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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면세구역

2004.11.26 21:4511.26





latehong@unitel.co.kr오늘날 한국의 SF 작가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듀나이다. [나비전쟁],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까지 세 권의 단편집을 낸 그는 사이버 상의 SF 팬덤 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비교적 고른 수준의 작품을 통해 SF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그러나 사실 듀나는 ‘SF’라는 이름에 얽매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작 [태평양 횡단 특급]의 몇몇 단편―――예컨대 {히즈 올 댓} 같은―――은 억지로 SF의 범주로 밀어 넣기엔 무리가 많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는 낡은 아이디어에 기름칠을 하고 특유의 잡다한 문화적 취향들로 그 아이디어를 장식(?) 변형시킴으로써 새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업 자체를 즐기는 작가에 가깝다. 따라서 그를 어떤 철저한 장르적 규정 하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지난 15호에서 다룬 바 있는 김이환의 [에비터젠의 유령]과 마찬가지로 재료를 조합하는 행복한 놀이꾼으로서 다뤄보는 편이 보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듀나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굳이 [면세구역]을 다룬 것은 [나비전쟁]은 절판도서이며, [태평양 횡단 특급]의 경우 익숙히 읽지 못했기 때문임을, 얼굴을 붉히며 밝혀두기로 한다.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의 장르 문학 특집 기사 중 듀나의 글 “SF 문학의 오늘 : ‘일반’의 부재”에서 그는 자신의 창작 방식이 이 장르의 클리셰를 써먹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건 상당히 재미있는 문제다. 인류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운운한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겠지만, 이미 있었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자기화하는 작업을 듀나처럼 대놓고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게다가 독자들이 그런 사실을 몰라 줄까봐 “작가가 자기 글에 해설을 붙이는 건 꼴사나운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표절범으로 몰리기 전에 자기 패를 미리 펴 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독자들의 시선이 아이디어의 신빙성과 독창성에 가장 먼저 떨어지는 우리 장르에서는 그렇다.” 라고 변명까지 늘어놓으며 작품마다 그 작품들에게 영향을 끼친 대상들에 대해 짧은 해설을 달아 놓는 걸 보면, 정말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註1) 하기야 듀나의 영화 게시판에서 놀다보면 듀나의 그런 특성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의 '영화 별점 평가'에 가서 여러분이 아는 영화에 관한 평 몇 개를 읽어보시길. 시도와 독창성과 주제와 아이디어와 가능성과 낡음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날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니 그는 아예 ‘클리셰 사전’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그냥 이런 클리셰가 있고 예로는 이런 게 있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클리셰의 유용한 정도까지 이야기하는 수준으로.

 그렇다면 결국 듀나의 글을 읽을 때 눈여겨봐야 할 건 그가 얼마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잘 놀았는가 하는 데에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한 작가의 단편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내놓기 무난한 결론을 내리련다 -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좀 약하고. {로렐라이}라든가 {숲의 제단},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는 아무래도 심심하다. (이 셋이 단편집의 끝을 장식하는 세 작품이라는 게 더 아쉽다) 하지만 {스핑크스 아래서}나 {사라지는 사람들}, {낡은 꿈의 잔해들}, {기녀기담} 같은 건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무슨 차이일까?

