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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하얀 로냐프 강]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이하 환동)의 대화방에서 였다. 당시 얘기는 연재가 너무 늦어진다는 독자들의 우스개 섞인 불만이었고, [하얀 로냐프 강]이 꽤 있기 있는 통신 연재작이라는 것, 그리고 작가 분도 평판이 좋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나중에야 작가 이상균 씨가 바로 환동의 개설자이자 초대 시삽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사석에서도 몇 번 마주하며 책에 친필 사인까지 얻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스쳐가는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얀 로냐프 강]의 이름은 접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난 언제나 하고싶은 일이 많았고, 환동 장편란의 글들을 읽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환동 뿐만이 아니라 통신 연재작들은 거의 읽지를 않는데, 그것은 첫째로 대부분의 연재작들이 미숙한 습작 수준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긴 시간을 투자하며 옥석을 가려낼만큼 작업 성취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연재 글의 특성상 보고 싶은 만큼(즉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감질나고 몰입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판타지 소설 출간 붐이 일고 그 첫번째 타자로서(유명한 [드래곤 라자]의 경우는 바로 그 붐을 일으긴 시발점이기 때문에 첫번째가 아니고 0번째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얀 로냐프 강]이 출판되었을 때, 나는 별 망설임 없이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10년 가까이 아마추어 영역에서 쌓여온 한국 판타지 장르, 거기서 엄선되어 나온 것 중 하나였으니, 앞서 말한 두가지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둘 다 아니었으니, 약간은 실망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하겠다. 원래 기르던 개에게 물리는 것이 더 아프다고, 칭찬을 먼저 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리뷰의 느낌을 더 날카롭게 해 줄 수 있으니까. (새디스트라고? 천만에. 그저 질투하는 것 뿐이다. 나는 이런 소설은 쓸 수 없으니.)

카발리에로: 로망의 한쪽 끝

카발리에로란 원래 기사, 즉 말을 타는 전투원을 말한다. 아마 에스파냐 어인가 그럴 것인데, 꼭 에스파냐 어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는 대충 비슷한 음운을 가진 동의어가 존재한다. 이 기사―――카발리에로가 [하얀 로냐프 강]에서는 좀 다른 의미로 등장한다. 바로 한 명의 귀부인을 정해 평생에 걸쳐 호위하기로 맹세한 기사, 혹은 그런 풍습를 말하며, 기사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할 기사도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의무이다. 더군다나 국가에서 정식 기사로 책봉받지 못한 근위 기사나 견습 기사는 카발리에로를 신청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책에서는 그 외에 국가와 국왕을 지켜야할 의무,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할 의무 등이 기사도로서 언급되지만, [하얀 로냐프 강]에서 크게 강조되는 기사도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만 얘기해도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하얀 로냐프 강]은 광고 문구에 있는 그대로 기사라는 소재를 통해 ‘러브 로망 판타지’, 즉 사랑과 로망에 대한 환상을 소설화 한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환상에 사랑과 로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로망에 대한 환상이다. 이 점이 다른 판타지 소설과 차별화되는 [하얀 로냐프 강] 만의 특징이자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알겠는데 로망이 뭐냐고?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멋들어진 것’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다음 절은 로망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이다. 이상균 씨의 소설 [하얀 로냐프 강]을 감상하는데는 전혀 필요가 없지만, 내가 쓴 리뷰를 이해하기 위해선 필요하니 되도록이면 건너뛰지 말자.

‘남자의 로망’이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각양 각색의 답변이 나오겠지만, 내 주변의 매니아(♂), 혹은 그에 준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략 몇가지 카테고리로 정해진다. ‘우주(혹은 좀 더 검소하게 지구) 정복’, 거대 로봇, 거대 우주 전합, 거대 하렘 건설,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혹은 거울이나 컴퓨터 화면에서 튀어나오거나 그 부록으로 TV화면/물웅덩이에서 튀어나오는) 절세 미녀, 등등……. 유난히 ‘거대’라는 글자가 많이 붙는 것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영원할 남성들의 크기 컴플렉스 때문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이런 ‘로망’은 크게 두 가지 성분으로 간략화된다. 맞다. TV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사랑과 전쟁’인 것이다. 좋게 말해서 로망이니 뭐니 해도 이 두 가지는 사실 본능에 가깝다.

