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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Happy SF

2004.10.30 00:4910.30





toonism@magicn.comSF를 접한 지 그다지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SF의 고수와 하수가 극명하게 구분되더군요. 저를 비롯한 하수들은 90년대 중반에 나온 수많은 절판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고수들은 이미 대부분의 절판본을 소장하고 있지요. 하수들이 아시모프를 비롯한 BIG 3를 논할 때 고수들은 그렉 이건이나 테드 창을 논합니다(제가 하수인지라 더 이상 아는 작가가 없습니다).

  고수와 하수가 나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너무 확대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국내 최고의 SF 모임’이라는 정크 SF는 ‘국내 SF 팬덤 중에서 최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얼치기 평론가들이나 기자들이 어슬렁거렸다가는 단칼에 피를 볼 수 있는 곳(『Happy SF』229p)’이라고 하는군요. 어설픈 글을 썼다가 몰매를 맞는 하수들을 여러 번 보아 왔습니다. 회원 가입한 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댓글 두 번, 그 이상은 왠지 겁이 나 글을 쓸 수가 없더군요.
  이번에 행복한책읽기에서 나온 과학소설 전문무크 『Happy SF』는 이러한 고수와 하수의 괴리를 메우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첫 번째 꼭지인 「왜 SF인가?」에서는 현재 한국에서의 SF의 위치에 대해 논합니다. 먼저 SF의 역사를 소개한 후,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환타지와 SF 두 장르가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두 번째 꼭지인 「테드 창 특집」은 개인적으로 매우 기다리던 내용입니다. 테드 창 단편집 한 권을 내기 위해, 행복한책읽기에서는 올해 단 한 권의 총서도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테드 창이 얼마나 훌륭한 작가인지를 절대로 알 도리가 없는 하수로서는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지요. 과연 테드 창이 어떤 작가이기에 그 수많은 고수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것일까. 그런데 번역자의 평과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니, 그 모든 ‘찬양’이 이해가 되더군요.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많아 내용을 말할 수는 없지만, 탑을 올라가는 과정, 탑의 모습과 탑에서의 생활 등의 묘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혹시나 이 무크지에 실린 단편이 테드 창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이 리뷰를 쓰던 중,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테드 창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혹시나 하던 걱정을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할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더군요.)

  세 번째 꼭지는 「SF 영화의 세계」입니다. 온갖 상을 휩쓸고 수십 년간 칭송을 받은 후에 한국에 들어온 SF 소설은 재판을 찍기도 힘들 정도로 흥행(?)이 저조한 반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 영화는 거의 언제나 흥행에 성공하는 기행적인 한국의 SF 시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박상준 님의 [SF 영화 마니아를 위한 몇 가지 메뉴]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SF 영화를 소개합니다. 듣도 보도 못한 영화가 대부분이라, 한동안 비디오 가게를 돌아다니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김봉석 님의 [한국 SF 영화 - ‘장르’가 부재한 한국 대중문화]에서는 ‘왜 항상 한국의 SF 영화는 죽을 쑤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9 로스트 메모리즈」등의 사례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창작 SF」에서는 세 편의 SF 소설이 소개됩니다. 앞의 두 편――듀나의 「어른들이 왔다」, 구광본 님의「별로 변한 것 없어요」――은 상당히 즐겁게 읽었습니다만, 신인작가 강병융 님의 「beHEADing」이라는 작품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목이 두 개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신선하다고 할 만한 설정도 없었거니와, 여기저기에 배치된 소품들(SONY, SAMSUNG이라든지 하단의 주석 등)은 산만하고 조금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상황의 독특함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려고 하지 않는가 싶더군요.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였습니다만, 앞으로 많은 발전을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하수’의 입장에서 또 한 가지 기대했던 꼭지가 있습니다. 바로 김태영 님이 정리하신 「초/중/고급자를 위한 SF 가이드 - 국내 출판 SF 추천목록」입니다. 어떤 SF가 출간되었는지, 어떤 작품이 볼만한지, 심지어는 이 책이 SF로 분류되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하수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목록입니다. 다만 이 목록이 현재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에 한정되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비록 절판되었다 해도 훌륭한 작품이 많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헌책방을 돌아다니거나 커뮤니티를 기웃거리며 구매/교환할 정도의 노력은 언제나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미 여러 번 번역되었던 작품이라면 어떤 번역본이 더 읽기 좋은지 따위의 소개도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단순한 목록의 나열이 아닌, 간단한 작품 설명이라든지 책 표지 사진 등의 정보도 추가되면 좋을 걸 그랬습니다. 전에 www.happysf.net에서 본 글에서는 원래의 원고가 100쪽이 넘었다는데 출판된 원고는 10쪽인 걸 보면 원래는 상당히 많은 양의 자료가 있었나 싶습니다.

  전반적으로 너무나 어려워서 고개를 저으며 책을 내던질 일은 없을 듯합니다. 고수들이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내용의 나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수의 입장에서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의 출간 목적이 한국의 SF 시장을 넓히는 것이었다면, 눈높이 설정은 아주 적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표지를 보니 〈과학소설 전문무크 창간호〉라고 되어 있네요. 그렇다면 다음에 계속 이어져 나온다는 뜻인가 봅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과학소설 전문잡지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번의 부족했던 부분은 다음에 더 많이 채울 수 있겠지요(라고 판에 박힌 이야기를 해봅니다만, 사실 부족한 부분 따위는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 전에 베르베르의 『나무』에 대한 한 평론가의 평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으로써는 그 평론가의 심각한 무지에 대응할 방법이 없겠지요. 하지만 『Happy SF』의 발간을 계기로 SF 독자가 더 많아진다면, 이런 무지(막지)한 평론가는 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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