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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뱀파이어라면 사족을 못쓰고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기한이 만료된 학급문고에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앞부분만 읽고 애태웠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조나단 파커의 편지가 끝나는 첫 챕터까지 읽었던 것이다. 끙끙 앓다가 급기야 꿈에서 내 인생 최초의 도둑질을 하고야 말았다. 만일 그 소설이 고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부모님께 사달라고 한 번 졸라보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 책과 공포특급 류의 책에서 아무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첫쳅터가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뒤의 소설도 드라큘라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가 잔뜩한, 뭐 그런 책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드라큘라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방학 때 공부를 빙자하여 인근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무조건 읽어대던 시절이었다. 먼저 나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1, 2년 전에 그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포스터만 보고 매우 보고 싶어했다는 느낌이 남아 있어서 책을 집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후 1년쯤 지났을까, 아버지가 도서관에서 대출해 오신 뱀파이어 연대기 2부 <뱀파이어 레스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런 부류의 소설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게 뻔한 아버지 대신에 새벽에 일어나서 그 책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일종의 시리즈이며 계속해서 후속편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대여점에서 3부 <저주받은 자들의 여왕>을 발견했다. 3부는 뱀파이어 연대기의 절정이었으며, 그 당시의 나에게 그 책은 거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재미있었다. 도서관에서 외전격인 4부 <육체의 도둑>을 한달음에 읽었다. 마침내 뱀파이어 연대기의 완결판인 5부 <악마 멤노크>가 출간되고 그 책을 내가 읽은 것은 1998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였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나올테니 보기 싫은 분들은 보지 마시라.
   <뱀파이어 연대기>를 낳은 힘은 한마디로 표현해 버림받은 느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앤 라이스는 딸아이가 병으로 죽은 이후 몇 년간을 알코올 중독상태로 살아오다가, 출세작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딸아이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녀 뱀파이어, 클라우디아로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 연대기>의 정조인 버림받은 느낌은 그런 개인적인 체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앤 라이스가 느끼는 분열과 간극은 사회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20세기 서구사회의, 종교성 있는 개인이 느낄법한 체험―――신과의 단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매우 세속적인 데다가 영성이 있는 경우에도 샤머니즘에 투사해버리곤 하는 행복한 사람들이므로, 이들의 외침이 무슨 맥락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신을 존재 위계의 맨 윗줄에 올려놓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인간존재의 목적과 의의를 믿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은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던 것이다. 이는 니체가 말한 수동적 허무주의의 상황과도 일치한다.
  
   <베르세르크>에서 가츠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율rule은 있는가, 라고 묻는다. 있기야, 있다. 파악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율도 없이 세상이 있겠는가. 그리스의 형이상학은 그 율이 로고스이며, 그것은 이성이므로, 이성을 가진 존재자인 인간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연역되는 신뢰는 아마도 인간 존재의 목적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일 거라는 것이다. 그에 덧붙여 카톨릭의 형이상학은 그 율이 인격이며, 그것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라는 행복한 논변을 펼친다. 그러나 노자는 하늘에다 삿대질하며 이렇게 외친다. 천지불인, 만물위추구(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아 인간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로고스(=道)는 당신이 뭘 하든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죽고 나서도 알게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레스타의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소수의 쾌락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사탄숭배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종교성의 발현이다. 그들은 악마를 통해 뱀파이어에게도 존재의 목적을 부여하고 싶은 것이니 말이다. 1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2부 <뱀파이어 레스타>는 루이스와 레스타라는 두 명의 상이한 케릭터가 이 동일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루이스가 끝없는 고뇌와 침잠으로 상실감에 대응한다면, 레스타는 시원(始原)을 추적하고 사건을 일으킨다. 레스타는 매우 유쾌한 케릭터로 얼핏 보면 니체가 말한 능동적 허무주의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상실감은 루이스와 동일한 것이다. 그는 선(善)을 추구하는 뱀파이어인 것이다.
  
   외전격인 4부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1부, 2부의 주제의식과 대비되는 것이 5부 <악마 멤노크>이며, 이 양자의 절충지대에 있는 것이 3부 <저주받은 자들의 여왕>이라고 볼 수 있다. 레스타의 시원을 향한 추적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계보학과 역사학은 윤리학에 대해 어떤 대답도 주지 않는다. 레스타가 깨운 2천년 묵은 뱀파이어 마리우스는 말한다. 신도 없다. 악마도 없다. 그 말은 5백년 묵은 뱀파이어 아르망에게 이미 들은 것이다. 3부에서 깨어나는 뱀파이어의 시조 여왕 아카샤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다. 신도 없다. 악마도 없다.
  
   그러나 3부는 새로운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아카샤는 유토피아주의자다. 키메라(고대 이집트)의 여왕일 때부터 그랬다. 아카샤가 낳은 뱀파이어, 궁전집사인 카이만은 말한다. 그녀는 원래 거창한 목적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신을 잃어버린 대신에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한다. 가치의 창조자, 위버맨쉬(초인)! 하지만 아카샤의 유토피아는 현실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피해서 만들어낸 내러티브이며, 도피의 판타지인 것처럼 묘사된다. 그녀의 전략은 고갱이 타히티에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취했던 전략과 동일하다. 화폭에서 남자를 지워버리는 것 말이다.
  
