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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엘야시온 스토리

2004.01.30 22:0301.30





essensia78@hotmail.com[엘야시온 스토리]는 꽤 오래전에 한국 판타지가 양적으로 갑자기 급격한 성장을 겪을 때에 나온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띄엄띄엄 기억하기로는 그때쯤에 나우누리 SF 게시판에서 불펌에 대한 논쟁이 발발해서 세월의 돌 마지막 권이 연재하지 않고 곧바로 나오던 때였고, 청어람에서 뿔이란 브랜드를 창설해서 판타지 소설계에 진입하던 초기였다. 이때 청어람에서 수많은 이세계 깽판물의 시조(문제의 시조?) 격이 된 소설이 [사이케델리아]였다. 이후 이계진입깽판물도, 그리고 청어람 정도 규모에다가 판타지 소설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내는 출판사들도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어떻게 보면 한국 판타지 소설의 대혼란시대, 어떻게 보면 전성기가 찾아왔다.
  그러니까 즉 [엘야시온 스토리]는 출간도 ‘불쏘시개 시대’ 이전에 되었고, 연재는 그보다 더 오랜 작품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최신에, 적어도 구할 수 있는 작품으로 리뷰하고 싶었던 야망은 좌절이다. 그러나 또한 오랜 옛날에 읽었던 작품으로서 골라서 소개해 주기에는 묘하게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글을 시작한다.

   소녀는 딴 세계에 떨어진다
   언젠가 박무직이 여러 만화를 분석한 잡담 만화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소년 만화의 경우에는 여자가 딴 데서 현실로 불려 온다. 그러나 순정 만화의 경우에는 여자들이 모두 다른 세계로 간다. 외계로 가고 다른 차원으로 가고 등등. 마치 이 지구상에서 로맨스와 모험이 일어날 여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외치는 듯하다.
   [엘야시온 스토리]의 주인공 시나도 다른 세계에 떨어진다. 그러나 다른 소설들과 닮은 점이 거기에서 나타난다. 시나는 물론 중간중간 나오는 바로는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세계에 돌아온 것이며 가끔씩 능력도 보이지만 초반에는 그야말로 ‘깨지고 구른다’. 이세계에 가서 이 정도로 고생한 소녀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나오자마자 몬스터 만나서 죽을 뻔하지, 구해 준 남자는 잘생기면 뭐하나, 바보 같은 자식이라고 따귀부터 올려 붙이지, 게다가 세계는 이상한 데다가 자기는 최하층이라서 완전 버러지 취급이지. 대저 이세계에 떨어져서 만나는 남자 주인공격인 인물에게 사연이 없을 리야 없지만, 이 남자는 사연 때문에 최하층으로 떨어진 유배 생활 ‘중’이었지. 거기에다가, 왠지 자연스럽게 세계의 법칙을 안다거나 미모로 한 수 먹고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도 없이 시나는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낯선 문화에 그대로 노출된 평범한 소녀로서 이리 치이고 저리 당한다. 저 정도로 당하면 자기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어 보일 정도다. 시나가 세계와 자신에 대한 연관을 조금씩 눈치 채고, 남자 주인공과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휩싸이면서 이야기는 1부 끝을 향해 달려 간다.

