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2004.11.26 21:5011.26





toonism@magicn.com

작년 4월부터 꾸준히 SF를 발간해 오던 출판사 행복한책읽기에서, 올해 1월 [마라코트 심해]를 끝으로 반 년이 넘도록 책을 내지 않았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새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SF 발간이 갑자기 멈춘 이유는 ‘테드 창’이라는 한 명의 작가 때문이었습니다. 테드 창의 중단편집으로 일단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SF를 발간하겠다는 것이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전략은 상당히 성공한 듯합니다. 출판사의 사이트를 가 보면 그간 발간한 SF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주문이 늘어났다는군요.

   테드 창의 작품에서는 독특한 아이디어 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갑니다(뭐, 그렇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이해}에서는 모든 것의 의미를 한눈에 파악하는 초(超)천재를,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헵타포드’라는 외계인의 독특한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독특한 아이디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또다른) 독특한 생각과 상황을 불러 옵니다.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독특한 세계가, 그 짧은 단편 안에서 완벽하게 재생되고 독자에게 소화되는 거지요.


   수록 작품은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등 총 여덟 편입니다.
   (경고: 수록 작품의 내용을 일부 공개하였습니다. 스포일러 수준은 아닙니다만,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으시다면 아래 내용은 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일흔두 글자}를 가장 즐겁게 읽었습니다. 환타지와 SF 사이에 걸쳐진 듯한 세계의 이야기입니다(마치 랜달 개릿의 [다아시 경]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어떠한 물체에 ‘적명(適名)’이라는 것이 부여되면, 그 물체는 잠재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를 이용해서 진흙으로부터 자동인형(골렘)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명명학자의 능력에 따라, 이 자동인형은 단순한 작업부터 복잡한 작업까지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게 됩니다. 한편 이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은 멸절의 위기를 맞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명명학자가 필요해집니다. 즉 인간의 난자에 ‘적명’을 부여함으로써 난자 자체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거지요.
   저는 환타지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책 말미에 있는 {인터뷰/ 테드 창과의 대화}를 보면 작가는 환타지보다는 SF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테드 창의 말에 의하면 ‘마법은 엘리티즘에 입각해 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은 평등주의, 즉 누구나 해당 지식이 있다면 응용이 가능하다’는군요. 이 가상의 세계에서 명명학은 마법이라기보다는 과학에 가깝다는 거지요.

   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을수록 표제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지구 궤도상에 우주선들이 느닷없이 출현하고, 목초지에 인공물(人工物)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인공물은 ‘헵타포드’라는 외계인들이 설치한, 일종의 화상 전화기입니다.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학자들이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언어는 지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언어입니다. 이 개념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너무나도 새로워서(혹은 당혹스러워서?)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어리둥절했을 정도입니다. ‘스포일러’라는 비난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 자세한 설명은 피하고,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소개된 일부 단락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광선이 어떤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다른 분들의 감상글을 보면, 이 작품을 보면서 큰 감동을 느꼈다든지 눈물을 흘렸다든지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는 감정이 무뎌서인지 무언가를 볼 때 감동을 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거의 없어서, 윗분들과 같은 반응은 없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하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 단편집은 쉽게 읽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매 이야기마다 전혀 다른 세계와 플롯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단편집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진행, 어딘가 덜 이야기한 듯 아쉬우면서도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는 단편의 특성 때문이랄까요. 다만 이야기마다 완성도의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책을 읽는 흐름을 놓쳐버리는 단점도 있지요.
  그런 점에서 테드 창의 이 중단편집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매번 새로운 세계인데도 금세 그 세계에 적응하게 되거든요. 두세 쪽만 읽어도 어느새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작품집이 테드 창의 모든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새로이 좋아하게 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