지째 입에 밀어넣는 꼴이 될 테니까.
댓글 3
  • No Profile
    진아 04.04.09 13:32 댓글 수정 삭제
    그리폰 2기.. 아직 건진 게 없습니다.
    저도 멋진 징조들 재미없게 봤거든요.
    밤을 사냥하는 자들도 반쯤 봤는데 지루하네요.
    제목은 멋진데 말이죠..
  • No Profile
    비형 04.04.10 00:02 댓글 수정 삭제
    -_-a
  • No Profile
    gets 05.01.31 15:38 댓글 수정 삭제
    아 저도 제목보고 샀다는 ^^;
    밤을 사냥하는 자들. 뻔한 전개가 아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