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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버 더 호라이즌

2004.03.26 21:1403.26





readingfantasy.pe.krylpatae@hyosung.com   사족

   어느 홈페이지에서 제 글 밑에 ‘이영도 씨의 글에 대해서 변호하는 사람’이라는 꼬리말을 대놓으신 분이 계시더군요. 좋은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글쎄요... 사실 이영도 씨만큼 그의 글에 많은 논란이 있는 환상 소설 작가는 없을 듯 합니다.

   {이영도 님의 소설에 대한 잡담이나 하죠}라는 글을 비롯해서 그에 대한 많은 변호의 글을 한 바 있지만, 기실 그가 많은 논란의 여지가 되는 이유는, 그가 그런 글을 쓸 줄 알기 때문이라는데 한 표를 슬쩍 던집니다.

   (이번 4. 15. 선거 때에는 모두모두 투표하셈- 잇힝-!)

   한참 외국 환상 소설이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모양새 탓에, 외국의 잘 된 작품들이 여럿 번역되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영도 씨의 글보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고전격인 [나니아 연대이야기]와 [어스시의 마법사] 정도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많은 기대를 했던 [멋진 징조들]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현란함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며, [제인에어 납치사건] 정도가 달콤한 활력소가 되었다고 해야할까요? (웃음)

  의외로, 이 곳 환상소설웹진 [거울 Mirror]의 분들 중에서도 이영도 씨의 글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도 많으실 듯하고, 또, 제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說을 풀 수 있는 사람도 이영도 씨 밖에 없을 듯하니, 이번에 새롭게 중보된 [오버 더 호라이즌]을 중심으로 제가 생각하는 이영도 씨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作家

   미묘하게 구분하는 습성 탓에, 제가 쓰는 잡글 속에서 <작가>와 <글쓴이>라는 말은 엄격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글쓴이, 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 <습작가>라는 말이 되겠군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한 사람의 습작가로써 저 표현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작가와 습작가는 단어 하나 차이지만, 단어하나를 떼어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비하여, 작가, 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풀이하자면, <만드는 가문>이라는 뜻이 되겠지만, 약간의 손질을 거쳐서 다시 해석하자면.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룬 자. 자신의 사유를 튼튼하게 쌓아올려 마침내는 하나의 가문을 형성한 자.

   저 개인적으로는 집 짓는 일에 종사하다보니, <집>이 가지는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집 짓는 일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설계와 시공, 그리고 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설계는 집을 잘 지어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어디에 주기둥을 박고, 어떤 공법을 사용해서 터파기를 하고, 또한 건물의 외양과 치장(마감)은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생각하고 도면을 그려보는 단계입니다. 시공은, 직접 지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설계의 도면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가지 변화와 변경을 거쳐서 지하 마지막 콘크리트 타설 작업부터 마지막 내부 장식(마감)까지... 한 채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 꼭대기에서부터 최하부 바닥까지 꼼꼼하게 체크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리는 이런 모든 작업을 감시하고 감독해서 공사가 잘못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입니다. 혹여 예산을 줄이기위해 나쁜 재료를 쓰지 않는가, 거푸집 작업 후에 7일간의 양생작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부실공사를 야기하지 않는가. 이런 하나하나의 과정을 감시하고 감독해서 제대로 된 집이 지어지는가를 체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과정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한 채의 아담하고 튼튼한 집[家]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러한 자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또 다듬어지며, 마침내는 우리 독자가 그 건축물 안에서 안온하고 평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자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중요한 과정 중에서 하나라도 결여된 자를 가리켜 작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길. 아무리 좋은 재료와 꼼꼼한 감시 감독이 있다 하더라도 부실 설계를 바탕으로 한 구조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말입니다. 혹은 훌륭한 재료와 꼼꼼한 설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감독이 철저하지 않다면 과연 그 구조물은 사람이 안온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곳인지 말입니다.


