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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3년 1월



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제목은 무겁지만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강의한 “비교종교론” 수업 내용을 정리해 펴낸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1권인 이 책은 드물게 쉽고 재미있는 신화학 입문서다. 얕은 지식으로나마 국내 출간된 책 중에 “신화공부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쉽고 재미있으면서 새로운 신화읽기 방식을 보여주는” 책을 꼽아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 목록에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캠벨의 몇몇 저작밖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부연하자면 엘리아데나 정진홍 저작은 종교학 성격이 강하고, 레비스트로스나 지라르는 어렵고, 뒤르껭이나 말리노프스키나 그밖에 신화를 다룬 인류학/민속학 저작들은 너무 전문적인 것 같고, 몇 권 되지 않는 국내 저자들의 신화입문서 책은 너무 개설서스러운 느낌이다. 프리차드의 [원시종교론](에반스 프리차드/김두진, 탐구당, 1985년 10월)이나 오오바야시 타료우의 [신화학입문](오오바야시 타료우/권태효, 세문사, 1996년 1월) 같은 책은 구하기도 어렵고 번역이나 편집 방식 때문에 읽기가 힘들다.
  
   물론 이 책은 강의를 글로 옮겼다는 점에서 몇 가지 생래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흔히 강의는 훌륭한데 논문이나 저작은 엉성하거나 반대로 강의는 지루한데 책은 훌륭한 학자들을 보게 되지만, 학생들에게 있기있는 명강쯤 되고보면 대개 직선적이고 명쾌한 논리를 선택하고, 기본적인 흥미 유발을 위해 과감한 생략이나 비약이라는 위험도 감수하게 마련이다. 논의를 누구의 어떤 연구에서 빌려왔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 말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도 그런 단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깊이있는 신화연구로서는 한계점이 될 요소가 교양/입문서로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뭐니뭐니해도 내용이 재미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는 “신데렐라 신화”를 중심으로 신화가 ‘서로 다른 인식 영역을 연결시키는 능력의 소산’이며 따라서 가장 오래된 철학이라는 주장을 펼쳐 나간다. 우선 서장에서 일본 고사기의 ‘고노하나사쿠야히메’ 신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신화의 특성을 분석하고, 1장과 2장에서는 ‘카구야히메‘ 신화(참고로 이 신화는 만화 “월광천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에 나오는 연석(燕石)의 의미-제비집-미국의 새집뒤지기-피타고라스가 제비와 누에콩을 싫어한 이유-일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고대 그리스에서 콩이 상징하는 의미 등을 한 줄에 꿰어 그 밑에 깔린 논리를 끄집어낸다.
  
   왜 카구야히메는 신랑후보자에게 연석을 가져다달라고 했는가? 왜 피타고라스는 제비를 싫어했는가? 이야기 속에 들어있을 때에는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 요소를 끄집어내어 다른 경우와 비교해 보면 무엇을 상징하는지 드러난다. 신화만이 아니라 민담, 전설, 놀이나 농담에 이르기까지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이론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잠시 옆길로 빠지게 되지만 ‘카이에 소바주Cahier Sauvage(야생적 사고의 산책)’이라는 시리즈 이름 자체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기댄 것으로, 저자는 이 대학자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은 듯 하다. 다만 그 이론을 완전히 자기화하고 있어서 저자가 레비스트로스 이야기를 할 때면 다른 사람 눈으로 보는 풍경처럼 낯설게 여겨지지만 말이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서, 이런 방식으로 비교해낸 결론은 “매개채”다.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을 양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물과 뭍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읽을 때 이 요소들이 들어간 각각의 신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각 요소만이 아니라 신화 자체가 매개적인 성격을 지닌 이야기라고, 저자는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3장에서 7장에 이르기까지 강의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흔히 알려져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프랑스의 샤를 페로가 동화로 정리한 판본, ‘재투성이 상드리용’에서 출발한다. 원래 전해지던 이야기에서는 가죽신 혹은 털신이었던 것을 샤를 페로가 유리구두로 ‘오역’했다는 것도 꽤 유명한 일화지만, 이야기의 구조나 줄거리가 흡사한 민담/설화는 전세계에 수백 가지나 존재한다. 이런 분포와 변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고, 수많은 이본(異本) 중에서 저자가 골라낸 판본은 딱 여섯 가지다. 앞서 말한 샤를 페로의 동화, 그림 형제의 ‘재를 뒤집어쓴 소녀’, 포르투갈의 ‘아궁이 고양이’, 중국의 유양잡조에 실린 이야기, 북아메리카 미크마크족이 구전 신데렐라를 받아들여 재창조한 ‘보이지 않는 사람’ 이야기, 마지막으로 러시아,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구전되는 ‘털가죽 아가씨’까지. 단순히 이본이라고 보기는 힘들만큼 차이가 큰 판본들이면서, 차례차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며 읽다보면 수긍할 수 있을 만큼 비슷한 이야기들이다.
  
   다른 판본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떤 요소가 빠지고 어떤 요소로 대체되었는지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며, 각 요소들이 상징하는 바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썼다는 점에서 생사를 연결하는 존재이며, 낮은 곳(아궁이)과 높은 곳(왕자)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판본에 따라 이런 점을 상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한쪽 신발을 떨어뜨린다’는 요소도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 삶과 죽음 사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꽤 일관성 있는 분석이다.
  
   결국 저자는 신화가 현실과 환상을 중개하고, 때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고한다고 읽고 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의미있는 시각임에는 분명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글의 성격상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연구내용이나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 많은 것은 유감이지만, 꽤 유명한 저서들이 인용되어 있으니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한 자연스럽게 연관된 출처를 알게 되리라 본다.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저작으로는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가 2권 [곰에서 왕으로: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3권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까지 두 권이 더 나와 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몇 달 전 [불교가 좋다]는 저작을 내놓기도 했다. 이 책들은 신화학 입문서로 보기에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여전히 읽을 만한 관련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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