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설 동굴의 여왕

2003.08.30 00:4708.30





redfish.pe.krtoredfish@hotmail.com원고 청탁을 받고 대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과장을 보태어 주야로 고민했다. 지인들이 추천한, 주옥같은 번역물들이 물 흐르듯이 흘렀으나 마지막에 이르러서 결국 [동굴의 여왕]을 택했다. 아마도 이 제목을 듣는 순간,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며 오랫동안 기억의 더미 저편에서 곰팡이 냄새 피우던 이야기의 단편을 떠올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식을 로망으로 삼은 젊은 어머니의 아이들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로망을 활활 불태우는 어머니로부터 책 한 권쯤은 받아봤을 것이다. 로망에 혼을 태우는 어머니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책장에 ‘명작’ 운운하는 책을 한 질 거하게 꼽아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인생의 로망은 남편’, 이라고 변질을 한 모친이시지만 변질자가 되기 전 젊은 모친께서 ‘자식’이라는 로망에 혼을 걸었던 덕분에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책장에 꼽힌 그득한 책 속에서 나는 이 [동굴의 여왕] 아샤를 처음 만났다. 리뷰를 쓰고자 다시 이 책을 서점에서 찾았을 때, 완역본으로 출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춤을 추지 않았던 것은 다소나마 가지고 있는 어른이라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긴 서두를 이쯤에서 멈추고 사랑, 불사(不死), 그리고 덧없음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한 번 소개해 보기로 하자.

   그러면 이 탐미적인 이야기의 소개를 이 이야기에 들어있는 긴 시의 일부로 시작하자.

      사랑은 사막에 핀 꽃과 같아라
      그것은 아라비아의 알로에와 같아서 단 한 번 피고 죽나니,
      그것은 인생의 쓰라린 공허함 속에 피어,
      폭풍 속에 별이 빛나듯 그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황무지를 비춘다.


   이 이야기는 편집자가 홀리라는 억세게 못생긴 중년 남성에게서 받은 원고의 내용이다. 홀리가 쓴 원고에서 시작되는 이 기괴한 모험담은 다음과 같다.
   별로 개성이 환대받는 시대가 아니었던 탓인지 혹은 정말 못생겨서 그런 것인지, 외모 때문에 멸시를 받는 열등감을 학문으로 승화한 캠브리지 대학의 홀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친구로 대해주는 빈시씨가 남긴 기묘한 철궤와 유산을 상속한 다섯 살 난 아들을 엉겁결에 떠맡게 된다. 아내만이 영원한 로망이었기에 자식을 로망으로 안을 수 없었던 자살자의 유언인 즉은, 다섯 살 난 아들인 레오가 스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아남으면 이 철궤를 열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라는 이야기와 고대 아랍어를 열심히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못생긴 빈시와 달리 뭇 남성들의 심금마저 울리며 아폴로 신처럼 아름답게 자란 레오가 스물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열린 철궤에는 대체 감당하지 못할 이야기가 자료와 함께 들어있다. 그 이야기는 저 먼 조상에서부터 아들과 아들에게로 전해져 내려온 전언으로 아메나르타스라는 여인이 남긴 것이다. 먼 조상이신 칼리크라테스의 아내였던 아메나르타스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과 미모의 소유자’인 한 여인이 칼리크라테스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그 것에 진노하여 칼리크라테스를 사악한 마법으로 죽였으며 질투심으로 그의 아내인 자신, 아메나르타스도 죽이려고 했으나 일족의 마법 덕분에 살아서 탈출했다. 그녀가 아들에게 내린 험난한 퀘스트는 바로 ‘여인을 잡아 복수하라, 아들들아!’, 이다.
   믿거나 말거나에 나올법한 이 이야기의 여러 증빙 자료를 살핀 홀리와 레오는 이야기를 해야하는 작가에게 등이 떠밀려 목숨을 작가 손에 맡긴 채 하인인 조브를 동반하여 이 이야기의 여인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후 험난한 사투와 세심한 묘사는 작가의 경험담에서 우러나기 때문에 매우 사실적이고 인상적이다.
   그런 험난한 여정 속에서 세 사람은 마침내 찾던 ‘여인’, 아마하가인들에게 ‘히야’라는 이름으로 숭상받는, 냉소적이고도 우아한 그리고 권위를 지닌 아샤를 만나게 된다. 베일을 쓴 이 아샤는 베일을 벗는 순간, 남자 따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고귀한 미모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아름다움과 권능을 확신하며 이천년간 인간의 역사 언저리에서 수많은 문명과 언어들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본 말 그대로의 ‘여왕’이다. 하지만 이 아샤는 이천 년 전의 사랑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썩지도 않고 방부 처리 된 냉담한 칼리크라테스 시체 옆의 딱딱한 돌 위에서 잠을 자며 오로지 그가 다시 환생하여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천 년 전의 차가운 사랑이 열병에 걸린 채, 레오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레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던 아마하가인 우스텐을 제거하고, 레오는 베일을 벗은 그녀 앞에서 우스텐에 대한 것은 깡그리 잊고 미모에 현혹된 채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샤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불멸로 이루기 위해, 레오에게 불사(不死)의 생명을 줄 불꽃이 있는 <생명의 동굴>로 함께 향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아쉬움을 남기며 비극으로 끝난다.