  이영도 씨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1. 그는 모든 등장인물을 통제한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의 손 아래에서 춤추고 움직인다. 그들은 살아있는 듯 하지만, 그들의 생존에 독창적인 여지는 없다. 작가가 그들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작품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에 현대적 의미의 소설이 등장한 이후로, 작가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작품이 있었습니까? 사실적인 글이든, 추상적인 것이든, 그 속에 작가를 표상하지 않은 인물은 하나도 없으며, 작중 인물 모두가 작가의 통제 없이 논다면 그 글은 지저분한 사유의 난립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이영도 씨의 글에는 결코 악인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악인은 그 이유를 가지므로 더이상 그들은 악인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 또한, 한 인물 한 인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글 쓰는 이의 주제를 향해서 수렴되도록 하는 이영도 씨 특유의 흐름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맥락이야 조금 다르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김승옥 씨의 작품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환상수첩 幻想手帖]만 하더라도, 작중 화자인 오영수부터 서커스단의 이씨까지... 모두 자신의 정체 正體 를 부여받?삶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습니까? 하나하나 인물이 자신만의 의의를 가지고 극 중에 삽입되어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이며, 이영도 씨는 바로 그런 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퇴마록을 쓴 이우혁 씨의 가장 큰 악덕이,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에 대해서 크나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겝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어야 할 시기에, 이우혁 씨는 다시 그들을 불러냄으로써 글의 주제 대신 인물들만 득시글거리는 지저분한 글을 만들어냅니다. 반면에 이영도 씨는 그의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생동하는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 인물들이 꼭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물들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며, 글솜씨가 뒷받침되므로 인해 그러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서 등장시킴으로써 글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영도 씨의 글은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독자가 읽고 알 수 있는 표현이나 쉬운 의미로 풀어주는 친절함이 그에게서는 찾기 어렵다. 그는 현학적이다.

   이영도 씨의 글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반전에 또 반전... 그래서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스포일러>라는 말은 일반적입니다. 6217명이라든지, 아니면 88챕터에 88일, 그리고 8명의 선장은 그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작은 즐거움이며, 독자들은 그런 것으로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모양의 반전을 통해서 큰 기쁨과 함께 그의 주제의식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 핸드레이크 <휴리첼>이 시오네에게 <물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중부대로의 슬픔인 아무르타트가 실은 인간의 폭주하는 삶을 제어할 수 있는 <석양의 감시자>임을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였으며 그와 함께 독자를 즐겁게하는 배려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파 L. 그라시엘이 준비된 껍데기임을 알았으며, 칼이 <모든 정의와 사랑, 우정의 이름을 깨어버리기>로 작정하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까. 그레이 휠드런이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뒤집어 쓰고, 제레인트의 처절한 절망 속에서 할슈타일 후작의 죽음의 순간이 고정되어 버릴지 누가 알았습니까. 분명히 글 쓰는 이는 그러한 반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간을 아껴써라!>는 명확하고 일반론적인 주제가 일곱권의 유쾌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독자를 기쁘게 합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반전은, 마치 장님을 인도하는 안내인의 친절함이 없다면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걷는 듯 합니다. <열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면, 열 한 번째의 해석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하겠다>고 말하던 글 쓰는 이는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글 속에서 독자를 버겁게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묵직함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최수철 씨 같은 이도 우리를 [얼음의 도가니]로 밀어놓고는 이상문학상을 잡아채는데, 왜 이영도 씨가 현학적인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게 어필합니까? 기우겠지만, <환상소설 주제에> 너무 어렵게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오히려, 저는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여러 현학적인 주제들이 글 속에서 생동하는 것을 보면서 글읽기의 기쁨을 새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전작(前作)들의 <어려움>이 나태한 독자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될 수 있다면, 다른 면에서 그는 분명한 글을 쓸 수 있어야하며 명료하고 단순한 이야기가 던져주는 미덕에도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후에 이야기하고자 할 <오버 더...>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그런 종류의 것 말입니다.


