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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세계, 불타버린 세계, 크리스털 세계

J.G. 밸러드,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2012년 4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지구 종말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함께 다루지만 사실 이들 세 작품은 내용이 이어지거나 서로 관련이 있는 연작은 아니고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작가가 연속으로 썼다는 점, 지구의 종말을 그리며 이를 통해 보여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흡사하다는 점, 제목도 비슷하다는 점(원제 『The Drowned World』, 『The Burning World』, 『The Crystal World』) 등 여러 이유로 오랫동안 독자에게 시리즈처럼 여겨졌고 문학수첩 번역본 출간도 비슷한 디자인으로 연달아 출간하면서 사실상 한 시리즈로 취급했기에 함께 다루기로 했다.

 

물에 잠긴 세계
태양의 변이로 복사열이 증가되고 온도가 급상승, 빙하가 녹아 무대인 영국까지 완전히 물에 잠긴다. 도롱뇽과 악어가 번식하고 인간은 극지방으로 이주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마치 공룡시대로 퇴행한 듯한 분위기에 인간들도 사회적 퇴행을 겪는다. 옮긴이의 말에서 빌리자면 ‘역진화’. 대표적으로 배를 이끌고 약탈을 하는 스트랭맨은 그냥 해적 두목이 아니라 주술적인 무당 역할까지 하는 제정일치 지도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얀 옷이나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등의 면모를 보면 해적이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부하들이 케런즈를 그냥 처형하지 않고 묶어놓고 춤을 추거나 제의적 행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중에서 언급되듯 죽은 이들을 조종하는 부두교와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살아남은 주인공은 문명을 포기하고 과거의 집착도 환경 적응도 아니라 근원으로 이끌려 거슬러 가는 ‘제2의 아담(본문에 나온 표현 그대로)’이 된다. 문명의 종말에 따른 문명의 포기 및 원시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결말이다.

 

불타버린 세계
크게 3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1부는 가뭄으로 멸망해가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생존자는 다들 해변으로 떠나게 된다. 버티나 싶던 주인공도 결국 마지못해 고향을 떠난다. 2부는 주인공이 해변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와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다 동물원에서 탈출하여 생존한 사자를 발견하고 희망을 품고 내륙으로 떠난다. 3부는 마을로 돌아와 과거의 인물과 재회하고 최후의 저수지에서 버틴다. 절망밖에 없나 싶을 때 마지막엔 비가 내린다.
인류가 살기 힘들 정도로 지구 환경이 급변한다는 점은 『물에 잠긴 세계』와 같지만 그 원인이 인간의 환경오염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다만 문명 붕괴가 묘사되면서도 국가와 세계 차원의 적극적 움직임이 그려지지 않는 점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이 사회 속에 정착, 적응하지 않는다는 점, 세계적 재난을 거시적으로 그리지 않고 거의 주인공에게만 포커스를 맞춘 점도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주인공은 세상과 동떨어져 관조하는 관찰자 시점 인물이다. 고통스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정적이고 목가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작가 고유의 작풍으로 보인다. 옮긴이의 말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서도 드러나듯 작가는 이런(거친·힘든·비문명의) 생활이 인간 본연의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하며, 그래서 이런 서정적인 종말을 그릴 수 있는 듯하다.

 

크리스털 세계
이번 지구 재난은 전 세계가 크리스털이 되는 수정화 현상을 다루었는데 상기 두 작품과 달리 원인도 대책도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주인공 샌더스 박사는 앞서 두 주인공과 흡사한 소극적이며 관찰자 입장의 인물이다. 여전히 주인공 주위의 국지적 사건만을 다루고 있는데, 세 작품이 이런 일관된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시리즈로 느껴지는 큰 요인이라고 본다.
이야기의 무대이며 수정화 현상의 시작점이 아프리카인 것은 문명의 발상지인 아프리카에서 문명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주인공이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의사라는 설정은 후반에 수정으로 아름다워지는 나병 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추와 미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마지막 샌더스의 편지에서 태양도 크리스털이 될 것이라는 언급, 변하는 것을 ‘불멸의 선물’이라 칭한 부분에서 탐미적이고 염세적인 면모를 보인다. 세 작품에 일관되게 보이는 이런 서정적인 종말의 모습은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종말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궁극의 탐미를 추구한 작가의 고집이 낳은 산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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