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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헌터 시리즈

2004.02.27 23:0302.27





plluto@hitel.net

   우리말로 번역조차 되지 않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떨까도 싶었지만, 요즘은 인터넷 세상,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헌터의 맹세(Hunter’s Oath)]와 [헌터의 죽음(Hunter’s Death)]라는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미셸 웨스트(Michelle West)라는, 우리나라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영어로 읽은 소설 중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소설이기도 하다.

   신과 신의 아이들(God-born)

   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작가가 얼마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터 시리즈]는, 필자가 감탄해 마지 않는 아주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는 신의 존재이다. 마치 그리스 신화를 연상시키듯, 수많은 종류의 신들이 세계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도 있다. 그러나 신화와 크게 다른 것은, 그 신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은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까? 그것이 바로 신의 힘을 이어받은 사람들, 두 번째로 언급할 God-bor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우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어떤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의 대부분은 어떠한 직업군을 지칭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Healer-born은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치유하고 크게는 죽은 사람을 다시 불러 일으키기까지 한다. Craft-born은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적인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Bard-born은 목소리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심지어 좌지우지 한다. 이렇게 신의 힘을 타고난 자들은 대부분 혈연과는 관계없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며, 그들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힘을 다스리는 신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이 실제 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직업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신의 힘을 타고 난 아이들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신을 믿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인류 전체에 주어진 신의 힘이 때로 ‘천재’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이에서, 유일하게 특이한 God-born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Hunter-born이다.
   Hunter-born은 헌터라는 신을 믿는 북방 지역에서만 나타나며, 그것은 대대로 영주의 가계로 이어져 내려간다. 그들은 헌터가 부여하는 사냥꾼의 힘을 받는다. 뛰어난 근력과 지구력, 야생동물과 같은 날카로운 센스, 그리고 무엇보다 사냥개들과 ‘일치되는’ 트랜스라고 불리는 상태. 곡물을 수확할 수 없는 브레다니어(Bredanir)지역에서는 이러한 영주들이 사냥해오는 사냥감이 모든 영토를 먹여살리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며, 인간이 살기 힘든 땅에서 인간들이 살 수 있게 해준 신의 은혜와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God-born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을 때에, 그에 대한 반작용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즉 인간의 범주에 들어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엔 그다지 반작용이 없지만(평소의 Bard-born이나 Craft-born처럼) Healer-born의 경우에는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한 만큼 그 사람의 영혼과 동화되어 버리며 그 사람 대신 그 아픔을 대신 느껴주게 되고, Mage-born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마력을 사용했을 때 ‘마법열’이라는 열병을 앓게 되는 것 등이다. Hunter-born의 경우에는 최고로 적절한 ‘사냥꾼’이라는 이유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먹고 살게 되는 대신 반작용을 치른다
―――즉, 자신들이 사냥을 하는 대신, 일 년에 한번, 스스로가 ‘헌터’의 사냥감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특이한 설정 중에서도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브레다니어라는 나라의 어느 Hunter-born과, 그의 Hunterbrother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책임과 등가교환

   최근 모 만화와 애니의 영향으로 ‘등가교환’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만화에서 들고나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것은 어리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을 등가교환의 법칙이라고 한다’라니…….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오히려 사회에 나가면 등가교환이 아니라, 댓가를 치르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전혀 얻어낸 결과에 부합하지 않는 비싼 댓가를 치러야만 하는 경우가 많은게 현실이다. 등가교환이라니. 이 얼마나 감미롭고 달콤한 말인가. 얻은 만큼 치러야 하는 건 엄격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 말이 크게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것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나태한 세대가 지금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밀리터리나 참혹한 전쟁 이야기가 일본에서 크게 히트치는 것과 같이(한국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가 있지만, 문화적인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등가교환이라는 거창한(소위 말하자면 ‘쿨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이다. 어떠한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원인을 제공한 자는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인 것이다.