   장벽이 높다
   그렇다. 전 11권인데 이 이야기는 겨우 1부를 끝맺었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2부가 어딘가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릴 뿐, 완전히 끝맺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 때문에 장벽이 높다고 한 건 아니다.
   시나가 생짜로 부딪히면서 몸으로 익히는 과정을 따라가는 편이기 때문에 훨씬 덜하긴 하지만 엘야시온 스토리에는 생소한 말이 난무한다. 일단 세계가 6계급으로 나뉘어서 처음부터 용량이 정해져 있는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각기 다른 차원에 버금가는 독립성과 개성을 지닌 세계가 12개나 있는 데다가, 출생이 중요한 데가 대개 그렇듯이 이름과 계급명은 함께 어울려서 각 개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의 종류가 아예 다른 것인지 인간의 일생 단계도, 수명도, 계급을 나누는 천부능력도 우리 세계의 인간과는 너무나 다르다. 원칙이 분명하지만 복잡하고 세세한 세계관인 것 또한 분명하다. 앞서 말했듯이 다행히도 엘야시온 스토리는 그런 부분들을 기술적으로 자연스럽게 처리하고 있지만, 역시 너무 복잡한 세계관은 읽던 이야기에서 독자를 튕겨 내고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반에 아예 몰입하기에 힘들게 만드는 장벽일 수 있다.
   두 번째 佯??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서술 방식과 전개 속도이다. 이 소설은 무척 느리게 전개된다. 스킵하고 넘어가는 시간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일상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시나가 뒷산에서 깡패들에게 맞아 정신을 잃기까지 시간 상으로는 단 하루이지만 1권의 반을 소모한다. 또한 새로운 세계에 떨어져서 단지 정신을 차리고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쓰디쓴 대가로 사고를 한 번 칠 때까지(...) 고작 몇 시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도 같은 비중으로 쓰여 있다. 시나와 시나를 구해 준 남자 주인공이 처음에 등장한 마을을 떠나는 데에는 2~3권이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전개가 느린 것은, 첫 번째로 다른 캐릭터의 관점으로 가서 서술하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나의 일상은 거의 그냥 흘러가는 일 없이 빠짐없이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그 시간대에 맞춰서 이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조연들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조연들이 한 번씩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비춰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의 본질일 테지만 말이다. 주위의 평가를 들어 보면, 남자 독자들의 경우에는 대개 이 부분에서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스피디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기대하거나 거기에 익숙하거나 그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이 소설을 볼 수 없다.
   세 번째 장벽은 그렇게 느리게 전개되는 스토리 라인은 분명히 매우 옛날의 일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이 세계의 존폐를 둘러싼 막대한 일과도 연관이 있고, 세계 각지에서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 각각 자기 역할을 하면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커다란 그림을 만들어 내는, 그런 방대한 이야기인 데 반해서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초점이 캐릭터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에 대한 거대한 전망과 야망을 가진 캐릭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캐릭터의 면면들을 살펴 보자면 이들의 활동에는 대개 개인적인 과거사와 이유가 깔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지어 현재 하는 일과 대화 중에서도 그러한 과거사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표출된다. 세계가 천천히 돌아가는 변화를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각 말의 입장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고, 오히려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각 말들이 자신만의 이유에 따라 어떤 돌발적인 일을 벌이는가다. 물론 그 돌발적인 일이 가져올 전체적인 결과 또한 독자가 추리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감정이 많은 것을 바꾸는 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대쪽으로 어필할 특징이다. 또한 그들이 가진 개인적인 과거사와, 그를 드러내는 방식 또한 감상적인 면모가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엘야시온 스토리]에는 비밀이 너무나 많다. 감춰진 과거사, 감춰진 세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본심. 그런 것들이 얽혀서 눈 앞에 보이는 그 수많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숨겨져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을 추리하기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전개가 느린 것과 별도로, 그렇게나 길게 이야기를 해 놓고서도 완전히 밝혀지는 비밀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 소설이 1부만 출간된 거라는 사실만 분명히 해 줄 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은 또한 반대로 이 작품을 명확하게 특징 지어 준다. 지나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점은 또한 글의 매력 포인트가 되게 마련이다.
  일단 세계를 이해하고 나면 이 세계의 법칙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데에 놀라게 된다. 여타 많은 국내 판타지 소설에서 범하는 우는, 어디에서 세계관을 따 왔든 자신이 만들었든 간에 작가 자신이 현대인으로써 가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식하지도 못하고 휘둘러 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엘야시온 스토리의 세계는 (아무래도 성경 등을 많이 참조하여 만든 듯한데) 세계를 운영하는 법칙이 정확히 정해져 있으며, 그 법칙이 또한 매우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6계급으로 나누고 그 계급마다 수호천사를 두어 계급의 상하위와 특징을 갈랐다. 그러므로 각 계급은 원래의 명칭 외에도 때로 각 계급을 수호하는 천사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왕족인 스아디온, 스웰디온을 수호하는 천사는 도미니온즈이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 도미니온즈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무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티온은 역품천사 파워즈의 수호를 받으므로 파워즈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종교와 세계가 혼연일체가 된, 현대의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엘야시온에서는 맛볼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능력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진 현대에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그것을 강제함으로써 나타나는 새로운 광경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세세한 서술과 스킵하는 시간이 없는 밀도는, 소설에 한번 몰입하게 된 다음에는 그야말로 책장을 잡고 놓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독자가 충분히 시간을 따라갈 수 있으면서도 이야기가 돌아가는 이유, 각 캐릭터마다 하는 행동의 동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개연성이 생긴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딴 식으로 행동하는지 설명도 없이 넘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다. 이야기는 시시콜콜할 정도로 캐릭터들의 동기를 설명하거나 감정 상태를 보여 주며, 그럼으로써 캐릭터마다 자신만의 동기와 행동 패턴과 사고방식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캐릭터들이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되면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야기를 작가가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는 뻔해진다. 이야기에는 패턴이 있는 법이고, 그 패턴을 설득력 있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벗어나는 글은 개연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캐릭터가 살아 있다고 느끼면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된다. 마치 현실처럼.
  캐릭터의 심리 묘사나 그밖에 세계의 법칙을 묘사한 부분은 몹시 아름답다. 감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련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부분이 많다. 어차피 감상적이라고 해도, 로맨틱 판타지라는 부제를 달고 경고해 놓은 이상 상관없지 않은가. 엘야시온 스토리에는 그런 식으로 보석 같은 장면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리뷰에서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고 직접 읽는 자만이 찾을 수 있는 법이다.