   3. 말장난이 문학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성석제 씨의 글장난과 이영도 씨의 글장난의 차이를 말할 수 있다면, 이런 비난도 달것입니다.
   드래곤 라자가 통신 문학과 환상 소설의 경계선상에서 미묘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환상 소설>이기에 그런 면이 조금 더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작품 중에서 그는 충분한 언어유희로 우리의 집중력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惑者가] 글의 언어유희의 가벼움에 대해서 많은 돌팔매질을 했지만, 그런 돌팔매질이 사람을 가리는 것을 볼 때에는, 이 나라의 문단이 지나친 엄숙주의와 엘리트 주의에 매몰되어서 자신의 외연을 한없이 축소시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장르 문학이라는 정체불명의 범주 그리고 대중 문학이라는 우열의 개념이 지금 한국 현대 소설의 상황을 대표하는 개념들은 아닐지요. 그 잣대 또한 모호하여 - 한 때 이문열 씨에게 대중 문학에 영합한다, 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변하지 않고 일관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이문열 씨의 최근 저작에 대해서 과연 뭐라고 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어마어마합니다 - 아무 곳에나 내키는대로 들이미는 주관적인 기준에 영합한 비난이 아닌, 의미있는 비판을 보고 싶습니다.


   오버 더...

   그에 대한 허접한 변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그의 증보판 [오버 더...] 시리즈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이영도 씨의 소설은 일관적으로 <넘겨다 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경계는 바로 <선>입니다. 수평선과 지평선. 퓨처 워커의 첫머리에서는 바로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북풍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글에서 유달리 바다가 많은 이유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바다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은 흡사, 세상의 저편에는 천국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황금의 땅 지팡구와 엘 도라도를 꿈꾸었지요. 그리고 아직도 꿈꾸고 있는.

   이상. 지평선[horizon]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꿈꾸는 듯한 이상입니다. 이상은 밤하늘의 별[nebula]과 같이 도달할 수 없는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안개[mist] 저편에서 찬란하게 비산하는 광선입니다. 인간의 이데아를 향한 끊임없는 경주가 바로 이영도 씨의 글의 일관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드래곤 라자는 관계성을 이야기 하였고, 퓨처 워커는 바람직한 인간의 삶에 대해,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영도 씨의 이야깃거리는 그의 단편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늘상 모호한 듯 보이는 이영도 씨의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폴라리스 랩소디의 에필로그는 - 개인 독서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중 하나이지만 - 많은 이들의 논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이영도 씨의 태도는 무엇인가, 에 대해서, 우리 독자들은 늘상 분명한 작가의 목소리에 어느덧 익숙해져왔고, 따라서 다양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영도 씨의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을 뿐더러 부담스럽기도 하고,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버 더... 시리즈의 티르 스트라이크를 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얼핏 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글은 독자의 것>이라면서도 <열 한 번째의 해석>을 앞에 두고 낄낄거린다는 작가의 <허풍>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영도 씨는 바로, 제레인트이며, 데스필드이고, 티르 스트라이크 이며, 비형 스라블이기도 합니다. 이상과 현실, 두 가지가 인간을 괴롭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그 두가지와는 아주 상관이 없으면서도, 두 가지를 모두 끌어안고 있는 <패스 pass>라는 것.

   이영도 씨의 글에서는 끊임없이 이상과 현실이 부딪치고 있고, 티르 스트라이크는 늘 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지만, 그의 결론은 두 가지와는 전혀 다른, <현재>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버 더 호라이즌은 가장 투박하고 직설적으로, 지평선을 넘겠다는 호라이즌의 선언이 있습니다. 오버 더 네뷸러 에서는 이면을 보여주는 마법의 역사적인 계승의 이상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오버 더 미스트는 고양이인가, 개인가의 희학적인 논란 뒤에 숨어있는 진실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숨어있지 않습니까.

   티르의 선택은, 처음에는 마타피 교수, 두번째에는 마을 사람들, 세번째에는 시리즈 최고의 매력남, 이파리 하드투스 - 이 감각적인 작명센스란! - 가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영도 씨의 글에서는 현재,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넘어선 최고선이며, 작가가 인생에서 그은 <패스>의 종착점이자, 패스 자체이기도 한 것일겝니다.