 심심한 셋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원형―――듀나가 작품의 기반으로 삼은 아이디어, 클리셰들―――에 더 가깝다. 듀나化한 정도가 적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로렐라이}는 몇 가지 평이한 SF적 소재가 등장하고, 로렐라이라는 인물의 성격이나 바그너의 음악을 가져다 쓰는 부분에서 듀나의 향취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로렐라이 전설 테마에 갇혀있어 썩 흥미로운 재활용이 되지는 못했다. 반면 조작된 역사에 대한 {스핑크스 아래서}나 현실 붕괴와 사이버 세계의 대두를 말하는 {사라지는 사람들}, 제목 그대로의 내용인 {낡은 꿈의 잔해들}, (다른 것도 원형만 두고 보면 지겹기야 마찬가지지만, 이건 특히 지겹기 짝이 없는) 기술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인 {기녀기담} 같은 경우는 기본 테마야 따분하다는 듯 한 줄로 축약할 수 있겠지만 그 테마를 다루는 방식은 즐겁고 새롭다. 예를 들어 {스핑크스 아래서}는 IMDB에서 우연히 발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가 조작된 거짓 영화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존재하는 영화였다는 식의 이야기로, 전체 구조 자체는 필립 K. 딕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는 내용이지만, 그 구조에서 다루는 소재나 방식은 정말이지 듀나스럽다. 그는 이 작품에서 사실상 SF라는 장르 안에 귀속되는 데에 관심이 없다. 듀나는 많은 SF에서 사용한 테마를 IMDB라는 실재하는 시스템의 논리 안에서 흥겹게 끌어내고 있다. 클리셰의 변주 과정 속에서 소재를 충분히 자기 속에서 우려낸, 듀나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단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새로운’ 흥미진진함 때문에 이 이야기는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대체 그 테마들을 듀나化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듀나가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겠다. 붙이는 것보다 잘라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장르 소설 작가는 좀처럼 보기 쉽지 않다. (책장의 한 줄에 한두, 혹은 두세 작품밖에 꽂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네 장르 문학―――특히 장르 팬터지―――의 그 지긋지긋한 분량을 생각해보라!) 다행히 듀나는 그 점을 익숙히 알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그는 문장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로저 젤라즈니 식의 아름다운 산문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듀나의 문장은 아이디어를 짜고 전개하는 데 정확하게 필요한 정도의 정보를 간결하게 제공하며 빠르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에 있어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그 때문에 냉정하다는 평가도 듣지만,(註2) 그의 작품들이 잘 짜여진 유기체의 기능성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건 필시 그런 문장을 다루는 능력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가 장르에 무척 익숙한 독자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가끔씩 훑어보게 되는) 국내 창작 SF들이 대부분 Science의 강박관념에 눌려 처음부터 폼을 잡아보려고 하다가 되려 7, 80년대 영화처럼 촌스러워지곤 하는데 비해 듀나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현실에 녹여낸다. 장르적 소재가 나와도 호들갑 떨면서 이건 뭐고 어쩌고 하면서 설명을 하지 않고 원래 있었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 소설로서 존재하며, 이야기 전개 과정이 소재의 무게에 심하게 눌리지도 않는다. 역시 흥미로운 일이다. 기존의 아이디어를 변형시키는 작업은 강박관념이 심한 시도일 것 같은데 그는 오히려 장르적 강박관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작가처럼 보인다. 하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음’에서 출발하여 진부한 것을 다듬고 조합하는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도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장르 규정이 불가능했던 김이환의 소설 [에비터젠의 유령]이 다시 떠오른다. 듀나 역시 말로만 SF 작가지(註3) 사실상 장르 규정이 힘든 작품들을 쓰고 있는데, 이는 이미 제련된 소재를 새로이 자기 방식으로 가지고 노는 데에 관심이 있는 좋은 작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당연한 특징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놀이’에는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그러하다. 문득 앞서 언급한 김이환이나 듀나 외에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나 최동훈 같은 이들이 떠오른다. 이처럼 놀이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국 재조합, 재구성, 재발견의 즐거움은 있으되 감정선을 깊이 건드리는 지독함은 연약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아래 같은 게 있었거나 말거나 시치미 뚝 떼고 자신의 세계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의 맹폭함은 그들에게선 아무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그걸 한계로 꼽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놀이’ 자체가 맹폭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앞으로 오거나, 혹은 이미 왔다면, 결국 내 투덜거림은 구태의연한 기성세대의―――맙소사! 이 나이에?―――편협한 마음가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무슨 문제일까? 우리에겐 인간 이지의 균열에 대해 고뇌하며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가도 필요하지만 갖춰진 것을 다듬고 조합해내는 작가도 필요하다. 그리고 둘의 가치는 동등하다. 다만 아직 후자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냉정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듀나에게 익숙해질 가치는 충분하다.



 

 1. 듀나는 [태평양 횡단 특급]에서도 {작가의 말}을 통해 같은 작업을 했다.

 2. 물론 듀나의 냉정함은 단지 문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며, 그 자신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듀나처럼 삶에서 일관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때때로 (그의 저 유명한 익명성과 결부시켜) 그가 정말 인공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3. 그래서, 나는 “SF 작가가 쓴 것이 SF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신하는 중이다. 더 나아가 “SF 작가란 SF 팬덤이 SF 작가로 규정한 사람이다”라는 추가적인 명제가 뒤따를 필요가 있지 않나 고찰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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