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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황금가지

2003.06.26 23:1406.26

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이용대 옮김, 한겨레출판, 2003년 1월



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로마 근처에 네미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고대 로마 때부터 숲과 동물, 풍요의 여신인 디아나와 디아나의 남편 비르비우스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서 남자는 누구라도 사제가 될 수 있으며 “숲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는 관습이 있었다. 단,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전의 숲에 있는 성스러운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어 그것으로 이전 사제를 죽여야 했다. 신전의 사제직은 이렇게 계승되어왔다. 이 가지를 “황금가지”라고 부른다.

   왜 사제가 되기 위해서 이전 사제를 죽여야 했는가? 왜 나뭇가지를 꺾어야 했으며 황금가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1890년 두 권으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는 이 두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신화와 전설과 기록을 아우른 책이다. 네미의 황금가지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조금도 유명하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은 신화였으나, 이 책 이후로는 ‘살해되는 신’이라는 신화적 테마를 대표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1990년에 나온 재판은 세 권으로 늘어났고, 다시 1906년부터 1915년까지에 걸쳐 출간된 3판은 열 두 권에 달했다. 신화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다. 그러나 이대로는 너무 읽기가 어렵기에 영국에서도 두 번에 걸쳐 축약본을 내놓았으니,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은 이 축약본을 옮긴 것이다.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사례가 너무나 많이 열거된 탓에 간혹 논점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황금가지]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사실 명확하다. 프레이저 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살해되는 신’―――죽고 부활하는 신이라는 테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용은 총 7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주술의 원리(그 유명한 모방의 법칙과 감염의 법칙이 여기에서 처음 나왔다)와 성스러운 왕권의 성립에 관한 기본 연구를 다룬다. 2부에서는 성스러운 왕, 또는 사제인 왕에게 적용되는 터부의 원리를 다룬다. 3부는 죽어야 할 신이라는 테마를 다루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와 서아시아의 경우를 따로 떼어 4부를 구성했다. 5부는 곡식의 정령이라는 제목으로, 식물의 형태로 ‘먹히는’ 신에 대해 다루었고 6부는 속죄양과 제물을 주제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7부는 다시 네미의 문제로 돌아와 앞서 거론한 이야기들을 정리한다.

   처음에는 엄청난 논란거리를 일으켜 잠시 동안이나마 금서로까지 취급되었으며, 이후 신화학과 인류학의 단초가 되었고, 수많은 석학과 문인들에게 영감을 선사했고, 당대 지식인들의 꿈이었으며, ‘영국은 프레이저의 나라’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파급효과가 컸던 [황금가지]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비판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한때는 프레이저 경을 진위여부도 가리지 않고 자료를 마구잡이로 가져다 쓴 괴팍한 노친네로 매도하고 황금가지를 신기한 풍물집 정도로 비하시키던 때도 있었다. 읽을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말해두지만 프레이저 경이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직접 조사하지 않고 기존의 자료만을 가지고 책을 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한계에서 가장 많이 벗어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게만 보던 일들에서 논리를 찾으려 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고전학자였으나 고고학, 금석학,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들을 차용하고 만들어냈으며, 당시 처음 나온 진화의 개념을 끌어들여 신화를 정리함으로써 “과학적”인 종교 연구를 처음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인문사회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왕립 과학원 자격을 얻기도 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인 작업이었는데도 말이다!

   한동안 그 의미가 너무 축소되었던 고전이기에 의미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그만한 의미가 사라졌다 해도 이 책에는 아직 훌륭한 미덕이 남아있다. 바로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진행은 추리소설과 같아서 마음을 두근거리며 따라가게 하고, 필치는 시와  고전을 사랑했던 사람답게 우아하고 유려하며, 마무리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필자는 아직도 처음 [황금가지]를 읽었을 때(까치글방에서 나온 판본이었다)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느낀 만족감을 잊을 수 없다.