   [헌터 시리즈]는 아주 담담하게 그러한 책임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아직 이 소설을 접하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에 피하겠지만, 기본적인 세계의 틀 자체가 그것을 시사하고 있다.
   영주, 즉 사냥꾼인 헌터들은 인간보다는 신과, 그리고 사냥과, 동물과 더 가까운 존재이다. 심지어 그들은 인간과의 유대보다는 자신이 거느린 사냥개와의 유대가 더욱 깊을 정도다. 그러한 자들을 ‘너의 뿌리가 이곳에서 왔다’, ‘네가 지켜야 할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라고 가르쳐주는, 인간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헌터브라더’이다. 그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키워줘서, 헌터들이 인간의 세계에서 빠져나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만을 탐닉하지 않도록 도와주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힘이 가지는 책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비단 Hunter-born들만이 아니라도 다른 God-born들이 모두가,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낌없이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다. 이 소설에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비관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는 자는 없다. 단 한 명, 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중 하나인 Seer-born(일종의 예언자) Evayne이 ‘어째서 내가 이런 중책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내팽개친채 도망치는 일은 없다.
   이 소설의 밑바탕에 깔린 것은 어찌보면 지독한 선민사상일지도 모른다. 즉, 가지고 태어난 능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능가할 수 없는, 이미 걸어가야 할 운명이 정해져있는 인물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러한 선민사상이라던가 차별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인물들 모두가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 최선을 거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내가 이런 것을’ 이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되어야 했던 거라면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야’ 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아마도 아무런 힘도 없는 헌터브라더(즉 극히 평범한 인간)인 스테판이 이 소설의 주된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어려움이 가득한 길을 걷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위험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그것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아무 힘도 없는 호빗인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운반하는 운반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한 Seer-born이 헌터와 그의 헌터브라더에게 들고온 문제는 세계를 온통 뒤흔들게 될지도 모를 엄청난 일이었지만,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최선을 다해서 그 역경을 헤치고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표방하는 바는 선민사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귀족들이 가지는 의무, 즉 가진 자가 앞에 나서서 못 가진 자를 위해 행해야 할 덕목을 가리킨다. 과거 서양에서는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큰 덕목으로 여겨져왔고 동양에서는 ‘덕’이라는 개념으로서 마찬가지로 존중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을 보면, 과연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기는 했었는가 할 정도로 처참하고 약삭빠른 시궁창에 가깝다. 특히 근래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본다면 더욱 암담할 뿐이다. 과연 지금 이 세상에서 힘있는 자들은 힘이 있다는 것을 대신할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까? 힘이라는 건 단지 권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 나쁜 사람을 위해,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을 위해,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 어떠한 ‘오블리제’를 느끼고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외국에서 지어진 글이라고 하지만 지배계급조차도 운명으로서 정해진 King-born과 Queen-born이 있어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Averalaan을 다스린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유머스럽기도 함과 동시에 뼈아픈 통찰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었는가에 있어서는 큰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흔히 중우정치라고도 하는 민주주의는, 분명 플라톤이 제시했던 철인정치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철인정치가 불가능한 이유는 실제로 그러한 철인이 존재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King-born과 Queen-born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어떠한가?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한 최선을 다할 재능과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절대로 권력에 빠져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잊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민주주의 따위는 멀리 갖다 버리고 싶지 않아지는가.

   인간은 누구라도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허울 아래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은 썩어가고 책임은 회피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등가교환’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감동을 주고 있으며, ‘책임’이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지고, ‘약속’이라는 말이 환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 맞부딛혀갈 자신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 역시 질 수 없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자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소설이야말로 진정한 ‘판타지’가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꿈꾸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책만큼 뿌듯하고 감동을 줄 책도 드물지 모른다.


   사족

   소설에 대한 감상으로는 약간 삼천포가 되기는 했지만, ‘감상’에 대해 담론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 일단 간략하게 소개를 덧붙인다. 미셸 웨스트의 시리즈는 아마존에서 Hunter’s Oath와 Hunter’s Death로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 있으며, 그녀의 문장은 매우 긴 만연체에 화려체에 해당한다. 필자는 영어 소설을 상당히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을 처음 접하고는 한 권을 읽는데 일 주일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그녀의 글은 무척이나 멋지고 리듬감이 있으며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가능하면 어딘가에서 그녀의 화려한 필력을 살려 번역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게 개인적 바램이다). 많은 수의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 중 상당수가 전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점이다(그것이 ‘주어진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에 잘 어울리고 있기도 하다).
   독특한 세계관, 화려한 문체, 그리고 복잡한 듯 하면서도 절묘하게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해내는 꽉 짜인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더욱 사족으로, 필자가 두 번째 닉으로 자주 쓰는 Kallandras라는 인물이 바로 이 책에서 등장한다.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니 여성(?)들은 꼭 한번 보시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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