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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간동물원

2004.10.30 01:0710.30





latehong@unitel.co.kr

츠츠이 야스다카의 이 단편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번역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원제가 [심리학ㆍ사괴학(心理學ㆍ社怪學)]인 이 단편집은 1999년 출판사 북스토리를 통해서 [섬을 삼킨 돌고래]라는, 도무지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으며 올해 9월 재간될 때도 [인간 동물원]이라는 번역 제목을 달고 나왔다. [섬을 삼킨 돌고래]라는 제목이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황당한 제목이며, [인간 동물원]이라는 제목은 {조건반사}라는 제목의 단편을 통해 언급이 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이 단편집을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광고 공세를 통해 베스트셀러를 빚어내며 독서 대중의 취향을 양치기 양 몰듯 몰아가는 시대, 반면에 작은 책은 좀처럼 안 팔리는 시대에 출판이라도 해준 게 어디며,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사람들 손이 다가가기 쉽도록 하려고 딱딱해 보이는 원제와는 다른 제목을 고심한 그 노력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사정들을 감안하더라도 이 단편집의 내용이며 구성을 포괄하는 원제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인간 동물원]에 수록된 단편들은 원제에 걸맞는 제목들로 짜여져 있는데, 수록된 작품 목록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르시시즘}, {욕구불만}, {우월감}, {사디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최면암시}, {게젤샤프트}, {게마인샤프트}, {원시공산제}, {의회제 민주주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근대도시}, {미래도시}, {조건반사}.

   정말이지 [심리학ㆍ사괴학]이라는 제목을 본 뒤 목차를 살펴봤다가는 딱딱한 인문 서적으로 오인하고 내려놓기 좋게 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이 단편집은 그렇게 딱딱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보기 드물게 잘 빠진 블랙 코미디라고나 할까. 역자 양억관 씨가 말한 것처럼 지하철에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기 좋은 책이다.

   츠츠이 야스다카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극단까지 끌고 가면서 그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일본 사회를(물론 사회 풍자적 소설들이 대게 그렇듯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풍자해나간다. 예컨대 {욕구불만}은 남성이 여성과의 섹스를 도외시하고 자위에 중독되는 현상이 사회에 만발하면서 벌어지게 되는 변화를 그린 작품이며, {우월감}은 오늘날 흔히 일어나고 있는 도시 영역 확장에 따른 중심지 공동화 현상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이야기다. 몇몇 초과학 개념들 정도를 제외하면 츠츠이 야스다카의 작품은 대게 지극히 실질적인 상황에서 출발하며, 사실 그 초과학 개념이라든 것도 염동력처럼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전부이다. 결국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을 로마 클럽형 미래 예측이 아니라 기발하고 독창적인 소설로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작가의 적나라한 풍자 정신과 거침없는 상상력이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욕구불만}의 일부를 살펴보자면,

  그 전부터 자위 입문서, 안내서, 학술서 등이 서점가를 강타했다. [자위 입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자위 기초 강좌], [가정에서 하는 자위 150가지], [자위, 이주일 마스터], [최신 유행 히트 자위집] 등이 속속 출간되었다. 드디어 주간지나 신문에도, [자위 마이니치], [자위통신], [수음 아사히] 등이 등장하였고, 소설 분야에서도 연애를 주제로 한 대중물이 퇴조하고, 자위를 주제로 한 것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섰다. 장편 역작 [자위광]이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자위문학이 꽃을 피웠고, 드디어 [자위 문춘] 등의 문학 잡지, [마스터베이션 미스터리 매거진]과 같은 추리소설 잡지, [자위일본] 등의 전문지도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pp.42~43.)

   이처럼 현실에 기반하고, 극단까지 끌어낸 이야기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혹은 쓴웃음 짓게 만드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즈음에 이르러 각 작품의 제목을 다시 볼 때, 결국 이 모든 황당하고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기존에 수없이 논의된 바 있는 우리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느껴지는 각 단편들의 울림이란 그 어느 걸작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냉소적인 독설이 ‘쿨’의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진지도 제법 되어, 이제 삶의 단면에 대해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마치 적당히 머리가 굵어진 청소년 아무나 할 수 있는 반항적 태도 정도로 보이곤 한다(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담이지만, [드래곤 라자]의 칼 헬턴트와 후치 네드발이 청소년 독자―――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한―――에게 미친 가장 큰 해악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풍자와 독설은 그렇게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현상의 일면을 통해 핵심을 찔러내는 관찰력과, 그것을 응용하여 과장 안에 담아냄으로써 독자의 웃음을 끌어내고, 그 웃음이 불편한 것임을 깨닫게 할 때, 그것이 비로소 제대로 된 풍자이며 독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츠츠이 야스다카의 [인간 동물원]은 극단적인 상상력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한 손꼽을만한 풍자 단편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짧고(모든 단편이 20페이지 내외), 충분히 웃기며, 충분히 강렬하다. 어서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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