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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돌 속의 거미

2004.07.30 21:3207.30





latehong@unitel.co.kr

   그렇잖아도 ‘거울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많은 분들께서 ‘환상’에 대해 나름의 심도 깊은 고찰을 하시던 참. 그 물결에 휩쓸려서 저도 이래저래 장르의 경계에 서 있는 작품 하나 소개합니다(……라지만, 노골노골한 장르 팬터지도 하나쯤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에러곤] 누가 말씀 안하시려나). 이번 호에서 제가 소개할 작품은 영림카디널 출판사에서 ‘세계 각국에서 추리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선정 기준을 갖고 출판하고 있는 Black Cat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아사구레 미쓰후미의 [돌 속의 거미]입니다.

   이 작품은 간단히 소개하자면 ‘명탐정 데어데블’입니다. 사고로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게 된 남자가 그 청각을 이용해서 한 여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이 간략한 줄거리죠. 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 수준이 [大語大佛]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시길. [돌 속의 거미]에서 등장하는 ‘청각’은 시각 대체형 수퍼 히어로 스킬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환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고찰해봐야 할 문제 중 하나는 ‘그렇다면 현실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조금 생각해보면 문제에 대한 답은 금방 나옵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면서 고개를 돌려 딴청 피우는 거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는 현실인 것이 타인에게는 현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환상을 이러한 ‘시각에 따른 인식의 괴리감’에서 보려는 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인지하지 못하는(물론 이 ‘인지하지 못하는’의 범위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만약 제 세계만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일들이 모조리 다 환상으로 들어가겠지요. 저라는 개인의 세계는 무척 좁으니까) 세계에 상상력을 무기 삼아 치밀하게 접근함으로써 현실을 달리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면 환상으로 밀어 넣는다는 거죠. 물론 이런저런 허점투성이인 구별 방식이겠지만, 적어도 저는 ‘환상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일상 탈출’ 이상의 대답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이 개념을 지지해오고 있습니다.

   자, 다시 [돌 속의 거미]로 돌아가죠. 앞서 언급했듯이, 주인공 다치바나의 이상청각은 단순한 시각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그의 청각은 그에게 독자적인 세계를 제시해주는 통로로서 작용합니다. 다치바나가 청각을 통해 세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게 이 작품을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인지라 되도록이면 자세한 설명을 피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다치바나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부동산 업자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나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이상 청각을 갖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집 밖의 차 소리를 듣고 차종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청각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아가지요. 악기를 수리하는 일을 하는 그는 어느 날 조율을 마친 기타를 배달하러 갔다가 막 지은 악기 연습장에서는 모든 소리가 굴곡 없이 대단히 맑게 들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집에서 듣는 소리가 악기 연습장에서의 소리보다 흔들리는 것은 그 집이 자신이 입주하기 전부터 특정한 소리에 길들여져 왔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까지 생각하게 되죠. 저음이 많이 섞인 음악만 반복해서 재생하면 똑같은 공장에서 나온 스피커도 다른 음색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언젠가 [여왕의 창기병]의 작가인 권병수 씨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쪽에 민감한 사람들은 처음 스피커를 사면 음역이 넓은 클래식 음악을 장시간 재생함으로써 스피커를 길들인다더군요. 전문 용어는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방 역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생활음에 익숙해지게 되고, 따라서 막 입주한 다치바나가 방안을 움직일 때 내는 소리의 반향에는 그 전에 살던 사람의 반복적인 행동의 흔적이 담겨있게 되는 거죠. 따라서 다치바나는 청각을 통해, 과거가 현재 속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지만, 읽지 않으신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다치바나가 자신의 청각을 통해 세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부분의 즐거움을 앗아가다니).

   작가 약력에 ‘[SF 매거진] 등에 실험적인 단편을 발표’가 있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법 과학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그러나 작품이 노리는 것은 사고의 과학적 도약에서 오는 경이감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환상적인 확장을 통해서 오는 꿈꾸는 듯한 감각이고, 그런 감각을 통한 이해의 과정입니다. 다치바나의 청각 세계는 철저하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대상을 향해 집중되고,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오기 전에 살았던 여인의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자의에 의해서 실종되었다는 이 여인의 행방을 다치바나가 좇는 추리극의 형태로 진행되는데(다치바나가 과거의 음만 계속 듣고 있다가 무작정 ‘아아, 내 귓속에 존재하는 내 사랑이여, 내가 간다!’라며 뛰쳐나가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구조적 허술함은 걱정 마세요. 다치바나는 자신이 여인의 행방을 찾는 이유를 나름대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 탐색의 과정 역시 결국은 미지의 여인을 점점 더 알아나가는 과정이지요.

   작품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다치바나의 추리 과정은, 물론 추리 소설로서도 상당한 의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환상 소설을 이야기하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에게 ‘환상이 갖춰야 할 현실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치바나는 그저 평범한 악기 수리상일 뿐이며, 그가 사건에 말려드는 것은 오로지 그가 가지고 있는 환상 세계로의 통로―――청각 때문입니다. 그는 351페이지에 달하는 작품 속에서 미지의 여인에게 다가서고자 할 때 취하는 방식은 철저히 자기 고유의 청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고용 띠지에 ‘독창적인 추리기법’ 운운하는 문구가 쓰인 것도 과장만은 아닙니다. 애초에 추리적 사고의 기반이 다르니까요. 이처럼 작가 아사구레 미쓰후미는 자신이 펼쳐놓은 환상의 세계를 단지 몇몇 장면의 전개를 돕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작품 전체에 깔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태도야말로 우리가 ‘환상에서 찾아야 할 현실성’일 것입니다. 종종 어떤 환상 소설들이 '비현실적이다'라고 질타당하는 이유는 그 표면적인 소재들이 우리의 삶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재를 담고 있는 세계를 치열하게 녹여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마법으로 쏴 죽이면 환상이고 총으로 쏴 죽이면 현실일 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가 세워진 바탕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광고용 띠지에도 “이 방에 새겨진 것은 여자의 고독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니 쉬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다치바나가 이해하는 여인의 모습은 축약하면 결국 ‘현대인의 고독’입니다. 이건 오늘날 대단히 진부한 테마인지라,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저도 사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식의 축약은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진 못합니다. 다치바나가 여인의 고독에 다가가는 방식-과정의 독창성 때문에(그리고 하나 더 첨가하자면 그런 내용을 깔끔하게 담아낸, 몽환적이지만 간결한 그 문체 덕분에), 우리는 그 진부한 테마의 표면에 슬어있는 녹을 닦아내고 그걸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결국 환상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식은 그런 것일 테지요. 같은 삶을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방향에서 보게 하는 것 말입니다. 바로 그런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돌 속의 거미]는 한 편의 훌륭한 환상 소설입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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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4.07.30 21:46 댓글 수정 삭제
    오. 이거 재미있겠군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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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Na 04.07.31 16:14 댓글 수정 삭제
    저까지 진지하게 『돌 속의 거미』 리뷰를 써냈으면 큰일날 뻔 했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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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4.08.28 02:46 댓글 수정 삭제
    그 것도 나름대로 재밌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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