남자란 단순한 생물이다. 이 세상 어떤 것과도 싸워 이기기를 바란다(안 싸우고 이기는 건 의미가 없다. 어떤 형태로든 싸워야 한다. 그게 물결치는 근육이든 박터지는 머리싸움든 걸쭉한 말빨이든). 이런 성향 중 특히 육체적인 면이 강조된 것을 흔히 마초라고 하는데, 본인의 의견으로는 육체적인 면이 아니더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승부욕―――이라기보다 승리욕―――은 전부 마초의 특성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이 특성은 경쟁을 통해 생존할 수 밖에 없는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것이지만, 인간의 경우엔 아무래도 남성이 여자보다 월등하게 많이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승리라는 것은 여성보다 남성 쪽의 후손 번식에 큰 영향을 주므로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또 한가지 절대 없어지지 않는 남성(수컷, 17세)의 특성이자 승리욕보다 더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갈망이다. 외계인 보라고 이 글을 쓰는게 아니니 그 원인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고, 요점만 골라 말하자면 이 갈망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자를 완전히 소유하고(그리고 여자에게 소유당하고) 싶은 독점욕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여자를 다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하렘적 욕구다. 왜 그런지는 구구 절절이 설명하자면 책 한권으로 나올테니 그냥 요약하고 그렇다고만 알아두자. 이 분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인류학 / 생물학 계열 교양도서를 참조하시라. 딱 한 권만 고르라면 [이기적 유전자]를 추천한다(서적 리뷰에서 갑자기 엉뚱한 책 선전이……). 앞서 말한 카발리에로 얘기에서 짐작하셨듯이, 그 둘 중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독점욕이다.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하얀 로냐프 강]은 바로 이런 남성의 근원적 욕구에 충실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남성 위주의 한국 판타지 소설 시장에서 드물게 여성층의 지지가 높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로냐프 강]은 근본적으로 남성에 의해 남성의 시각으로 쓰여진 남성을 위한 글이다. 왜 그런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제 (드디어) 줄거리 얘기를 좀 하자. 책 읽기 전에 미리 내용을 알게 되기를 싫어하는 분들은 더 이상 읽지 말기를 권한다. 하지만 내용도 모르고 그냥 “그 책 재미있더라(혹은 X판이더라)”라고 말하면 위대하신 우리 독자 제헌들께선 납득할 수 있겠는가? 대체 리뷰 쓰는 사람의 어디를 보고 그 말을 믿겠느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에 대해 충실히 알려주는 리뷰를 좋아하는 바, 내 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다. 그런게 싫은 사람은 보지 말라.