   우리들의 발견의 여행도, 그 긴 항해도 끝나고 배는 항구에 들어가 낡고 구겨진 돛을 내렸다. 다시 한 번 네미를 찾아가보자. 해가 저물 무렵 일반 구릉으로 가는 아피아 가도의 긴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면 하늘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황금색이 사라진 후광처럼 로마에 걸려 있으며 산 피에트로 사원의 둥근 지붕을 불꽃처럼 물들이고 있다. 절대로 잊지 못할 광경을 머릿속에 넣고 다시 저물어가는 산길을 계속해서 걷노라면 어느새 네미에 도착한다. 깊은 계곡 사이에 잠들어 있는 호수를 내려다보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 땅은 성스러운 숲으로 디아나를 숭배했던 시대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숲에는 여신의 신전이 없고 “황금가지”를 지키기 위해서 보초를 서고 있는 "숲의 왕"도 없다. 그러나 네미의 숲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의 푸른 숲이며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숲 저쪽으로 가라앉을 무렵 저녁 기도시간을 알리는 로마 교회의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아베 마리아! 기분좋고 장중한 만종이 먼 도시에서 들려와 넓은 캄파냐 평원 너머로 사라져간다. “왕은 돌아가셨다. 신왕국 만세.”

   대학 도서관에서는 종종 열두 권의 [황금가지]가 백과사전과도 같은 위용으로 서가 한켠을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그 책에 도전해볼 용기있는 사람이라 해도 축약본으로 핵심을 먼저 파악하기를 권하고 싶다. 국내에는 네 가지 판본이 존재하는데, 1990년에 나온 삼성문화사 판과 1996년에 출간된 을유문화사 판 [황금의 가지]는 1922년 영국에서 나온 맥밀란판 축약본을 옮긴 것이고, 2001년 까치글방에서 나온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는 메리 더글라스와 세이빈 맥코맥 두 사람의 1978년 축약본으로 삽화를 다수 곁들였고 가장 읽기가 편하다. 최근에는 한겨레신문사에서 1994년 옥스퍼드판 축약본을 옮긴 900쪽이 넘는 양장본을 새로 펴냈다.

   여담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였음에도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전기는 1960년대 후반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로버트 애커먼은 풀이하기를, 안타깝게도 프레이저 경이 전성기를 25년이나 지나 자신이 공룡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질 무렵에 사망했다는 점(슬픈 얘기다), 그리고 하필 2차대전기라서 전기집필을 할 만한 인력과 여유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레이저의 서재문을 지키는 지옥견”―――즉 그의 마나님에 대해 동시대 캠브리지의 후배들이 아무도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 마나님은 늘 남편의 아이디어를 다른 학자들이 훔쳐갈까봐 노심초사하며 사사건건 남편과 다른 이들의 만남과 대화를 감시하고 방해했다고 한다. 덕분에 많은 동시대인들이 프레이저 경의 고립과 고독을 한탄해야 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더 있다. 지금에 와서 제임스 프레이저 경은 안락의자 인류학자(현지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로 유명하며 앞에서 말한 대로 음울하고 고독한 삶을 보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결혼 전, 황금가지를 쓰기도 전―――30대 초반까지의 프레이저 경은 활달하고 사교적인 남자였다. 뉴기니로 현지조사를 나갈 기회도 주어졌었다. 그러나 1894년,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친구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황금가지] 1판은 그에게 헌사되었다)가 죽은 후 프레이저 경은 심리적으로 치명타를 입고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으며, 현지조사의 기회를 걷어차고 저 “지옥견” 마나님과 결혼했다. 글쎄. 결국 개인적인 불행 덕분에 [황금가지]라는 어마어마한 대작을 세상에 내놓은 셈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W.R. 스미스가 살아 있었더라면 더 대단한 업적을 내놓았으리라 안타까워해야 할까?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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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그리 03.09.07 01:16 댓글 수정 삭제
    으음.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에; 사보고는 싶은데 돈이 안되서 (중학생의 비애;) 목록에 추가만 시켜놓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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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 03.10.07 01:43 댓글 수정 삭제
    교육학 시간에 이야기 나왔던 그 책 같군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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