   그녀의 유토피아는 대학살 이후 살아남은 남자 1할과 여성 9할의 사회이며, 자신이 지모신으로, 그리고 레스타가 남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사회다. 여호수와 시대처럼 현현한 신이 직접 통치하는 사회다. 그녀는 창조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창조를 억누르는 데카당이다. 내러티브는 실패한다. 태고의 원한이 그녀를 제압하기 때문에. 그러나 마리우스는 말한다. 우리가 바로잡지 않았더라도 실패했을 거야. 아마도 내러티브가 애써 외면한 부분이 현실을 통해 분출될 것이다. 라캉이 말한 실재(reality)의 귀환이다.
  
   아카샤의 얘기를 떠나더라도, 3부는 상실한 이들의 질문에 대한 약간의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신도 악마도 없지만, 여기선 유령이 등장하며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무녀가 나온다. 뱀파이어는 육체를 탐하던 하나의 유령이 죽음 직전의 아카샤의 영혼을 부여잡고 그녀의 육체로 빨려 들어가면서 탄생한 피조물이다. 그래서 아카샤의 죽음은 뱀파이어 종족 전체의 죽음이며, 3부의 마지막에서 빨간머리의 자매는 오랜 원수인 아카샤를 죽이면서 자신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대의 원시부족들이 했던 것처럼 아카샤의 심장과 뇌수를 꺼내어 각자 먹는다. 하여간 여기서 앤 라이스가 주장하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암시되는데, 이는 영혼은 육체를 질투한다.는 것이다.
  
   3부에서부터 앤 라이스는 전우주적인 상실감에 대한 하나의 형이상학, 하나의 내러티브를 제시하려고 한다. 내러티브는 좀더 천천히 제시되면서 시리즈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작품의 가치를 더욱 크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5부에서 레스타 앞에 악마 멤노크가 나타나며, 창조주 신과 그 사이에서 태곳적부터 있었던 거대한 불화를 설명한다.
  
   멤노크는 <……연대기>의 주제였던 상실감을 완전히 뒤집는 케릭터는 아니다. 그 역시 가치 허무주의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신의 자기 일관성이 무엇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막연히 신이 하는 일엔 다 큰 뜻이 있겠지 뭐...라고 생각하는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멤노크는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 신에 대해 대결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사실 신 역시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결과를 발생시킬지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습게도 악마 멤노크의 신은 디오니소스주의자다. 죽음이 생명을 낳으며, 고통이 선(善)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점을 예증하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다. 멤노크는 그 행위가 인간의 디오니소스제를 패러디한 것일 뿐인, 창조성이 지극히 결여된 행위라고 비난한다. 멤노크는 완고한 플라톤주의자이며, 악을 선의 결여로 보고, 그리고 신이 왜 그 결여를 방치하는지를 모르겠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지옥에서(이 지옥은 카톨릭의 연옥에 대응된다) 모든 영혼들을 선하게 만들어 천국으로 올려보낼 때까지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 정신은 신이 만든 고통이 없었더라면 순선(順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승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지옥에 기거한다.
  
   레스타는 멤노크의 보좌관 역할을 제의받지만, 지옥의 참상에 쇼크를 먹고 그곳을 도망쳐 나온다. 체계적인 설명이 제시되었지만 아무것도 확증된 것은 없다. 레스타가 얻어온 예수의 수의를 보고 몇몇 이들은 굳건한 신앙심을 되찾는다. 뱀파이어 아르망은 신의 은총을 느끼며 자신의 저주받은 존재됨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레스타는 이 모든 것이 뱀파이어보다 더 상위의 존재들이 꾸민 연극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어쩌면 신은 우리의 투덜거림보다 훨씬 더 충분히, 빈번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에서 발생하는 인식론적 회의를 넘어서게 할 수는 없다. 내일 나타날 신이 아카샤인지 야훼인지 외계인인지 알게 뭐란 말이냐.
  
   뱀파이어에 대해서는 좀더 정교한 공식이 제공된다. 즉, 영혼은 육체를 질투한다. 그러나 육체가 좀더 정신적으로 통제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선 불만을 가진다. 앤 라이스에게 있어서도 정신은 위대한 것이다. 뱀파이어는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는 육체의 정신화이다. 피는 육체를 다른 종류의 물질로 바꾸는 매개체이며, 그것 자체가 영양분인 것은 아니다. 충분히 변환된 수천 년 묵은 뱀파이어들은 새끼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거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유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앤 라이스에 이르러 뱀파이어는 음습한 지하에서 기어나온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력적인 정신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2001년도 겨울에 어느 서점에서 있는 대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뱀파이어 레스타 2>, <저주받은 자들의 여왕 1, 2>, <악마 멤노크 2>를 구입했다. 그 후 한참동안이나 그 책들을 서점에서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발견해봤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이었고 말이다. 어제 우연히 대전역에서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역서점에 들어갔는데, 뱀파이어 연대기의 모든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뱀파이어 레스타 1>만 우선 구입을 했다. 다음에 대전 갔을 때도 그 책들이 있다면, 부족한 책들을 메꾸어 보리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이 책들이 한때 절판된 것은 사실이지만 요새 다시 찍은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예스24에서 찾아보니 1일이내에 발송이 가능하다고 한다. -.-;;
  
   나는 종교적인 상실감을 느껴본지가 매우 오래되었고, 아마도 별로 그런 것을 심각하게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앤 라이스의 소설을 보면 가끔 여자가 쓴 신파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소설들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나의 시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이 적어도 매우 재미있는 대중소설의 범주에는 들어간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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