한 남자 (혹은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보다 100배쯤 많은 싸움 이야기

거창하게 줄거리 요약이라고 했지만 별 게 아니다. 국가적으로 잘 나가는 새끈한 남자 주인공이 밑바닥 인생이지만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 어렵게 사랑을 하고, 결국 세파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비극이지만(소설이니 당연히) 아름다운 최후를 맞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줄이면 ‘소년이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소설’이라는 요약과 차이가 없어질테니 좀 더 독자 서비스를 하자(여기서부턴 정말 스포일러다. 하지만 알고 본다고 별로 재미없어 지는 책도 아니니 스포일러 결벽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다 보고 지나가도록 하자).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기사로 인정받는 나이트 레이피엘, 퀴트린 섀럿(남, 20세)은 자타가 공인하는 왕녀의 카발리에로 후보였고, 본디부터 낮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반란 진압의 공로를 더해 이젠 완전히 개인의 실력 만으로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상황이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왕녀를 여동생으로만 보는 퀴트린은 수많은 전설의 소재가 되고 기사도의 제1의무이기도 한 카발리에로가 그렇게 무덤덤한 마음으로 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잠시 휴가를 얻어 자아 성찰의 여행을 떠난다.
여행 길에서 우연히 천민 계급인 음유시인 소녀 아아젠의 목숨을 구해준 퀴트린은 어찌어찌하다가 그녀에게 여행 안내를 부탁하게 되고, 도중에 전쟁 소식을 듣고 복귀하면서 아아젠도 하녀로 같이 데리고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전쟁터에까지 아아젠이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되고, 퀴트린과의 결투를 위해 막사에 침입했던 적국 크실의 기사대장 파스크란을 아무것도 모르고 치료해준 아아젠은 대역죄에 해당해 참수의 위기에 처해진다. 자신의 수행원―――아아젠―――을 직접 처형하라고 강요받던 퀴트린은 결국……. 여기까지가 1부의 이야기. 책으로는 2권까지에 해당한다.
2부, 3~5권에는 그 몇년 뒤, 약소 중립국 로젠다로에서 망명 생활 중이던 퀴트린이 로젠다로의 계급 철폐 개혁으로 원래 조국이자 엄격한 계급제 국가였던 이나바뉴의 공격을 받자 로젠다로의 기사로 기용되고, 거기에 군무 이탈로 인해 역시 기사대에서 축출당한 파스크란과 함께 예전의 조국에 맞서 자신이 찾은 새로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역시 한두 사람의 힘 만으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를 수 없고, 친구였던, 혹은 가족이었던 자들과 칼을 맞대면서 결국은 멋지지만 슬픈 최후를 맞는 내용이 이어진다.

남자의―――남자에 의한―――남자를 위한 로망

이 소설은 이런 줄거리에 맞춰 앞서 말한 남자의 로망(이라기보다는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 우선 주인공은 ‘이나바뉴 제1기사’라고 불리며, 실력 면에서 볼 때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승리욕 충족). 뿐만 아니라 주인공 주변의 대다수 조연들도 비슷한 상황이며, 덕분에 이런 비중있는 인물들끼리 충돌하면 결판이 나지 않고 항상 무승부 상황으로 오게 된다. 기사라는 소재를 한껏 발휘한 이 1:1 결투는 소설 전반에 걸쳐 수없이 나오는데, 멋진 장면이긴 하지만 그 중 과반수가 무승부로 끝나서 작가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들의 ‘불패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런 불패 상황은 그를 통해 작가의,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승리에 대한 욕구를 상당히 만족시켜 준다. 또한 비단 이런 결투 외에도 전투에 관련된 부분은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전쟁과 싸움에 관심있는 남성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또 한가지 로망은,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소유욕 충족). 기사의 최대 의무로 되어 있는 카발리에로 제도는 평생에 걸친 한 귀부인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지만, 반대로 카발리에로를 가지는 귀부인 역시 그만큼 카발리에로가 생활에 파고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긴밀한 관계 덕분에 이들은 보통 연인 사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육체적인 면 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결혼 이상으로 강력한 서로에 대한 서약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소유한다는 환상을 만족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형태로 나타난 이성에 대한 소유욕은 하렘을 만들고 싶은 욕구와는 정 반대 되지만, 굳이 [하얀 로냐프 강]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남성은 두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므로 아예 다른 하나를 철저히 배제해 버린 것은 사랑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오버하지 않는 맛깔스러움

얼핏 보기엔 이렇게 단순한 사랑과 전쟁 얘기인 [하얀 로냐프 강] 이지만, 그 실질적인 장점은 그것을 꾸며주는 다양한 소재와 제재들에 있다. 우선 언어에 대해 들 수 있는데, 현실과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주요 명사들을 ‘아펠르 어’라고 하는 소설 속의 언어로 대치해 놓았다. 이 만들어진 단어들은 어감에 있어 신중히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것으로, 소설의 무대가 되는 엘핀랜드의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덕분에 우리가 흔히 쓰는 말보다 더욱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때때로 시처럼 삽입된 것도 아주 좋은 느낌을 준다. 노래 가사 자체가 잘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이 음유시인이라는 특성, 그리고 여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등을 노래 가사를 통해 잘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법은 다른 판타지 소설에서도 흔하긴 하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다지 많지 않고 무엇보다 삽입 문구들이 실제 노래 가사로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좋아서 현실감을 준다.