   [보물섬]을 능가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히죽 웃은 뒤, [솔로몬 왕의 보물]로 자신의 오만을 증명했던 H. 라이더 헤거더가 단 2주 만에 써놓은 소설의 내용은 위와 같다. 하지만 줄줄 늘어놓은 스토리에서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스토리 상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요즘 흔해 빠진 ‘시공을 초월한 애절한 사랑’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상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그것과 한참 거리가 있다.

   이 이야기에 담긴 것은 명멸해 가는 인간의 문명과 진보, 그리고 그 것의 덧없음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그 속에서 바라는 희망에 이기도 하다. 불사의 생명을 손에 넣은 이 영민한 여인은 이천 년 동안 은둔해 왔지만, 명멸하며 사라져 가는 세상의 그 모든 것들과 단지 과거로만 남을 뿐인 역사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세상에는 미래도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과거가 될 순간뿐이다. 내일은 이미 오늘이 되어 있고, 우리가 말하는 내일은 결코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없는 허상의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알기에 아샤는 냉소적이다. 그녀에게 있어 홀리가 들려주는 세계의 변천사라는 것은 그저 흘러갔고, 과거가 되어버린 덧없는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먼지는 먼지로! 과거는 과거로!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로! 칼리크라테스는 죽었다!

   아이샤는 그렇게 외친다. 그러나 다만 모든 것이 그토록 덧없는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살아갈 변명이 남지 않는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지만 생존하기 위해서는 의식주 외에 더한 것이 필요하다. 생존을 유지하도록 삶에 대한 집착을 이끌어 주는 대상, 고통과 자학 그리고 번민으로 점철되는 생의 한 가운데에서 지푸라기처럼 잡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늘 인간에게는 살아갈 변명으로 필요한 법이다. 때로 그 것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명일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일 수 있고, 꿈일 수 있다. 아샤가 가진 생존에 대한 변명은 칼리크라테스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시 외친다.

      하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 순간, 삶에 대한 희망을 붙잡는 순간 과거가 되기 위해 스쳐가던 순간이 다시 생명을 얻는다. 그녀는 이천 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적체(積滯) 속에서 ‘사랑’을 살아가는 변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이 잡고 있는 사랑 외에 모든 것을 내팽개친 이 여인이 비난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다시 먼 희망이 아니라 현재로 돌아온 그 ‘사랑’은 완성되지 못한다. 이야기는 표면상 비극이지만, 어쩌면 그 사랑 역시 과거가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위태한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꼭 비극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이 이야기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삶에 대한 변명을 하나씩 붙잡고 있다. 조브가 가진 레오와 홀리에 대한 충성이 그렇고, 레오에 대해 가진 홀리의 애정이 그러하며, 레오에게 바친 우스텐의 사랑이 그렇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에 보이는 사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매일 살아나가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는 우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변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것이 결코 원대하고 거대한 야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것은 아샤에게 있어서 ‘사랑’이 그랬듯, 사막에 핀 꽃처럼 인생의 쓰라린 공허함 속에 피어 삶의 지표가 되어주며 황폐하기 쉬운 황무지 같은 인생을 비추는 눈부신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아샤의 입을 통해 이천 년 묵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 것은 유한을 무한처럼 인식하고, 이야기에 나오는 철학자의 이야기처럼 ‘죽기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처럼 느껴 질 때가 있는 삶에 대한 위대한 변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19세기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홀리와 아샤의 입술을 빌어 너무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 놓은 철학들을 여기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쉽다. 덧없는 인생을 냉소하지만 그 인생을 살아나가기 위해 ‘사랑’이라는 것을 지푸라기처럼 잡고 그 것에 모든 혼을 걸었던 여왕이 들려주는 세계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어릴 때 처음 읽었던 그 느낌처럼 애절하고 기괴하며 또한 신비스러운, 취한 느낌과 함께.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비소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2 2003.09.26
소설 시녀 이야기 2003.09.26
소설 그의 이름은 나호라 한다3 2003.09.26
소설 동굴의 여왕 2003.08.30
소설 패러노말 마스터: 그 수많은 비밀들을 향하여 2003.08.30
비소설 고사기 2003.08.30
비소설 베오울프 2003.07.26
소설 운명의 딸 2003.07.26
소설 하얀 로냐프 강: 잊혀져 가는 남자들의 로망4 2003.07.26
비소설 황금가지2 2003.06.26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5 2003.06.26
소설 고리골 200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