   인간이 살아숨쉬는...

   결국, 오버 더... 는 진리[horizon], 이면[nebula], 진실[mist]의 일항과 현실의 이항 사이에서, 새로운 세번째의 결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제 독후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제가 작가 이영도 씨의 글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견해를 이미 많이 늘어놓은 바, 글이라고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대립 아래에서, 현실을 벗어난 이상을 이야기 할 바에는 차라리 쓰지 말라는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념의 대립이 급격히 완화된 1990년대 이후로는 소소한 일상의 감각적인 발견의 모습이 주류가 되어가는 듯 합니다. 이는 묵직하고 거대한 사유의 무절제한 향연을 탈출한 일상인들이, 소소하고 디테일하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의 삶을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기쁨 속에 전율을 맛본 것을 글로 드러낸 것이며,

   그러나 문제는, 모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즘 글을 읽어보지 못해, 5여년 전의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지만 - 그리고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깨우쳐 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 이제는 그런 소소한 일상의 발견에 대한 글이 오히려 주류의 위치에서 다른 글을 -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 억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관객에 던져준 센세이션은, 그의 작품이 계속 되면서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영도 씨가 우리나라 소설 장르에서 가지는 의의는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상현 씨나 홍정훈 씨가 환상 소설을 현실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나, 이영도 씨는 그의 잡담에서가 아니면 현실을 넘어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실 이전의 인간, 그리고 인간의 본연.
   우리 문학사에서, 그러한 경험은 얼마나 소중하고 진귀한 것입니까? 태초에 인간이 있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설의 부류는 환상 소설이 <거의> 유일할 것이며, 이영도 씨는 그런 자신의 의도가 환상 소설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버 더... 시리즈는 우리에게, 현실 이전의 인간의 본연을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 훌륭하게 분화해서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다중적인 인격을 가집니다. 조금 무난하게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내부에는 많은 자아들이 각각의 사건에 대해서 매번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실, 정말 위험한 인간은 일관된 사람이 아닙니까? 각각의 다른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같은 결정을 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런지요. 또는, 이중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든 삶에서 극단을 치고 달리는 사람들은 정말 두려운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이라는 말을 씁니다. 갈대처럼 휘청거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 환상 소설은 한[壹]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그 사람의 본성을 여러갈래로 나눠서 인간 내부의 갈등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시키는 도구로써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바로 그렇지 않을지요.

  결국 [오버 더...] 시리즈에서도 보여지는 바, 이영도 씨가 주목하는 존재는 바로 인간이며, 그것 때문에 티르 스트라이크는 군수품을 도둑질하며, 마타피 교수의 치퍼티를 도난하고, 전수 중인 션을 방해하고, 개양이 혹은 고양개를 납치해버립니다.

   혹여 도피 혹은 회피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밝혀져야하고 올곧게 자리매김해야하며, 또는 정의와 사랑과 우정과 신의 이름으로 세상은 돌아가야하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인간이 있고, 우리가 인간을 비로소 인간 본연으로 대우할 수 있을 때, 그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자리잡으며, 혹은 [폴라리스 랩소디]처럼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 혹은 감상

   오버 더... 의 이야기가 아닌, 결국은 이영도라는 작가를 변호하는 글이 되어버렸지만, 충분히 양해하시리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비평 혹은 감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피드백의 기능 뿐만 아니라, 독자의 능동적인 도전이자 또다른 창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이 미흡하여, 아직은 허섭할 뿐이지만, 이영도 씨의 글을 매개삼아 쓴 이 짧은 글을 통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드러나고 여러 분들과 공유되기를 바라고 또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영도 씨의 소설도 많이 사랑해주셈- (휘리릭!)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참고로, 이영도 씨의 [오버 더...] 시리즈는

   [오버 더 호라이즌 over the horizon] 지평선을 넘어서

   [오버 더 네뷸러 over the nebula] 별무리의 건너편에

   [오버 더 미스트 over the mist] 안개 저편에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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