그 외에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12기사 평전]이라는 가상의 역사서 일부를 보여줘서 현실감을 높이는 기법과 중간 중간 조연들(혹은 직접적인 관계 없는 사람들)의 외전을 끼워넣어서 본편에서 다 하지 못한 얘기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를 따라 흘러가게 만들면 좋지만, 이 소설처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생각을 갖고 움직이는 경우엔 아무래도 이런 시점 변환이 나름대로의 풍미를 안겨주게 된다. 그 덕분에 조연들 하나하나의 개성이 살아나고, 소설의 테마가 단순히 주인공 간의 사랑과 전쟁 경험이 아님을, 시대와 사람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랑과 전쟁에 대한 것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그리고 도해까지 넣어가며 진행되는 자세한 전쟁 묘사 역시 큰 장점 중 하나다. 기사들의 이야기라는 것에 최대한 착안해, 전투 방법이라든가 등장인물들이 전장에서 행동하는 모습에 비중을 두고 상당히 현장감있게 진행하고 있다. 이는 마법이 별로 나오지 않지만 은근히 비중을 가지고 있는 독특함과 더불어 판타지 소설로서의 현실감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보통 판타지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는 마법이라는 요소를 거의 염두에 두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게임적 전투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비해, 여기서는 마법의 비중을 낮추고 기사들간의 무력 대결을 강조하여 독특한 전투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끝없이 입안에 걸리는 모래들……

요즘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청아한 느낌의 [하얀 로냐프 강]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단점이 너무 많아서 글을 읽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우선 심리묘사 문제. 두 주인공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대단히 빈약하여, 어째서 잘 나가는 남자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없다. 물론 중간 중간 암시를 주긴 하지만, 심지어 그 암시에서도 상황은 사랑을 싹틔울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정작 “퀴트린은 아아젠에게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더욱 껄끄럽다. 마치 사랑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하는 사람인데 관중(독자)들이 보고 있으니까 억지로 스토리 진행을 위해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관심도 없는 여자에게 괜히 길 안내를 부탁하고, 관심도 없으면서 하녀로 데려오고, 관심도 없으면서 전쟁터에 데려가고, 관심도 없으면서……. 그래도 초반엔 왠지 모르게 잠재 의식적으로 끌린다는 식의 뉘앙스를 주어 ‘첫눈에 반했는데 자기도 모르고 있군’이라는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는 반면에, 중반으로 가면 아아젠이 눈앞에 없으면(혹은 있는데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의식하지도 않는 정말로 무성의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메인 테마 중 하나인 카발리에로 제도는 경애하는 귀부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 부조화 때문에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확 끊어져 폭포가 되는 듯한 억지스러움이 있다.