   필자는 필자가 아닌 독자로서 이 책에 대해서 ‘사랑스러운 소설’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분명 단점도 많고 그 단점들 중에는 상업 소설로서 뼈 아픈 부분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 읽은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넘어서 이 소설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단점이 없는 자는 사랑스럽지도 않다. 지극히 사랑스러운 소설, 그것이 [엘야시온 스토리]이다.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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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4.01.30 23:56 댓글 수정 삭제
    아아..; 이건 읽다가 애가 너무 고생하길래 무서워서 못 봤어요(..). 십이국기 누구처럼 성격이 강해지거나 나름의 계기를 얻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리여리한 채로 고생만 생고생을 해 대길래(1부니까 그렇겠지만요). 말씀하신 바에 거의 동감해요. 지극히 사랑스러운... 이라는 말에도 동감이고요. ^^; 감상적인 데가 있지만 그런 부분도 참 예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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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iu 04.02.14 01:02 댓글 수정 삭제
    저의 경우에도 못봤습니다. 설정은 맘에 들엇지만 이야기가 너무 늘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3권인가 4권인가까지 읽고 나서는 더 이상 못봣어요. 나중에 다 나오면 읽으려 햇는데 나중엔 양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질릴것 같더라구요;;; 중반부에서 좋아진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읽다만것을 후회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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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cyLondon 04.05.01 14:03 댓글 수정 삭제
    아, 엘야시온 스토리.....
    ...제목만 떠올려도 절로 눈이 감기는 책.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전 그 세계와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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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oromangi 04.05.07 13:41 댓글 수정 삭제
    지금 그 작가님께서연재를 재개하셨습니다^^
    http://www.elyasion.com/ 여기가 주소예요^^
    엘야의 팬으로서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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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i 04.05.20 03:20 댓글 수정 삭제
    클로니아 파이오니온 레이서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27시간동안 식음을 전폐한채 몰두하게 만드는 4년만에 만난 나의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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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환 04.06.08 00:53 댓글 수정 삭제
    엘야시온스토.... 추억의책이네요 몇년전 처음접했을때는 생소하고 좀 어색한감도있지않았는데 점차나오는글을읽고 아 하고 느낀것도 많았고 보고 또보고 그렇게 여러번보니 엘야시온스토리를 이해할수있게되었습니다 몇년동안 2부를기다려오다가 기억이 희미하게 될쯤에 다시접하게됐습니다. 다시 연재를 시작해주신 작가님에게 감사하고 다시 첨부터 읽어볼꺼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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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처구니 04.06.16 17:08 댓글 수정 삭제
    엘야시온 스토리를 봄으로서 책이란 인내하고 보는 것이다. (...) 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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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06.23 13:03 댓글 수정 삭제
    엘야시온을보면서..정말판타지가진짜제대로된거같아요.ㅋ다른판타지들은항상같은류였는데엘야시온은정말다른판타지를보아서더기쁜거같아요.ㅎㅎ
    그래서저는엘야를사랑해요.>ㅁ<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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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준 04.07.20 23:50 댓글 수정 삭제
    이곳 리뷰보고 당장 빌려 읽은 소설.. 흐아..^^
    약간의 짜증과 감탄 참을수 없는 흥분과 아련한 슬픔, 미움이 맘을 온통 흔들어 놓는..
    꼭 추천하는 소설입니다.
    방금 다 읽고 나선.. 작가님의 글 솜씨에 감탄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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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 04.10.05 16:36 댓글 수정 삭제
    엘야시온한번가보시죠..
    어떤가-_-
    미친작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