그리고 앞서 장점으로 말했던 창작 용어의 문제도 있다. 확실히 창작 용어는 어감이 대단히 좋고 덕에 이국적인 느낌도 많이 살아나지만, 사실은 현실 생활에 나타나는 의미와 동일한 내용을 발음만 바꾼 것이기 때문에 좀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하야덴과 페치 처럼 분명히 의미가 다르지만 그냥 ‘칼’이라고 쓰면 분간이 안가는 단어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심지어 동물 이름이나 옷감에 이르기 까지) 현실에서도 정확히 그에 대한 명칭이 있고, 전혀 현실과 차별성이 없다(예컨대 늑대를 뜻하는 아슈벨, 창을 뜻하는 마텐 등……). 게다가 정작 중요한 단어인 ‘기사’ 같은 것은 따로 용어가 없어서, 그냥 ‘폼 잡으려고’ 용어를 만들어 쓴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투나 기사 간의 결투 장면도 그다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우선 전쟁이 진행되는 구도 자체가 실전에서의 혼란이나 불확정 요소 등을 거의 배제한, 마치 게임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 전쟁이라면 이렇게 깔끔하게 움직일 수는 없을 텐데’라는 마치 뒤를 안닦은 것 같은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기사 간의 결투도 지나치게 만화적인 묘사가 눈에 거슬린다(그 복잡한 전쟁에서 일일이 대사를 주고받으며 한칼 한칼 주고받는 등).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에겐 별로 상관 없지만 내 경우엔 상당히 답답했던 것인데, 배경 설정이 그다지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국가 직영의 전문 전투 집단(기사단)이 몇만 명 단위로 상비되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근대적 국가인 데 비해, 정작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은 기껏해야 중세 정도로 되어 있다. 둔전병이나 농민군 같은 것이 아닌 몇만 명 단위의 상비군을 운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나라라는 뜻인데, 실제로 지도라든가 행군의 움직임 등을 보면 그에 어울리지 않게 작다. 도저히 몇만 씩이나 되는 군대를 일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국가로는 보이질 않는 것이다. 엄정하고 세밀한 바스크 제도라든지, 의회라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현대적인 국가 체계가 아니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라고 보기엔 귀족의 힘이 너무 강하고, 기사의 무력이 너무나 강력하다. 거기에 로젠다로의 기사대장 라즈파샤 1인의 힘으로 추진되는 계급 철폐 정책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된 계급 제도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을 통해 겨우 줄어든 현실과 비교해 볼때 너무 설득력이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낙후된 사회 수준에 비해 국가 제도나 개개인의 의식 등이 너무나 현대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공감을 갖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소설 내용이 아니라 일종의 버그 진단이다. 원래 통신 연재용으로 쓴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많은 퇴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에 오/탈자가 보이거나 아예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 비문이 꽤 눈에 뜨인다. 이것은 아무래도 퇴고한 정도가 적었을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져서, 어떤 경우엔 문장의 의미 파악도 힘든 경우가 있다.

정말 마지막으로 옥의 티를 짚어내자면, 주요 주인공들의 나이가 중간에 바뀌어 있다. 분명히 어린 시절 회상에서는 피엔젤 공주가 8세, 퀴트린이 9세, 피엔젤을 짝사랑하는 사야카가 13세인데(13세 소년이 겨우 8살 어린애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가기는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공주가 19세인데 사야카는 갑자기 27세로 뛰는 것이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다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결론

[하얀 로냐프 강]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통신 연재 소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소 어설픈 스토리 진행에 삐걱거리는 설정, 심각한 오/탈자 등의 문제가 있지만, 카발리에로로 대표되는 기사도의 로망은 독자들과 밀착되는 환상성을 가져다주며, 기사라는 특질 안에 포함된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배합함으로써, 누구나 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하얀 로냐프 강]이 책장 한 켠을 차지할 만큼 소장 가치가 있는지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충분히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책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많이 지적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이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장점이 살아있기 때문에, 적어도 일독 정도는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가치가 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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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그리 03.07.31 20:13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얀 로냐프 강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고(물론 읽어볼 가치도 없는 글;;이지만) 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으음, 개인적으로 로냐프 강에 나온 기사들의 로맨스 이야기는 거의 다 마음에 들었기도 하고, 후반부의 퀴트린과 파스크란의 우정에도 꽤나 감동받았던 터라, 그 부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아쉽군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쿼트린이 아니라 퀴트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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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혼 03.08.05 09:25 댓글 수정 삭제
    퀴트린이군요.
    2번 읽었지만 지금까지 쿼트린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한 우매함이라니...)
    퀴트린과 파스크란의 우정은 다른데서도 꽤나 흔한 소재이기도 하고, '카발리에로'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발리에로를 자세히 다루지도 못했지만...
    하여튼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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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안 04.08.17 20:4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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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rwin 04.09.10 08:43 댓글 수정 삭제
    제목에 의의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남성들의 로망이라고 해주세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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